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77화
정성수 차장님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역시 김진형 씨를 이곳에 보낸 건 최고의 한 수였습니다.”
“네?”
내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 포털 인기 검색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뇨.”
그동안 춤 연습하고, 영상 촬영하고, 편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저 수영하거나 인근을 산책했다.
그것도 아니면 방에서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등 쉬는데 집중한 나머지 포털에 언제 접속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게 하연이 생일 선물 고를 때였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이거 보십시오.”
“어라? 한신 리조트 발리가 상단에 있네요?”
“그렇습니다. 영상에 자세한 정보를 올리지 않은 걸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이걸 노리시고?”
“아.”
연관 검색어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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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한신 리조트 발리뿐만 아니라 이곳 부대시설에 대한 연관검색도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덕분에 최근 예약 문의가 폭증하고 있어요. 이게 다 진형 씨랑 하연이의 재미있는 영상 덕분입니다.”
예전에 비디오쉐어에 다닐 때 김소라가 하던 걸 어깨 너머 슬쩍 보고 따라 해봤을 뿐인데.
‘이게 먹히네.’
숨겨야 더 찾아본다니. 이래서 현대 마케팅에는 심리학과 행동경제학 이론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뭘요. 저희야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죠. 그런데 정 차장님이랑 세미 씨는 무슨 일로?”
정성수 차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뗐다.
“그 일로 온 겁니다.”
“그 일이요?”
“두 분이 너무 잘해주고 계시니까요.”
“의미를 잘 모르겠네요.”
“그동안 저희가 이곳을 알리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두 분이 그걸 단번에 해결해주셨으니 그에 따른 보상과 격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직접 발리에까지 왔다 이 말인가?
하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발리에까지 두 사람이 온 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홍보 건은 막내 아가씨께서 강하게 밀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잘만 하면 향후 호텔과 리조트 사업 분야를 아가씨가 맡게 되실지도 모르죠.”
“아하.”
“지금은 둘째 도련님이 맡고 계신 분야이긴 한데. 호텔업이라는 게 사실 수익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요?”
“그룹의 브랜딩과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한 용도가 강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호텔업이라는 건 크게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업이익률이 가장 낮은 사업이라나 뭐라나.
호텔을 건설한다고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고용하는 인원도 많으니 인건비도 만만치 않은데 그에 따른 수익은 그리 많지 않다고.
대신 그룹 이름을 내걸고 하는 사업이니만큼 대외적인 홍보 효과가 있고, 그룹의 주요 VIP가 방문하였을 때 자신들이 운영하는 호텔 혹은 리조트에 묵게 하면서 대접하는 용도가 크다고 그랬다.
“그래서 둘째 도련님도 크게 돈이 되지 않은 호텔 사업에 별다른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셨죠.”
“그렇군요. 그래서 세미 씨가 이 사업을 맡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네. 형제들끼리 감정 상할 일 없이 뺏어올 수 있는 유일한 사업 분야이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이세미는 후발주자이니만큼 신사업을 만들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형제가 맡은 기존의 사업 분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입장.
“그러니 이참에 저희 그룹이 건설한 리조트 중에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이곳도 한번 둘러볼 겸 두 분의 격려 차원에서 겸사겸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정 차장님도 진짜 정신없으시겠네요.”
“하하. 뭘요. 아가씨가 잘돼야 저도 잘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지금 영상 편집 중에 계셨던 겁니까?”
“아 네. 방에서 하는 것보다는 여기서 하는 게 더 집중이 잘 되어서요. 이 시간엔 사람도 없고 한적하니 좋거든요.”
“그럼 하연이는 방에 혼자 있는 겁니까?”
“네.”
순간 정 차장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살짝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당황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4살짜리 꼬마를 방에 혼자 둬도 괜찮은 건가요? 제가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위험한 것 같은데.”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도 서로 따로 자거든요. 저는 윗방에서 자고 하연이는 아랫방에서 자고요. 게다가 하연이는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아이라서 괜찮아요.”
“그래도 갑자기 아빠가 없어지면 많이 놀랄 것 같기도 한데.”
“괜찮습니다. 워낙에 똑 부러진 아이라서 새벽에 저를 찾는 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물론 얼마 전에 새벽에 거실에서 일하고 있다가 서로 깜짝 놀라서 하연이가 오줌을 지린 적은 있었지만 그건 나를 찾았다기보다는 호기심에 나왔다가 놀래서 그런 거였다.
“아무튼 진형 씨도 너무 늦게까지 작업하진 마시고 적당히 하시다가 들어가세요. 밤이 깊었네요.”
“네. 차장님도 밤 비행기 타고 오신다고 피곤하시겠네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네. 그럼 내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겠네요. 그럼.”
그는 시계를 잠깐 보더니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이세미가 한신 그룹의 호텔 사업을 맡게 될 수도 있다니.
역시 재벌가는 스케일이 다르구나 싶다.
나는 조금 더 로비에 머물며 편집작업을 마무리한 다음 다시 방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해 확인했더니 하연이는 방에서 곤히 자고 있다.
대체 다른 애들은 어떻길래 4살짜리 아이를 방에 혼자 놔두면 위험하다는 거지? 아이를 키워본 건 하연이가 처음이라 뭔가 내가 가진 레퍼런스가 평균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입구에서 정 차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연아 그동안 잘 지냈니?”
“안녕하떼요오.”
“괜찮으면 저쪽에서 같이 식사하실 수 있을까요?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이세미가?
