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국힙원탑-78화 (78/135)

내 딸은 국힙원탑 78화

점심을 먹은 우리는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우붓 예술가의 거리로 나왔다.

- 동동동

전통가옥에서 흘러나오는 대나무를 치는 듯한 현지 음악이 무척이나 이색적이다.

하연이는 다음 신곡에서 활용하면 좋겠다며 내게 녹음을 부탁했다.

‘벌써 다음 신곡을 준비하려는 건가?’

내 딸이지만 하연이는 정말이지 준비성이 철저한 친구다.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명칭이 예술가의 거리인 이유는 미술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기 때문이다.

원색으로 표현한 거친 질감의 유채화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강렬하다.

그렇게 눈과 귀가 즐거운 예술가의 거리를 한동안 돌아다닌 우리는 이세미의 제안에 따라 예약한 쿠킹 클래스를 듣기로 했다.

원래는 오전 일찍 나와서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식재료를 사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는 오후에 예약한 관계로 요리만 배우기로 했다.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확실히 미국에서 유학하다 온 이세미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 배워볼 순서는 인도네시아 전통 소스를 만들어보자고 하시네요.”

양파를 축소해놓은 듯한 샬롯과 마늘. 그리고 짜베(Cabe)라고 불리는 매운 고추를 함께 넣고 으깬 뒤 소금과 후추, 코코넛 설탕을 뿌리고 곱게 간다.

이렇게 다져준 재료에 라임즙을 넣고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기름에 볶아준 다음 피시소스를 넣어주면 인도네시아 전통 소스인 삼발 소스 완성!

생긴 건 꼭 순댓국에 들어가는 다대기 같은데 맛은 조금 달랐다.

매우면서도 달콤하니 상큼한 맛이 입안을 자극한다.

하연이가 자기가 만든 소스를 한 입 찍어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든다.

“마시쪄어!”

그러게. 우리가 여기 와서 먹은 대부분의 현지 음식에 이 맛이 있었다. 아마도 발리 요리의 핵심 재료가 아닐까 싶다.

이어서 만든 요리는 인도네시아의 볶음국수인 미고렝(Mie Goreng).

삶은 면에 각종 야채와 소스. 그리고 른당이라고 불리는 코코넛밀크가 들어간 쇠고기를 넣어서 볶는 요리인데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다.

평소 요리를 취미로 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쉬이 음식을 만들 수 있었고, 그의 극찬을 받을 수 있었다.

“원더풀! 최근에 맛본 미고렝 중 최상입니다!”

최상이라는 말에 너도나도 내가 만든 미고렝을 한 젓가락씩 떠먹어 본다.

이세미는 내가 만든 미고렝과 자신이 만든 미고렝을 번갈아 먹어보더니. 그만 울상을 짓고 말았다.

“왜 제가 만든 건 이 맛이 안 나는 거죠?”

그거야. 숙련도의 차이가 아닐까.

요리란 처음 만들어보는 음식일지라도 평소 얼마나 많이 해봤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차마 그런 말을 할 순 없었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빠잖아요? 이걸 하연이가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서 차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다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몇 가지 요리를 더 만든 우리는 이날 직접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운 뒤 리조트로 돌아왔다.

하연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세미가 나를 붙잡았다.

“진형 씨. 혹시 잠깐 시간 괜찮나요?”

나는 하연이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다행히 정 차장님이 하연이의 손을 붙잡고 인근 산책을 다녀오겠단다.

나는 그녀와 함께 로비의 빈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제안하는 겁니다.”

“네?”

이세미의 표정은 지금까지 봤던 그녀의 얼굴 중 가장 진지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칵 삼켜졌다.

“지금 회사를 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저희 한신 그룹에 들어와서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한신 그룹에요?”

“네. 저는 지금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진형 씨처럼 뛰어난 인재가요.”

그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야망을 내게 숨기지 않고 밝혔다.

“저는 반드시 이 회사의 대표가 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혼자서 미국에 유학을 떠났던 거고요.”

“아 네.”

“오빠들은 저를 무시하지만 두고 보라죠. 저는 반드시 이 회사의 대표가 되어서 한신 그룹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이끌 겁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려있는 재벌가 자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인제 보니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녀의 야망에 박수를 보내는 한편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죄송하지만 저도 제가 생각하는 플랜이 있어서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녀가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다른 제안을 해왔다.

“그럼 이런 건 어떠세요?”

“어떻게요?”

“저희가 진형 씨가 하는 회사. 이름이 곰도리형제단인가요?”

“맞아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인상적인 이름이에요. 곰도리형제단을 인수해서 저희 자회사로 삼는다면요?”

“인수요?”

“네. 진형 씨를 그대로 곰도리형제단의 대표로 인정하고 한신 그룹에서 투자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건 어떠신가요?”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사실 회사를 만들면서 이런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외부의 투자를 받아서 회사를 키우고 나는 큰돈과 함께 엑시트에 성공.

