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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87화 (87/135)

내 딸은 국힙원탑 87화

“오랜만입니다, 진형 씨. 아니다. 이제는 김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저희가 보낸 메일은 보셨죠?”

“아 네. 광고 영상 제작 건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저희가 답 메일 보내긴 했는데. 지금 회사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라서요.”

“괜찮습니다. 저희도 전편을 찍은 지 그리 오래된 게 아니라서. 여유 되실 때 맡아서 제작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어떻게든 우리와 계약을 맺고 싶다며 강하게 어필했다.

“혹시 단가가 아쉽다고 생각하시면. 절대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선입금이 필요하다면 계약금의 절반을 미리 드리죠.”

“아뇨.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요. 만약 기다린다고 하시면 몇 개월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괜찮습니다. 3개월 정도라면.”

3개월이라.

그동안 새로 인력을 충원하고 가르친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다.

어차피 촬영하고 편집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고.

‘이런 건 기획이 중요한 거니까.’

그런데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하연이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이번 광고에 하연이가 출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연이요?”

“네. 사실 하연이랑 저희 미래 그룹이랑 꽤 긴 인연을 맺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하연이가 엄청 유명해졌지만, 사실 하연이가 무명일 때 가장 먼저 영상에 얼굴을 비춘 건 저희 미래 그룹 홍보 영상이었고요.”

“하하.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연이 출연료가 추가로 발생합니다.”

“물론이죠. 하연이 인기를 고려해서 A급 연예인 모델료로 책정하고. 여기에 저희와의 인연까지 더해서 조금 더 얹혀 드릴 생각입니다.”

A급 연예인 모델료라고?

하연이가 요즘 잘 나가는 신인이라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작 4살짜리 꼬마다.

한신 그룹하고 찍은 광고 영상에서도 아이치고는 무척 높은 단가를 끌어내 좋다고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A급 연예인 모델료라니.

‘모델료만 최소 10억이다.’

와. 눈앞이 핑핑 돈다.

역시. 미래 그룹은 스케일이 다르구나.

이렇게 되면 광고 제작비보다 모델료가 훨씬 더 들게 된다.

10억이 넘는 광고가 이제 드물지 않은 세상이라지만, 이번 광고는 제품에 대해 알리는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공익 광고랄까? 아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캠페인성 광고였다.

이런 광고에 그런 거액을 쏟아붓겠다니.

전주현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영화 한 편 찍는데 제작비가 보통 20~30억 내외라고 하더군요. 적을 경우에는 13억 정도 하고요.”

“그렇죠.”

“저희는 광고가 영화에 준할 정도로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영화보다 더 높죠. 영화는 망하면 보는 사람들이 없지만, TV 광고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영화는 사람들이 외면하면 끝이다. 하지만 TV 광고는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노출된다. TV뿐만 아니라 유튜브 등 온라인 광고에도 쓸 수 있고.

물론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체에 송출비를 따로 줘야 하는 등 광고를 많이 할수록 지출이 늘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번 광고 제작에 사활을 건 눈치였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저출산국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이 사라질 거라는 우려도 적지 않죠.”

“네. 저도 뉴스에서 봤습니다. 올해 출산율은 0.73명 수준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저희는 이게 심각한 위기의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급속한 저출산과 고령화는 경제에 치명타로 돌아옵니다.”

“네.”

“2020년 국내 생산가능인구는 50년 뒤면 반토막이 될 게 자명하죠. 이런 식이라면 2030년에는 잠재성장률이 0%대에 진입하고 말 겁니다.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음. 그런데 그게 미래 그룹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 문제는 기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기업은 기본적으로 물건을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살 사람이 없다? 기업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 아무리 AI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일할 사람과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없다고 하면 기업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건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 차원의 위기죠.”

으흠. 하긴 유튜브에서도 현재 기후 위기 때문에 가장 먼저 변화의 흐름을 보이는 건 기업이라고 했다.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그러니까 환경, 사회, 기업 지배구조가 앞으로 기업에 무척이나 중요한 핵심의제가 될 텐데, 이렇게 미래를 대비하고 기업을 꾸리지 안으면 투자사들이 전혀 투자를 안 한다고 하니 먼저 변화의 움직임을 보인 것.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소중히 잘 돌봐야 하고, 그렇게 아이가 중요시되는 사회라면 자연스레 출산율도 오르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발언의 요지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왜 저희 회사와 계약을 하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후후. 진형 씨가 찍는 영상은 다른 곳과 다르거든요.”

“다른 곳과 다르다고요?”

“네. 진형 씨는 영상을 빨리 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메시지를 주변 상황과 잘 엮어서 무척이나 감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이전에 저희가 의뢰한 로비 영상이나 AI 소개 영상에서도 그랬죠. 물론 하연이의 출연도 필수고요.”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보다 더 잘 찍는 제작업체는 한국에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봤을 때 진형 씨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입니다. 다른 곳은 그저 돈 돈 돈. 돈만 밝히지, 알맹이가 없어요. 그러니 회장님도 진형 씨를 인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황태진 회장님이요?”

“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진형 씨의 사례를 예로 들며 그룹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하셨습니다.”

내가 뭘 했었던가?

황태진 회장이 나를 좋게 봐준다는 건 무척이나 감사할 일이지만 크게 대단한 걸 한 기억은 없다.