어제 새벽에 도착해서 피곤했을 텐데 늦잠도 안 자고 벌써 일어나있었구나.
나는 하연이와 함께 정 차장님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정 차장님이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다. 그쪽은 더 이상 자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는 레스토랑 가장 구석진 자리로 이동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입니다.”
“네? 여긴 그냥 벽인데요?”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책장 가운데에 놓인 책을 살짝 누르자 갑자기 책장이 옆으로 밀리면서 비밀 공간이 열렸다.
마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있는 비밀의 방에 입장하는 기분이었다.
나와 하연이가 놀란 얼굴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제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에 물기가 촉촉한 이세미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와. 하연아. 그사이 몰라보게 컸구나? 너무 예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하연이를 와락 껴안았다.
하연이도 싫지만은 않았는지 그녀의 품에 안겨 가만히 있는다.
향기로운 비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네. 저희도 이제 막 일어났거든요.”
“저랑 같이 아침. 괜찮으시죠?”
뭐 안될 게 어디 있겠나. 이런 비밀의 방에서 식사라니. 무언가 판타지스럽기도 하고.
4명이 사용하기에는 공간이 무척 넓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내부에 조리실이 함께 있었다는 점이었다.
식사는 일반적인 뷔페가 아니라 이곳 헤드 쉐프(Head Chef)가 직접 조리한 요리를 테이블로 내놓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포식하게 생겼다.
이세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이 올려주신 영상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어요. 덕분에 이곳 예약률도 높아지고 있고, 그룹 내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등 제 입지도 단단해졌고요.”
“저희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저희 한신 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나 리조트는 어디든지 공짜로 이용하실 수 있는 무료 숙박권을 드리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무료 숙박권이요?”
“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방이 아니라 지금 머물고 계시는 곳과 동급의 VVIP 전용 숙소로요.”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 아니 생각지도 못한 떡이란 말인가.
한신 그룹이 해외에 또 어떤 숙박시설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5성급 호텔을 여러 곳 보유한 한국 호텔계의 리더 그룹이 아니던가.
“그런 걸 저희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받아도 되죠! 여기를 띄어보려고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데요. 그래도 잘 안되니까 심지어 여길 철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던 때였어요. 두 분이 만든 영상이 모든 걸 바꿔놓았죠.”
그런가? 그저 하연이랑 재미나게 놀면서 영상을 찍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았다니. 새삼 영상의 힘을 느낀다.
하긴. 유튜브 조회수도 다른 영상에 비해서 확연히 높았다.
아무래도 아기춤이 화제의 중심에 오르면서 하연이의 인기가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고, 여기 와 있는 동안 공개된 이태식의 신곡 뮤직비디오도 한 몫 단단히 해준 모양.
“그리고 이건 별개의 제안입니다만. 혹시 저희 홍보모델이 되어주실 수 없을까요?”
“홍보 모델이요?”
“네. 하연이뿐만 아니라 진형 씨도 같이요.”
하연이를 홍보모델로 쓰겠다는 건 이해가 된다. 하연이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예 중 한 명이니까.
그런데 나는 왜?
“호텔 쪽 홍보 영상이니까 아빠와 딸이 함께 저희 호텔을 방문해서 행복해하는 브랜딩 영상을 만들면 괜찮을 것 같거든요. 아무래도 가족 단위 방문객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니까요.”
“조금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생각해보고 다음에 대답해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한번 잘 생각해주세요. 물론 모델료는 하연이의 인기와 이번에 만들어주신 영상에 대한 부분까지 고려해서 아쉽지 않게 책정할 예정입니다.”
홍보 모델이라. 하연이는 몰라도 나 같은 일반인이 그런 걸 찍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니다. 인기 연예인도 광고 촬영에 그렇게 몫을 매던데. 까짓거 한 번 해보지.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돈도 아쉽게 않게 챙겨준다고 그러고.’
아무튼 이 문제는 방으로 돌아가서 하연이랑도 이야기해보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도 들어보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자.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두툼한 스테이크가 메인디쉬로 제공되었다.
이세미는 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썰면서 물었다.
“이제 일주일 남으셨던 가요?”
“네. 어제 온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혹시 더 머물고 싶으시면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얼마든지 더 계셔도 되니까요.”
“아뇨. 저도 제 일을 해야 하고, 하연이도 어린이집에 가야 하니까요. 일정은 원래대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러시구나. 아쉽겠어요. 여기 있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또 반복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런 반복된 일상이 있으니 또 가끔은 이런 여유가 그리워지는 것 아닐까요? 열심히 일하다가 또 다음에 놀러 오면 되죠.”
내 말이 조금 의외였는지 그녀는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방긋 웃었다.
“그렇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반복된 일상이 있으니 여유가 그리워진다라. 이거 저희 호텔 캐치프레이즈도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저희가 사용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입만 열면 자기네 사업에서 가져다 쓴다고 하니까 이제 무슨 말을 하기가 겁날 지경이다.
그렇게 식사가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
그동안 말이 없었던 정성수 차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리조트 밖은 구경한 적 없으시죠?”
“네. 대부분 리조트 안에서만 생활했어요. 그래도 아직 즐기지 못한 거리가 남아있는 게 신기하지만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오후에 별다른 일정 없으시면 저희랑 같이 인근 관광지 투어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인근 관광지 투어? 나야 땡큐다. 그동안 리조트 안에서만 생활했으니 하연이도 좋아할 테고.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