모든 스타트업 사장님들의 꿈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막연하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이렇게 갑자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신 그룹에 인수되는 순간 곰도리형제단은 내 회사가 아니라 한신 그룹의 자회사가 되어버린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

투자라는 건 양면성이 있다.

성장의 밑거름이자 든든한 지원금이 되어 주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다.

이세미는 내 생각을 읽은 듯 이런 말까지 건넸다.

“물론 저희가 곰도리형제단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진형 씨의 권한을 100% 그대로 인정해드릴게요. 회사는 지금처럼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다만.”

“다만?”

“제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제 힘이 되어주셔야 하죠.”

나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게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엄청난 호재였다.

하지만 이게 맞는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회사를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남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과연 내가 원했던 일인가?’

이세미가 원하는 것도 결국 내가 자기 밑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게 아니겠나.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해보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일할 때보다 내가 스스로 기획하고, 일을 확장해나갈 때 더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는 그녀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미 씨. 정말 좋은 제안이라는 건 알겠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네요.”

“제가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드리겠다고 했는데도요?”

“네. 저 역시 세미 씨가 한신 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하길 바랍니다. 그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지금 진형 씨 같은 능력 있는 분들이 필요해요!”

“저의 어떤 면을 보시고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 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 밑이 아니라 제가 중심이 되어서요.”

“아.”

그녀가 옅은 단말마를 토해낸다.

마치 자기도 그러하다는 것처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말했다.

“무슨 의미로 말씀하셨는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또한 십분 이해하고요.”

“이해해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네?”

그녀는 아직도 비장의 수를 숨겨놓았다는 듯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그룹에서 영상 쪽 일을 비디오쉐어에 외주준 걸로 알고 있는데,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요즘 영상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네. 마감 시간이 늦는 건 예사고, 영상의 퀄리티도 정말 형편없어서 내부에서도 말들이 많거든요. 이거 누구 계약한 거냐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희 쪽 영상 작업을 곰도리형제단에 맡겨도 괜찮을까요?”

“저희 쪽에요?”

물론 땡큐다.

그런데 기존에 비디오쉐어랑 계약을 하고 있는데 그럼 우리랑 이중계약을 하겠다는 건가?

그녀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계약사항에 보면 3번 이상 마감을 못 지키고, 영상의 퀄리티가 우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요.”

“그건 아는데 보통 그걸 행사하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그래도 이건 정말 심각한 경우거든요. 누가 보더라도 이건 대기업의 갑질이 아니라 외주사의 잘못이라고 인정할 거예요.”

그렇구나. 한때 몸담았던 비디오쉐어가 그 정도로 몰락해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직원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답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진형 씨.”

“네.”

“원래 그렇게 신중하세요? 대표는 진형 씨인데 답변을 쉽게 안 주시네요.”

하하. 물론 곰도리형제단의 대표는 나다.

하지만 대표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비디오쉐어가 몰락한 이유도 사장이 밑에 직원들을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전횡을 일삼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무튼 이세미는 나의 신중한 태도에 높은 점수를 준 듯싶다.

“저는 신중한 사람을 좋아해요. 사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은 오래가기 어려운 법이죠.”

그 말이 맞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가 베이는 세상이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녀와의 대화를 이 정도로 마무리한 나는 하연이를 찾으러 로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붉게 물든 석양이 눈에 들어왔다.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는 여전히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듯 서쪽 하늘을 붉게 수놓은 태양.

‘이세미는 자기 꿈이 명확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내 꿈은 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하연이를 잘 키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하연이의 아빠니까.

하연이에게 최고의 아빠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하연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전적으로 서포트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아빠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나 역시 이세미처럼 회사를 크게 키우고 싶다.’

원래 어릴 적 꿈은 영상 분야에서 인정받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회사의 대표인 신분. 나는 물론이고 직원들 역시 잘 키워보고 싶고, 내가 만든 회사가 모두의 인정을 받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리 다짐하고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을에 의해 따뜻한 색감으로 채색된 리조트의 바닥이 넌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

발리에서의 한 달간의 여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나는 송형기를 비롯하여 이다 다유와 그녀의 무용단. 그리고 평소 자주 보았던 종업원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눈 뒤 발리 덴파사르 응우라라이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 옆에는 하연이뿐만 아니라 이세미와 정성수 차장님도 함께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귀국하는 일정으로 이곳에 왔다고 그랬다.

여기 올 때도 제일 앞자리에 탈 수 있어서 무척이나 편하게 올 수 있었는데.

지금 나와 하연이는 그보다 더 좋은 프레스티지석에 앉아 있었다.

발을 길게 뻗어도 여전히 여유로운 공간.

심지어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180도 수평으로 펼쳐지며 아늑한 침대로 변신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