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81화
발리에서의 한 달은 나는 물론이고 하연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수시로 복불복 게임을 집에서 진행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말이다.
“으하하! 아빠가 이겼다!”
“으으. 말도 안돼에에. 내카 또 지다니이.”
하연이가 끼워 넣은 노란색 칼에 해적이 비명을 지르면서 통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그럼 오늘 저녁은 야채가 잔뜩 들어간 볶음밥으로 결정! 알았지?”
“히잉.”
하연이가 뽀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민다.
하연이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었지만, 그래도 고기에 비해 야채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하연이에게 야채를 먹일 필요가 있었다.
그냥 준다고 하면 싫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렇게 게임에서 당당히 졌으니까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냉장고에서 양파와 당근. 호박과 파프리카 등 자투리 식재료를 꺼냈다.
그리고 이를 하연이가 먹기 좋게 잘게 다진 다음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달 볶았다.
소금을 한 꼬집 넣어준 다음 새로운 팬에는 달걀을 풀어 젓가락으로 저어가며 달걀 스크램블을 만들었다.
이어서 밥과 볶은 야채를 넣고 다시 한번 기름에 볶는다.
간은 발리에서 사 온 삼발소스로 맞췄다.
이리하여 삼발소스 야채 볶음밥 완성!
하연이는 발리에서도 삼발소스가 들어간 요리를 잘 먹었으니 이것도 맛있게 먹어줄 터이다.
“자알 머켔습니다아!!”
먹성좋은 하연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큰 소리로 외치고선 먹음직스럽게 한 숟가락을 떠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벌써부터 배가 불러온다.
저녁을 먹은 하연이와 함께 놀다가 애를 재운 뒤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 전 만들었던 삼발소스 야채 볶음밥 레시피를 하연아빠TV에 편집해 올렸다.
처음부터 반응이 좋다.
└ 와! 엄청 맛있어 보여요!
└ 발리에서 삼발소스 사오신 건가요? 혹시 기회가 되면 삼발소스 만드는 것도 따로 영상으로 올려주시면 좋을듯이요
└ 삼발소스로 만든 볶음밥은 어떤 맛일지 기대되네요. 아버님은 진짜 요리왕~♡
하연이 팬이 늘면서 덩달아 내 채널을 구독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늘었다.
이제는 7만 명을 훌쩍 뛰어넘어 어느새 8만 명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그저 저녁으로 만든 요리를 편집해서 올렸을 뿐인데 말이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남성보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댓글을 많이 달아주신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요리 레시피 위주로 영상을 올리고, 딸을 키우는 아빠다 보니 그런 부분을 좋게 봐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따라 이런 부류의 댓글이 많이 보였다.
└ 하연이 아버님은 연애 안 하시나요?
└ 하연이 아버님은 여자친구 없나요? 없으면 저라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죄송하지만 하연이 아버님은 제 꺼거든요? 함부로 넘보지 마세요
이런 게 인기라는 걸까?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이제는 내 개인에 대한 사적인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다른 댓글에는 하나하나 답글을 달아줘도 저런 댓글에는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일은 대망의 야유회 날.
곰도리형제단을 만들고 나서 있는 첫 공식 행사이자 모두가 같이하는 자리이다.
‘9시까지 청계산입구역에 가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자.’
나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발리에서 한 달이나 놀았으면서도 내일 놀 생각에 또 설레고 즐거웠다.
역시 인간은 일보다 놀이를 더 좋아하는 족속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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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한신 타이거스의 사령탑인 김재호 감독은 팀 성적표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젠장. 4월까지 주욱 1위를 유지하고 있다가 5월부터는 사정없이 미끄러지는군.”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감독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개막전을 멋들어진 역전승으로 이끈 뒤부터 줄기차게 연승행진을 달리던 그들 아니었나.
하지만 다들 뭐라도 씌었는지. 5월에는 연전연패. 이대로는 구단주인 이창돌 회장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언제 자신을 잘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게다가 6월부터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체력관리가 더욱 중요해졌다.
“고사라도 지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 주장인 신용균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감독님. 승리 요정을 다시 불러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승리 요정?”
“그 왜 저희 개막식에서 축하공연을 해주었던 꼬마 친구요.”
