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85화
“너도 내가 관심이 있으니까 그 자리에 나왔던 거 아냐. 나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으응.”
“나 전부터 계속 널 좋아해 왔어. 아니 헤어졌을 때부터 납득할 수 없었어. 난 네가 좋은데. 네가 멋대로 연락을 끊은 거니까.”
“유주야..”
“이번에 그 미친 새끼 만나고 확신했어. 나는 너 아니면 안 되는 것 같아. 진형아. 우리 다시 잘해보자. 응? 내가 이렇게 빌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그녀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며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끊지 않았던가.
그렇게 연락 없이 살다가 갑자기 내 애라면서 하연이를 그녀의 어린이집에 맡겼었고.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헤어졌을 때조차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지금까지 주욱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세상이 빙빙 도는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유주는 계속해서 융단폭격을 해왔다.
“나, 하연이 잘 돌볼 자신 있어.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하연이를 사랑하고 아껴줄 거야. 진심이야!”
“...”
“네가 하는 일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춤추는 영상? 요리하는 영상? 말만 해. 내가 다 할 수 있어!”
“저기 유주야.”
“응. 말해. 듣고 있어.”
유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 입에 시선을 고정한다.
“나. 미혼부야. 알지?”
“당연히 알지. 그게 뭐? 어때서?”
“아니 사회적으로 조금. 그렇잖아.”
“난 상관없어. 막말로 아까 그 빌어먹을 새끼가 내뱉은 말처럼. 어린이집 교사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 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유주의 어깨가 다시금 떨려왔다.
여기서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순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여전히 유주를 좋아하고 있었고.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유주와 다시 만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녀를 떠나놓고선. 그녀에게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하연이가 생긴 뒤로는 더더욱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 당시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유주에게 아이를 돌봐달라는 부탁들 하였지만,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먼저 유주한테 고백을 할 수 있었겠어.’
그런데 이렇게 마법처럼. 유주도 나를 원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나한테 먼저 고백하다니. 꿈만 같았다.
나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겨우 억누르고선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다물었다.
“만약 우리가 다시 사귀게 된다면. 결코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야.”
“괜찮아. 각오는 이미 되어 있어.”
“우릴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너희 부모님이나 친지들도 나를 그다지 안 좋아할 수도 있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잖아? 난 너만 있으면 돼!”
유주가 울부짖듯 내게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울컥. 가슴이 아렸다.
“난 한때 너를 버린 놈이야. 진짜 괜찮겠어?”
“왜? 그래서 또 나를 버릴 거야? 또 그럴 거냐고!”
“아니. 절대로 그건 아냐!”
“그럼 됐어. 그거면 충분해.”
유주가 강하게 내 품에 안겼다.
아. 이제는 나도 더는 모르겠다.
나 역시 유주가 좋고, 유주가 내 여자친구라면 더 바랄 게 없다.
다만 그동안은 내가 먼저 그녀를 찼다는 과거가. 그리고 애 딸린 미혼부라는 신분이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하게 했었던 것뿐.
나는 힘껏 유주를 안고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렇게 좋은 여자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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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밖은 폭풍과도 다름없었다.
유주 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아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다가 이내 평온이 찾아왔다.
‘결국. 잘 되었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나름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줬으니 이 뒤로는 아빠와 유주 샘의 몫이었다.
‘둘이 잘 되길 바라야지.’
아빠는 유주 샘을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혼자 집을 볼 수 있겠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이죠. 아빠. 이참에 아예 그쪽 집에다 인사도 하고 오세요.
유주 샘은 아빠 거라고 말이에요.
아무튼 아빠와 유주 샘이 집을 떠났고, 나는 홀로 남겨진 집안에서 빈둥거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신곡을 짜는 데 집중했다.
발리 전통 악기를 베이스로 모던한 리듬을 살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곡을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집중이 잘 안되었다.
아빠와 유주 샘이 다시 사귀기로 했다면.
내일부터는 어떤 얼굴로 유주 샘을 보는 게 좋을까?
새엄마? 아니지. 아직 이건 아니고.
