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84화
미운 네 살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미운 일곱 살이었던 것 같은데 애들 성장과 발육이 빨라지면서 시기가 앞당겨진 것.
이전까지는 예쁜 행동만 골라 하던 아이가 갑자기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울고불고 떼를 쓰기 시작해서 붙여진 말이다.
4살 행복반 담임을 맡으면서 쉽지 않을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편했다.
왜냐고?
우리 반에는 하연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어린이집에 왔을 때부터 어딘가 또래와는 달랐던 하연이는 어느새 우리 어린이집의 스타가 되어있었다.
차분하고, 격조 있고, 배려심이 있는 그녀의 영향인지 아이들은 그녀를 많이 따랐다. 그녀의 행동을 닮기 위해 노력한달까?
실제로 많은 학부모가 요즘 아이들이 차분해진 것 같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이야.’
나는 하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주머니 속의 진동을 느끼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늘 선을 보기로 한 남자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생각보다 일찍 끝날 것 같아서. 약속 시간을 1시간 당길 수 있나요?>
1시간 당기자고?
그럼 내 퇴근 시간은?
아이들 하원을 마무리한다고 해서 곧바로 퇴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린이집 청소도 해야 하고, 서류작업도 해야 하는 등 어린이집 교사가 해야 할 일을 생각보다 많다.
그냥 자기가 먼저 와서 기다리면 될 걸 1시간이나 당기자니.
‘한국대 법대 출신이라 그런가? 오만한 사람이네.’
아무튼 그건 곤란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하연이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선생니이임?”
“응? 하연아 왜?”
“어디 불펴언하세요오?”
“아. 아니야. 선생님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짜 이런 천사가 어디에서 뚝 떨어진 걸까?
내가 하연이의 생물학적 엄마는 아니지만, 이런 딸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 같다.
그런데 김진형 이 자식은 누나가 선을 본다니까 잠깐 흥미를 보이는 것 같더니 그 뒤로 말이 없다.
‘내가 선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
한때는 서로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죽을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색 바랜 추억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오후가 되자 아이들을 보조교사에 맡기고 사무실로 들어와 행정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모가 계속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므흣한 시선으로 말이다.
“이모.”
“원장님.”
“..원장님. 저 좀 그만 보시면 안 될까요?”
“옷은 예쁘게 잘 입고 왔구먼. 얼굴이 왜 죽상이야? 무슨 일 있어?”
하아. 이모가 엄마한테 소개해준 그 남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인데 자기 멋대로 약속 당일 시간을 당기지 않나.
하지만 이모가 기분 상할까 봐 그런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그냥이요.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네요.”
“어. 그럼 안 되는데. 집에 가서 좀 쉴래?”
“됐어요. 뭘 이런 걸로 쉬어요.”
“아냐 아냐. 괜찮으니까 신 선생은 집에 가서 좀 쉬어. 중요한 일 앞둔 사람이 컨디션이 나빠서 쓰나.”
평소에는 조카라도 예외 없이 빡시게 굴리더니, 한국대 법대라는 네임밸류에 완전히 혹한 모양이다.
‘그러니. 진형이와 같은 미혼부가 눈에 들어는 오겠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따라 유독 화면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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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아! 나 패미일리이 레츠토랑에 가고오 시포요!”
“패밀리 레스토랑에? 거기서 저녁 먹고 싶은 거야?”
“웅!!”
하원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연이가 난데없이 패밀리 레스토랑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 뭐 괜찮겠지. 어차피 저긴 노래대회 1등을 타면서 받은 공짜 이용권도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하연이가 고개를 저었다.
어린이집에서 간식을 많이 먹어서 지금은 아니고 조금 이따 가잔다.
그래서 집에서 조금 놀다가 7시가 넘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불경기라 하더니 확실히 손님들이 많지 않다.
넓은 실내에 듬성듬성 손님들이 앉아 있을 뿐 식당은 한가했다.
우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음식도 주문했겠다. 내부를 슬쩍 둘러보는데 어딘지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긴 생머리를 한 여성인데 어쩐지 유주 뒷모습과 흡사하다.
그 앞쪽으로는 정장을 입은 키 작고 뚱뚱한 남성이 한 명 보였고.
‘뭔가 언밸런스한 커플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부에 손님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그들의 대화가 얼핏 들려왔다.
설렘을 가득 안은 남자의 목소리가 유독 큰 탓도 있었다.
“헤헤. 사진으로도 미인이셨는데, 실물은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아 네.”
와. 아름답다는 표현을 저렇게 직설적으로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그나저나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 같다. 소개팅 같은 거려나?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게 젊은 남녀 간의 만남이라더니.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귀가 쫑긋거린다.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신다고요?”
“맞아요.”
“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올해로 5년 차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거 할 만해요? 힘들다고 하던데?”
“네?”
여자는 놀랐는지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가 알기론 엄청 박봉에다가 애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힘들다고 들었는데. 5년이나 하셨으면 엄청 길게 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잖아요? 저는 제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요?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돈이 전부인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휴. 재수다 정말. 남자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면에 저렇게 상대의 직업을 깎아내리다니.