그때는 개소리하지 말라면서 일축했지만,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 이길 수만 있다면 뭔 짓을 못 하겠냐.”
그는 모기업인 한신 그룹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김하연의 축하공연이 있으면 좋겠다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일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볼 요량이었다.
그는 사무실 선반에서 개막전 영상이라고 적힌 테이프를 하나 꺼내고는 이를 재생해서 보았다.
TV 화면 속에는 작은 아이가 마운드에 올라서는 말도 안 되는 가창력과 춤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 저 친구가 다시 한번 축하공연을 해준다면. 우리 팀이 다시 힘을 받을지도 모르지.”
그게 그다지 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김재호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는 속으로 제발 김하연의 섭외가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다시 한번 반복해서 김하연의 축하공연을 재생하였다.
어째서인지 보면 볼수록 힘이 나는 게 정말 섭외에 성공하기만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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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일기예보가 정확했다.
요즘은 워낙에 틀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혹시라도 비가 오면 어쩌지라고 고민을 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청계산입구역에서 모여서 청계산을 가볍게 등반한 다음 다시 아래로 내려와 예약했던 식당으로 이동했다.
다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닭백숙과 닭도리탕을 흡입하기 시작한다.
“어우. 뜨거워.”
“뜨겁다면서 왜 그렇게 빨리 먹어? 천천히 먹어.”
김지환이 조유리에게 그리 말했지만, 본인도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닭 다리 한 조각을 뜯어 먹고는 이어서 두툼한 가슴살을 씹어먹는 중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면 더 시켜드릴 테니까 다들 천천히 드세요.”
“네에!!”
회사를 하루 쉬고 야외로 나왔는데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는 술도 함께 마셨다.
나는 재빠르게 폭탄주를 만들고는 이를 모두에게 돌렸다.
오세영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사장님은 폭탄주 장인인가요? 어떻게 그리 빨리 만드세요?”
“하하. 이거 다 김 과장님한테 배운 거예요.”
“김 과장님이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서 김소라에게 옮겨 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내가 따라준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바로 이거지. 제가 알려준 대로 비율을 잘 지키고 계시네요.”
“아무렴요. 이거 못 만든다고 엄청 혼났잖아요?”
“혼이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시면 다른 친구들이 오해하겠네요.”
이미지 관리하기는.
비율이 안 맞다고 술자리에서 나한테 얼마나 면박을 주었던지.
덕분에 폭탄주 제조 장인이 되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니 PTSD가 오려고 한다.
전 직장 이야기가 나오자 김지환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원래는 김 과장님이 사장님보다 윗사람이었죠?”
“맞아요. 제 직속 사수였습니다.”
“와. 진짜 세상일 모르는 거네요.”
그러자 김소라가 빠르게 유리잔을 자기 앞으로 거둬들이고는 폭탄주를 말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들 자기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 언제 위아래가 바뀔지 모르니까.”
“하하. 그래야겠네요.”
돌이켜보면 나 역시 비디오쉐어에 다닐 땐 김소라가 내 밑에 들어올 거란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진짜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야.’
배도 채웠겠다, 적당히 술도 들어갔겠다.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와 수건돌리기를 시작했다.
오세영과 조유리가 짠 프로그램인데 의외로 게임이 올드해서 무척 놀랐다.
“요즘도 이런 게임을 해요?”
“아뇨.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야유회 게임으로 이게 좋다고 해서 넣어봤어요. 사장님은 해보셨어요?”
“대학 때 MT 가서 잠깐?”
딱 한 번 해봤는데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모두가 둥글게 원을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술래는 가위바위보에서 진 김소라 과장이 맡았다.
그녀는 몇 바퀴 도는 것 같더니 제일 만만한 조유리의 뒤에 수건을 놔두고는 냅다 뛰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장 느릴 것 같았던 그녀가 놀라운 반사신경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수건을 가지고 김소라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겠는가.
“잡았다아!”
“으힉! 유리 씨. 왜 이렇게 빨라?”
“헤헤. 제가 사실 초등학교 때 육상부 선수였거든요.”
그럴 수가. 왜소해 보여서 체육과는 전혀 담을 쌓고 살아온 줄 알았더니.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곤란하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 뒤로도 김소라는 몇 번인가 더 술래를 해야만 했다.