아빠의 여자친구? 그럼 호칭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으려나.
잠깐. 곡만 만들었고, 아직 가사는 쓰지 않았는데, 아빠와 유주 샘의 사연을 참고로 해서 쓰면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애절한 가사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결정했어. 이번 곡은 아빠와 유주 샘을 위해 헌정하는 노래를 만들어야지.
그러니까 이건 두 사람을 향한 나의 선물과도 같다.
대략적인 뼈대가 정해지자 이후로는 술술 아이디어가 나왔다.
원래 대중가요 가사라는 게 필만 받으면 몇 분 안에라도 뚝딱 만들어지는 법이다.
역시 예술이란. 이성보단 감성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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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각오를 다지고 유주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주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내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정말 괜찮겠어? 부담되면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는데.”
“아냐. 여기까지 왔으니까. 제대로 인사하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고마워, 진형아.”
유주가 내 어깨에 살며시 자신의 얼굴을 기대며 안겨 왔다.
내가 유주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유주의 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응? 이게 누구야? 너 진형이 아니니? 그런데.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나와 유주가 맞잡은 손을 보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니겠는가. 한때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아프게 한 당사자인 내가. 다시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당당히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 같아도 열불이 뻗칠 일일 것이다.
이내 그녀의 아버지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응? 자네. 지금 뭐 하는 겐가? 왜 우리 딸하고 같이 들어왔어?”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납작 절을 올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딸을 제게 주십시오!!”
“뭐뭣?”
“뭐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높아진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한테는 유주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절대 유주 눈에서 눈물 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키겠습니다! 진심입니다, 부모님!”
갑자기 두 분의 딸을 내게 달라니. 뜬금없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슬쩍 간이나 보면서 관망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이왕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나.
유주 어머니는 건조한 목소리로 유주를 불렀다.
“신유주. 너 이리로 와 봐. 엄마랑 얘기 좀 해.”
그렇게 해서 유주는 그녀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뻘쭘하게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보는 두 남자.
다행히 이 집의 주인이신 아버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사업은 잘 돼 가나?”
“아예. 아버님. 열심히 키우는 중입니다.”
“그래. 하는 일이 제법 잘 된다고 들었어. 유튜브가 요즘은 인기라지?”
“네. 요즘은 TV 대신 유튜브를 더 많이 보는 시대니까요.”
“그래. 나도 자네 요리 채널이랑 하연이 채널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네.”
“앗! 설마 구독자신가요?”
“후후. 그렇지. 자네 생각보다 요리 잘하던데? 덕분에 나도 많이 참고하고 있어.”
이런 영광이.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감사를 표했다.
그는 괜찮다며 웃고는 하연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애가 보통이 아니야. 어린이집에서도 최고 인기 스타라고 하더구먼. 혼자서 그렇게 잘 키우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
“아닙니다, 아버님. 하연이가 원체 똑똑한 아이라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결국 자식은 부모를 닮는 거야. 자네가 똑똑하니까 하연이도 똑똑한 거겠지. 그리고 나는 재능보다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네. 자네가 잘 키웠으니까 하연이도 그렇게 잘 자라준 거겠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
“네, 아버님.”
“입술은 왜 그런가? 어디 다쳤어?”
앗. 아까 너무 세게 깨물어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네.”
“우리 유주랑 결혼하게 된다면.”
“아 네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유주랑 사이에서도 애를 낳을 생각인가?”
네? 아니 아직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는데요?
그녀와 만나기로 마음먹은 것도 불과 몇 분 전의 일이고.
나는 유주와 사귀겠다는 의도로 오늘 이 집을 방문한 건데 내 딸을 달라는 의미가 그에게는 강렬하게 전달되었나 보다.
“..아직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군. 나는 이왕이면 둘 사이에도 애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아무리 하연이가 예쁘고 똑똑한 친구라지만. 어찌 되었건 유주의 친딸은 아니잖나? 부부 사이라는 게 그래. 처음에는 좋아도 시간이 흐를수록 다투기도 하고 소원해지는 시기가 있거든.”
