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86화
상준이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축하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현모도 한마디 거들었다.
“잘됐네. 이제 성현이랑 나만 여친 구하면 되는 거냐?”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건들고 지랄이냐.”
성현이가 똥 씹은 표정은 하자 현모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하지만 넌 바쁘니까. 반드시 내가 먼저 사귈 거다.”
“미안하다.”
“응?”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뭐가?”
“나 사실. 여자친구. 있다.”
“뭐라고?”
이게 무슨 소리지? 한창 레지던트 생활로 바쁜 거 아니었어?
성현이가 승리자의 미소와 함께 코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고백받았다.”
“누구한테?”
“같이 레지던트 생활하는 동기한테.”
“헉. 그럼 의사 커플?”
“뭐 그렇게 되나?”
현모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중에서 여친 없는 건 나뿐이야?”
“그렇게 됐네. 힘내라.”
현모는 혼자서 술을 원샷하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쁜 시키들. 아주 지들만 잘 먹고 잘살아라.”
현모가 말은 저렇게 해도 쉽게 삐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우리는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왔고, 술자리를 즐겼다.
재희 씨는 진심으로 우리 두 사람을 축하하며 뜻 모를 말을 유주와 나누었다.
“내가 해준 말대로 하니까 잘 됐지?”
“어어. 재희야. 그건 다음에 따로.”
유주가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댄다.
하지만 상준이가 이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재희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해준 말대로 해서 잘 됐다니.”
그러자 재희 씨가 웃으며 말했다.
“진형 씨가 최근에 하연이랑 발리에 다녀왔잖아?”
“그랬지?”
“내가 조언을 하나 해줬거든.”
“뭐라고?”
모두의 시선이 재희 씨에게 집중되었다.
유주는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고.
“내가 매일 전화해서 안부 물어보라고 했거든.”
“오호라. 그런 일이 있었어?”
“응. 매일 전화하는 것 같더니. 결국 둘이 이렇게 됐네.”
나는 유주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게. 그랬던 거였어? 나는 하연이가 궁금해서 전화한 줄.
나는 재희 씨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재희 씨.”
“히히. 뭘요. 두 사람 잘 돼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예전에 둘이 처음 사귈 때도 유주가 난리였거든요.”
“난리?”
“자기 남친 너무 멋지지 않냐고. 위험할까 봐 옆에서 같이 노숙도 해주고. 아주 과방이 종일 시끄러웠다니까요. 진형 씨 칭찬한다고.”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어머머. 얘는. 지나간 과거라고 마음대로 고쳐 쓰면 안 되지. 기억 안 나?”
유주와 재희 씨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현모가 둘이 어쩌다가 다시 사귀게 되었는지 물어봐서 나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상준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젠장. 별 시답잖은 놈이 변호사 얼굴에 먹칠을 다 하네. 그래서. 그 뒤로는 별일 없었고?”
“응. 이미 끝난 문제인데 뭘.”
“그런 녀석은 아주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려야 하는데. 유주 씨. 그 사람 명함이나 직장정보 있어요?”
“음. 세우 법무법인에 다닌다고 했어요.”
유주가 싫은 기억을 다시 떠올렸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세우 법무법인이라. 나름 대형 로펌이네.”
“왜? 유명한 곳이야?”
“로펌 순위 5위 정도?”
“그래? 네가 다니는 박앤진은 국내 로펌 1위잖아?”
“하하. 우리 로펌에 비빌만한 곳은 아니지. 5위라곤 해도 고용된 변호사 수가 다르거든.”
그러다 현모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들이랑 손님들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고 했지? 가게 안에도 CCTV가 있을 거고.”
“응. 그게 왜?”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까 CCTV 기록도 남아있을 테고. 이거 공론화해볼래?”
“공론화를 하자고?”
그러니까 현모의 이야기는 이랬다.
CCTV나 사람들이 찍은 영상을 구한 다음 이를 기사화하자는 것.
확실히 그런 식이라면 상대가 대형 로펌의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물을 먹일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는 유주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됐어.”
“왜? 녀석이 다시는 고개도 못 들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횐데.”
“유주한테 실례야. 잊고 싶은 기억인데. 그걸 억지로 다시 끄집어내야 하니까.”
“아.”
모두의 표정에서 당사자인 유주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현모가 미안하다며 유주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유주 씨. 녀석을 혼내줄 생각에 유주 씨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네요.”
“아네요. 절 위해주려고 그러신 건대. 전 괜찮아요.”
현모도. 상준이도. 물론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 방법이면 유주와 선을 봤던 남성에게 골탕을 먹일 순 있어도, 유주가 받았던 상처가 치유될 순 없었다.
‘진격의 금융치료만 모를까. 상대 쪽을 주는 것 정도로는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야.’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성현이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짜식. 꼴에 남자친구라고. 앞으로도 유주 씨한테 잘해.”
“당연하지. 너나 여친님한테 잘해라. 일 바쁘다고 소홀히 하지 말고.”
“우린 맨날 붙어 있어서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어. 소홀은 무슨.”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현모의 얼굴이 다시 씁쓸해진다.
짜식. 조만간 소개팅이나 주선해줘야겠다.
그나저나 하연이는 옆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안주를 주워 먹으며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뒤늦게 하연이의 존재를 눈치챈 상준이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연이는 아빠한테 여자친구가 새로 생겼는데. 괜찮아?”
“네에.”
“그래? 역시 우리 하연이는 씩씩한 친구네.”