‘넌 오늘 글렀다, 쨔샤.’
그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하연이가 먹기 좋게 웰던으로 구워진 스테이크와 꾸덕꾸덕한 치즈가 잔뜩 올려진 베이컨 크림 파스타.
두툼하게 자른 스테이크를 하연이 그릇에 옮겨다 주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제가 왜요?”
“제가 이래 봬도 돈을 꽤 많이 법니다. 하하. 혼자 벌어도 유주 씨 힘들지 않게 케어해드릴 수 있어요.”
응? 유주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까 여자는 내가 아는 그 유주가 맞는 것 같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내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상대 남성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제가 변호사 아닙니까. 이쪽도 체면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죠. 결혼할 사람이 어린이집 선생 따위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 좀 곤란합니다.”
“저기요.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예요.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요.”
“하하. 뭐 그래도 다 알고 나오신 거 아니에요? 선 자리라는 게 그렇잖아요?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는 서로 간의 탐색전이랄까? 저는 유주 씨가 마음에 드는데. 유주 씨는 어떻습니까?”
그러자 유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식사는 잘 먹었습니다. 그럼.”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구를 향해 나아간다.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그런데 남자가 예상외로 끈질겼다.
보통은 이만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텐데.
그는 유주의 뒤를 빠르게 쫓아가더니 그녀의 손을 강하게 낚아챘다.
‘저런 시발 놈이!’
나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이 솟구친다.
“야! 네가 그렇게 대단해? 얼굴 좀 예쁘다고 좋게 좋게 이야기해주니까. 내가 물로 보여?”
“저기요. 이 손 좀 놓고 이야기해주시겠어요?”
그나저나 둘의 모습이 웃기다. 유주는 원래 키가 큰 편인데, 하이힐까지 신어서인지 상대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전투력이 흘러넘쳤다.
“하아?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그렇게 고고하게 굴면. 내가 와. 내 인생에 이런 애는 처음이야 하면서 질질 짤 줄 알았어?”
“임현민 변호사님. 지금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고 있는 거 아시..?!”
그 순간 유주와 눈이 마주쳤다.
유주는 놀랐는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대 남성은 그게 자기가 무서워서 그런 건 줄 착각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제 좀 내가 무서워졌어? 나 변호사야. 네까짓 게 열 트럭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어디서 어린이집 선생 따위가 건방지게..응?”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의 앞이었다.
나는 상대 남성의 팔을 붙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그 손 놔라. 상대가 아파하는 거 안 보여?”
“허? 이건 또 뭐야? 진짜 동네가 찌질해서 그런지 찌질한 놈들밖에 없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지금 사람들이 네가 하는 행동을 찍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러자 상대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본다.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을 비롯한 손님들이 죄다 스마트폰을 들고선 이 모습을 찍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쩔쩔맸다.
“하하. 이거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
“선생님은 됐고 그 손 놓으라고.”
“아 네네. 그러죠. 여러분. 이거 장난이에요, 장난. 그리고 그렇게 상대방 동의 없이 촬영하면 불법입니다, 그거.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으로도 이어질 수 있어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빠른 속도로 식당에서 종적을 감췄다.
유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어서 내 키만 해진 그녀에게 여전히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해댔다.
나는 하연이와 함께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도저히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었으니까.
하연이를 방으로 보낸 뒤 그녀에게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한 잔 주었다.
“마셔.”
“...”
“욕봤다.”
“...”
“그런 미친 새끼가 진짜로 현실에 존재하는구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악역 A였는데 말이야. 진짜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지?”
내가 일부러 과장되게 오버하자, 유주는 딸꾹거리는 것 같더니 내게 건넨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컵 뒤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 안됐다.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에 초점을 잃은 듯한 동공.
나는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마실 커피를 따로 내렸다.
그런데 유주가 작은 목소리로 내 등을 향해 말을 뱉었다.
“거긴. 왜 왔어?”
왜 가긴. 하연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갔지.
“아직. 나한테 미련이 남은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망가지는 꼴을 직접 두 눈으로 보려고 온 거야? 그런 거야?”
유주야. 왜 그래?
“김진형. 이 나쁜 새끼! 거길 왜 왔어! 거기가 어디라고!”
유주는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눈물을 폭발시키며 내게 따졌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저 하연이가 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거기에 간 건대..
하지만 유주가 저리 펑펑 우는데 남자로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말없이 유주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유주.
하긴. 내가 생각해도 상대가 심했다.
미친놈이 왜 남의 직업을 가지고 개소리를 해대는 건지.
지가 변호사면 변호사지. 왜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 모욕을 하는 건대?
나는 유주의 등을 토닥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유주야. 울어서 괜찮아질 것 같으면 그렇게 해.”
“으허허허헝!!”
나는 그렇게 한동안 유주를 끌어안고 그녀가 우는 걸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녀가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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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진정이 되었는지 유주는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나오더니 다시 식탁에 앉았다.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김진형.”
“응.”
“우리 다시 사귀자.”
으응? 이렇게 갑자기?
마치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와 유주 단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