다들 하나같이 운동신경이 뛰어난 게 저질 체력의 대명사인 김소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김소라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으에엥. 왜 우리 회사는 다들 이렇게 운동 잘하는 사람들만 있는건데? 너희들! 나 과장이야! 나한테 이러기 있어? 없어?”
“과장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뭐?”
“사람 언제 위아래가 바뀔지 모른다고.”
“크윽!”
김소라가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어서 마피아 게임, 보물찾기, 신발 멀리 던지기 등.
무슨 8, 90년대 게임만 조사해 왔는지 새로 들어본 게임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준비한 게임을 모두 마친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술자리를 이어 나갔다.
다들 20대라 그런지 식은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넣는다.
나는 식은 국물을 떠먹는 조유리에게 소리쳤다.
“그만! 새로 시켜줄 테니까 그건 먹지 마세요.”
“아니 왜요. 저 배고픈데.”
“새것 드세요. 새것. 유리 씨 MZ세대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더니 준비한 게임들도 그렇고 취향이 완전 노땅인데요?”
“요즘 MZ세대에겐 레트로 열풍이라는 거 모르세요? 원래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다시 술자리가 재개되었다.
닭고기는 아까 많이 먹었으니까 파전에 동동주로 종목을 바꾼다.
모두의 얼굴에 취기가 도는 걸 파악한 나는 술잔을 높이 들고 입을 열었다.
“다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저는 참 든든합니다.”
“사장님.”
“네?”
“사장님이야말로 말투가 너무 고루하신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50대 사장님이신 줄 알겠어요.”
오세영이 웃으며 내게 농담을 던진다.
그러자 조유리도 웃으며 말했다.
“맞아. 사장님 말투 꼭 우리 아빠 같아.”
이것들이 증말. 술이 들어갔다 이거지?
나는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흠흠. 농담은 그쯤하고. 곰도리형제단은 이제 연예기획사와 함께 MCN으로까지 영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아시죠? 며칠 전에 신유주 씨와 MCN 계약 맺은 거?”
다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신 그룹과도 영상 계약을 맺었고, 아마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질 겁니다. 그래도 절대로 퀄리티가 떨어져서는 곤란해요. 퀄리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들어오는 일거리를 모두 쳐낼 필요가 있죠.”
“그럼 야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 야근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사람들 봐라?
내가 일부러 야근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6시가 되면 퇴근할 수 있게 해줬더니 뭐? 야근을 하게 해 달라고?
김소라도 취한 몸은 흔들거리며 입을 뗐다.
“사장님. 저도 지금은 야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김 과장님까지?”
“업무량이 많아서 일과 중에만 일을 쳐내기에는 지금 너무 벅차거든요.”
“괜찮겠어요? 야근하다 보면 언제 퇴근할지도 모를 텐데?”
야근은 내가 전문가다. 처음에는 정시에 퇴근하지 못해서 화가 나지만, 일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선 절망에 빠지지 않던가.
그런 걸 우리 직원들에까지 물려주기 싫어서 야근금지령을 내렸더니.
‘스스로 야근하고 싶다고 할 줄이야.’
하지만 이래서는 호의가 강압이 되고 만다.
나는 어쩔 수 없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만 야근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물론 야근수당도 따로 챙겨드리고요.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새로 사람도 뽑을 예정입니다.”
“와! 정말요?”
“우리 벌써 선배 되는 거야?”
기존에 하던 영상 제작일도 늘어난 데다가 연예기획과 MCN 일도 함께하게 되었으니 사람을 뽑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일찍 진행된 것일 뿐.
“아무튼 다들 노고가 많으십니다. 사장이라는 직위를 떠나 한 사람의 영상제작자로서 여러분들에게 깊은 존경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새로 사람을 뽑을 그날까지. 조금만 더 힘내봅시다. 아자아자. 파이팅!”
“파이팅!!”
그렇게 훈훈하게 첫 야유회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택시비를 쥐여주고 야유회 장소를 떠나려는데.
정성수 차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이제는 세 얼간이보다 더 자주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재미있는 말을 꺼냈다.
“네? 하연이가 또 한신 타이거스 축하공연을 해줬으면 한다고요?”
이건 뭐. 한순간 정 차장님이 메인 퀘스트 NPC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