“네, 아버님.”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게 결국 자식이야. 자식이란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의 결정체이지 않나? 자식을 보면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지기도 하고. 그런 법이네.”
네네. 아버님. 만약 유주와 결혼까지 가게 된다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씀은?
“아버님은 저랑 유주가 다시 사귀는 걸 반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반대? 내가 왜? 유주도 벌써 성인이야. 올해 서른이지. 다 큰 딸이 결정한 문제를 부모가 왈가불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안 그런가?”
“아. 그렇죠. 맞는 말씀이십니다, 아버님.”
역시 아버님.
예전에 유주와 사귀었을 때도 우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밀어주신 분이셨는데.
이렇게나 열린 사고를 가진 선지자셨다니.
‘그렇다면 이제 남은 관문은.’
유주 어머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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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신이 있어, 없어?”
“내가 뭘?”
“오늘 선보러 나갔다는 기집애가. 갑자기 예전에 사귀었다가 연락 끊긴 애를 데리고 들어와? 게다가 애 아빠를?”
“엄마는! 내가 오늘 그 자리에서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는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뭐?”
신유주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엄마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엄마의 눈에 눈물이 글썽 맺히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유주야. 이렇게나 예쁘고 귀한 내 딸이. 감히 그런 대접을 받아? 내 이놈의 자식을 그냥!!”
“진정해, 엄마. 그놈 일을 잊어. 나도 잊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진형이는 도대체 뭐야? 왜 갑자기?”
신유주는 거기서 우연히 진형이를 만났고, 그가 자신을 도와준 일을 말해주었다.
“그랬구나. 그런 일이.”
그녀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 눈을 번뜩였다.
“그래도 그렇지. 네가 뭐가 아까워서?”
“아이참 엄마는. 그러는 진형이는 뭐가 아쉬워서요. 쟤 요즘 완전 잘나가는 사장님이야. 차도 외제차 끌고 다니고, 밑에 직원도 많아. 게다가 하연이 알지?”
“으응. 알지. 네가 맨날 칭찬하는 아이잖니.”
“하연이가 요즘 또 얼마나 잘 나가는데! 조만간 차트 정상을 휩쓸 친구라니까?”
“그래? 그 정도야?”
아무래도 엄마는 TV를 보는 세대라서 유튜브 위주로 활동하는 하연이의 인기를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엄마. 아기춤이라고 알지?”
“아기춤? 알지? 요즘에 TV 보면 연예인들이 많이 따라 추던걸?”
“내 말이! 그게 하연이가 만든 춤이라니까.”
“진짜?”
“응! 엄마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하연이 걔가 요즘 진짜 대세야, 대세! 엄마 친구들한테도 한 번 물어봐. 하연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신유주가 그녀의 엄마를 설득한 결과.
그녀 역시 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아. 알겠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려고?”
“으응?”
“아니 아까 진형이도 그랬잖니. 너를 자기한테 달라고. 그 말이 그 뜻 아냐? 둘이 결혼하겠다고?”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아까는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까 진형이가 분명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자신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화끈 달아오른다.
“어머. 얘 얼굴 좀 봐? 너도 갱년기니?”
“엄마는! 아무튼 엄마도 진형이랑 다시 사귀는 거 찬성하겠다 이거지?”
“휴.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지 않니. 어쩌겠어. 네가 이렇게나 진심인데.”
우하하하. 됐다. 드디어 됐어!
그렇게 두 사람은.
부모님들께 정식으로 인정받고 교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런 경우에는 오늘부터 1일인가 아니면 예전에 사귀었던 걸 다시 카운트해야 하나?
신유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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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만에 세 얼간이와 재희 씨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유주와 사귀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위함이다.
유주가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자 모두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야. 지녕아. 너 뭐 잘못먹었냐?”
“뭐?”
“얼굴이 헤벌쭉해서는. 좀 이상한데?”
이 자식들은 진짜.
나는 그들에게 무뚝뚝하게 술을 따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 유주. 다시 사귀기로 했다.”
모두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한가득 올라오더니. 이내 기쁨으로 넘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