이래서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저희가 최근에 새로 사람을 뽑고 있으니까. 이 문제는 조만간 다시 회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 전에 가계약이라도 걸어두면 안 될까요?”

“가계약이요?”

“네. 우리와 광고 영상을 찍겠다는. 최소한 그 정도 문서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계약하시면 계약금도 미리 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가계약을 걸겠다니. 영상을 만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기에 나는 좋다고 그와 가계약을 맺었다.

사실 그들이 제작하고자 하는 영상의 메시지와 평소 내가 생각하는 바가 일치한 탓도 있었다.

‘그래.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지. 우리는 조금 더 아이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해.’

얼마 전 비행기에서 돌 지난 아이가 울었다고 ‘누가 애를 낳으래?’ 라며 욕설을 한 사건도 그렇고.

우리는 미래의 기둥이 될 아이들에게 너무나 불친절하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져서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결국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

진형이와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

원래부터 하연이가 예뻤지만, 그녀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아. 어쩜. 하연이는 왜 저렇게 귀여울까?”

옆에서 내 넋두리를 들었는지 보조교사인 예진 씨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유주 샘. 너무 하연이만 예뻐하는 거 아니에요?”

“네? 제가요? 에이. 설마요. 저는 저희 반 아이들을 모두 공평하게 사랑한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나와 하연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쳇. 물론 나는 하연이가 가장 좋다.

원래 자기 친자식도 여러 명이 있으면 그중 딱 한 명이 가장 예쁘다고 하지 않나.

친자식도 그럴지인데. 제자인 아이 중에서 누구 하나를 더 예뻐한다고 해서 그게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진형이와의 교제 이후 나의 퇴근 후 패턴이 조금 달라졌다.

어린이집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끝까지 남은 하연이와 함께 진형이네 집으로 갔던 것.

하연이 하원도 해주고, 셋이서 함께 진형이가 손수 차려주는 저녁도 먹고.

거기에 진형이 방에서 촬영까지 할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웹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화질의 카메라에 진형이의 편집까지.

이러니 왜 내가 그의 집에 안 올 수가 있겠는가.

“헉헉. 오늘 영상은 이걸로 끝이랍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아요! 빠이~”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휴. 오늘 추었던 곡은 희대의 춤꾼, 이태식이 최근에 발표한 신곡이었는데 과연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췄으니까 반응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진형이를 봤는데.

이 녀석 표정이 이상하다.

“너 뭐야?”

“응? 내가 왜?”

“왜 그런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아, 아냐. 그냥. 네가 너무 진지하게 추길래.”

“난 춤 출 땐 항상 진지해. 대충 추면 사람들이 다 알거든.”

“그래?”

“응. 그러니까 항상 최선을 다해 추고 있어. 춤이라는 것도 일종의 예술이잖아? 내면과 교감하면서, 응축된 에너지를 적절히 외부에 발산하는 게 중요하지.”

“그렇구나.”

하지만 진형이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으으.

나는 녀석에게 돌진하여 짱구 엄마의 주먹 돌리기 기술을 시전했다.

“아아악! 그만!!”

진형이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내 춤을 뭐로 보고 말이야.

이 정도는 해줘야 속이 시원했다.

녀석은 겨우 내 품에서 벗어나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윽. 여전하구나 넌.”

“그럼.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될 줄 알았어?”

“아니. 그게 네 매력이니까.”

“뭐라고?”

아니 이 녀석은 정말.

무슨 저런 말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복어처럼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지나가는 투로 툭 뱉었다.

“하연이는 보통 몇 시에 자?”

“음. 9시 정도. 그건 왜?”

“알았어. 오늘은 조금 늦게 집에 갈 테니까 이따 보자.”

“응? 아니 왜?”

바보 같긴. 그걸 꼭 말로 해줘야 아니? 여전히 이런 쪽으로는 감이 부족한 녀석이었다.

#

유주 샘과 아빠는 요즘 참 사이가 좋은 것 같다.

매일 집에 들리는 것은 기본.

최근에는 내가 잘 때까지도 마치 자기 집인 양 이곳에 머무는데.

‘이 기분 뭐지.’

뭔가 그동안 나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던 걸 빼앗긴 기분이다.

그게 꼭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지만은 않단 말이지. 독점욕 같은 걸까?’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젓고는 완성한 신곡을 아빠와 유주 샘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하연아.”

“신고옥.”

“신곡? 벌써 또 만들었어?”

“으웅.”

두 사람은 내가 만든 신곡을 듣고서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이거 우리 얘기니?”

“웅.”

“진짜로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웅.”

거참. 뭘 이런 걸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선무울이야.”

“선물?”

“내카 주는 두 사라안 선무울.”

둘은 순간 감동하였는지 나를 둘 사이에 끼고는 강려크한 찌부를 시전한다.

“아이고, 내 새끼! 아빤 우리 하연이밖에 없다아!!”

“하연아! 우리 귀요미!! 쪽쪽!”

아악! 김하연 죽어어!!

이제 곡에 맞는 안무도 짜고, 뮤비도 새로 찍어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 곡은 뮤비에 제작비를 좀 많이 쓰고 싶었다.

기왕이면 발리 전통 공연단과 협연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아빠에게 슬쩍 물었다.

“아빠아. 이번 곡에엔 말이죠오.”

아빠가 내 말을 듣더니 두 눈이 주먹만큼 커지면서 서둘러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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