“저누운 유주우 쌤이 조커든요오!”
“오오. 김진형. 넌 진짜 복 받은 놈이다. 하연이가 싫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하하.”
“그러게. 따님의 윤허도 받았으니. 이제 둘이 결혼할 일만 남았네.”
결혼이라는 말에 나와 유주의 볼이 동시에 붉어졌다.
결혼이라. 일단은 연애부터 차근차근히 하고 나서. 나중에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고, 녀석들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기에 나는 유주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녀까지 외박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유주를 집에 데려다주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등을 돌리려는 순간.
유주가 내 어깨를 잡더니 내 볼에 뽀뽀해주었다.
- 쪼옥!
“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잘 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유주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심장이 막 쿵쾅거린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유주의 손을 붙잡고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뽀뽀? 어림없지. 우리가 이제 막 처음 사귀는 학생도 아니고. 먼저 시동 건 건 너니까 인제 와서 후회하지 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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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그룹 홍보팀의 이사인 전주현은 최근 고민이 있었다.
거액의 돈을 들여 제작한 광고가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걸 찍는다고 A급 연예인을 세 명이나 섭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 돈만 처발랐지 무슨 90년대 광고 찍냐?
└ 미래 실망이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연예인 출연료가 아깝다, 아까워
└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AI 홍보 영상은 엄청 신선했는데 말이죠. 이건 좀 돈 낭비인 듯
└ 그래서 이 광고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애 많이 낳자는 거냐? 염병할
└ 이 광고를 딩크족들이 싫어합니다
분명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미래 그룹은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이런 메시지를 주려고 한 건데.
돌아온 건 그저 비아냥뿐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그룹을 비방하는 악의적 기사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자신이 주도한 광고까지 악평을 받자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그냥 언론사에 기자로 계속 있을 걸 그랬나.’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들면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조직을 떠나고 싶던 그였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한신 호텔을 소개하는 광고를 보았다.
자기도 익히 아는 얼굴이 화면에 등장.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있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일상이 반복되고 여유가 그리워질 때. 한신 호텔&리조트가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그런 멘트와 함께 짧지만 강렬했던 광고는 끝이 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리가 찍은 광고영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아버지와 딸이 호텔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며 행복해하는 모습. 전혀 억지스러운 장면이 아니었다.
반면 우리가 찍은 영상은 어떻던가.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아이를 안아주고, 돌봐주고, 같이 식사하는 모습이 들어갔지만.
실제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메시지 또한 촌스럽다.’
이걸 찍는다고 유명하다는 영상 제작업체에 거액의 돈을 주고 맡겼는데.
전주현은 다시는 그 업체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는 밑에 부하직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그래요. ‘아이가 행복해야 미래가 행복하다’ 광고 후속편을 찍고 싶은데.”
“네? 그거 찍은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만.”
부하직원이 뒤로 갈수록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너 또 깨지려고 그러는 거냐고 자신을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랑 예전에 홍보 영상 찍었던 김진형 씨한테 연락해봐요.”
“김진형 씨요?”
“광고 영상 찍어볼 생각 없냐고. 단가는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라고.”
“아. 알겠습니다. 한번 연락해보겠습니다!”
그의 실력이 생각났던지 부하직원의 목소리는 다시금 높아져 있었다.
아무렴. 사내 로비 영상도 그렇고, AI 홍보 영상도 그렇고. 그가 찍은 영상은 무척이나 좋은 반응을 얻지 않았던가.
‘왜 처음부터 그에게 연락해볼 생각을 못 했던 걸까. 내 실책이로군.’
전주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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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메일을 살펴보던 김소라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사장니임!!”
“네?”
“미래 그룹에서 광고 영상을 찍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미래 그룹이요?”
“네. 아이가 행복해야 미래가 행복하다는 미래 그룹 캠페인을 널리 알리는 목적의 영상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와! 대박! 미래 그룹에서 연락을 주다니!”
미래 그룹이라는 말에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누가 뭐래도 미래 그룹은 한국 최고의 대기업이니까.
하지만 나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답했다.
“지금 추가로 광고 찍을 여력이 되나요? 다들?”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읽혔다.
그도 그럴 게 지금 한신 그룹 영상을 비롯해서 외주 영상을 제작한다고 매일 야근하는 등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추가로 영상을 찍을 여력은 없었다.
“김 과장님. 우리 채용공고는 구인 사이트에 올려놨죠?”
“네, 사장님. 지금도 계속해서 이력서가 들어오는 중이에요.”
“새로 사람을 뽑는다고 해도 그들이 적응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릴 텐데. 아무래도 이번 미래 그룹 건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럴까요?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 미래 그룹인데. 뭔가 놓치기 아깝네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억지로 받았다가 오히려 화가 될지도 몰라요. 요구하는 퀄리티도 높을 텐데 우리가 그걸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만들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김소라가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절 의사를 밝힐게요. 이런 건 한시라도 빨리 답장을 해주는 게 서로한테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래요. 최대한 정중하게 써서 보내주세요. 우리도 너무 하고 싶은데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당장은 어렵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요.”
“네, 사장님!”
그렇게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바로 다음 날 또다시 그들에게서 메일이 왔다.
시간은 조금 늦어져도 좋으니까. 제발 우리와 계약을 맺어달라고. 곰도리형제단이 아니면 절대로 이 영상을 찍을 수 없다며 말이다.
심지어 그날 오후에는 미래 그룹 홍보 임원이 우리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이전에 통성명했던 전주현 이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