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76화
한국 회사에서 만든 리조트라 그런지 투숙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아빠의 공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데? 도대체 며칠 동안 연습했기에 저렇게 잘 할 수 있는 거지?”
“박진감 보소. 잘하네, 저 친구.”
“와. 멋져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연습했지? 요 며칠 바쁘다고 나를 놀이방에 맡기더니 이걸 연습하기 위해서였어?’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아빠라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버지라고.
이국적인 공연은 시종일관 박진감이 넘쳤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무용수들과 한 몸이 되어 케착 댄스를 만끽했다.
몇몇 이들은 흥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몸을 흔드는 등 모두가 흥겹게 공연을 즐겼다.
무대의 절정은 마왕을 연기하는 무용수가 뜨거운 불길을 맨발로 걷는 장면에서였다.
“오오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아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빠는 끝까지 실수 하나 없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 무용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40여 분의 뜨거웠던 공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무용수들이 환하게 웃으며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였고, 이곳 대표로 보이는 할머니가 등장하더니 아빠 손을 잡고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그녀는 아빠 손을 높이 잡고 올리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잘한다! 멋졌어요!”
“휘유! 멋지다! 좋은 공연 잘 봤습니다.”
사람들은 아빠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빠를 향해 물개박수를 쳤다.
무대 뒤로 빠져나가는 무용수들과 달리 아빠는 이쪽으로 다가와서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연아! 공연 잘 봤어?”
“웅!!! 아빠아 최고오오!”
“하하. 아빠 괜찮았어?”
나는 대답 대신 아빠를 향해 양손의 엄지를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선.
아빠는 얼마나 열연을 펼쳤는지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았다.
‘아빠 땀 냄새. 좋다.’
나는 내 얼굴에 땀이 묻거나 말거나 아빠의 품에 꼭 안겼다.
이보다 더 멋진 아빠가 세상에 있을까?
뜨거웠던 발리에서의 어린이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하연이와 함께 공연장을 빠져나와 방으로 향하고 있는데 공연 단장인 이다 다유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현지 직원과 함께 다가왔다.
“수고 많으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단장님.”
그녀는 하연이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쪽이 따님인가요?”
“네. 이름이 하연이에요.”
“무척 예쁜 아이네요. 몇 살이죠?”
“올해 4살입니다. 여기 나이로는 2살이겠네요.”
“2살이라. 제 딸과 동갑이네요.”
“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척 봐도 70살이 넘는 할머니인데 어떻게 2살짜리 딸이 있다는 거지?
내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쩌다 보니 늦둥이를 낳게 되었다면서 사연을 소개했다.
“수십 년 동안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더군요.”
“아 네.”
“그러다가 2년 전. 시험관 시술로 드디어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폐경기가 지났지만, 신들이 우릴 도우신 거죠.”
그럴 수가. 폐경이 지나도 임신이 가능한 일이었구나. 진심 여성의 몸은 신비 그 자체다.
아무튼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축하를 그녀에게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하하. 그래서인지 진형 씨가 어떤 마음으로 이번 공연에 임하셨는지 잘 알 수 있었답니다. 저도 이 세상에서 제 딸이 가장 소중하고 예쁘거든요. 자고로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죠.”
어쩐지. 아무리 송형기의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외부인인 나를 턱 하니 끼워준다 싶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재차 감사를 표했다.
“단장님 덕분에 하연이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저야말로 감사드리죠. 외부인과 함께 공연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데. 진형 씨를 보니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네?”
내 물음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관광객들이 저희 공연에 직접 참석해서 함께 무대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열린 무대를 지향해볼 생각입니다. 진형 씨 덕분입니다.”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현지 전통 공연이라. 꽤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일 것 같다.
실제로 직접 무대에서 공연해보니 생각 이상으로 충만감이 대단하다. 재미도 있었고.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진하게 포옹하고서 헤어졌다.
방으로 돌아오자 하연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빠아.”
“응?”
“어떠케에 이런 생칵으을 해쩌요오?”
“공연할 거?”
“웅!”
사실 내가 생각해도 좀 뜬금없긴 했다.
하지만 라탄백으로만 퉁치고 넘어가지니 뭔가 심심하기도 했고, 이왕이면 하연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만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싶었으니까.
“하연아. 아빤 네가 이번 일로 오랫동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
“쪼으은 추어억?”
“응. 아빤 하연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걸. 그리고 뭐가 됐든 하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아아.”
“그러니까 하연이가 뭘 하든. 아빤 항상 하연이를 믿고 응원해. 너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빠 맘 알지?”
그러자 하연이를 나를 와락 안으며 내 품에 안긴다.
이런. 지금 온몸이 땀으로 절어 있는 상태인데 하연이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하연이는 절대로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금쪽같은 내 새끼.
아무튼 하연이도 만족한 것 같고. 나 자신도 무척이나 좋은 추억거리가 생긴 것 같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면 되는구나. 그래. 할 수 있어. 김진형. 아자아자 파이팅!’
그날 저녁은 샤워를 마치고 바로 잠에 떨어져 오랜만에 깊은 잠을 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날 무척이나 흥미로운 꿈을 꾸었는데 하연이랑 둘이서 모닥불을 앞에 두고 함께 케착 댄스를 추는 거였다. 아빠 개구리 한 마리와 아기 개구리 한 마리. 두 개구리는 밤새도록 춤을 추고 놀았다.
#
어린이날이 지나고 나는 본격적으로 리조트 홍보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부터 꼭 들르고 싶었던 마사지 샵이 그 첫 순서였다.
나는 마사지 샵을 가기 전 머무는 방에서부터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정다압! 이 곡의 이름은 이하연 4집에 실려있는 4분 쉼표입니다!”
“으으으. 내카아 먼저어 말하려고오 했는데에!”
하연이가 분을 삼켰지만 내가 더 빨랐다.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복불복 게임이었다.
이하연의 노래를 랜덤으로 재생해서 곡 이름 5개를 먼저 맞추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일명 이하연 노래 맞추기 배틀이다.
하연이는 처음 2곡을 먼저 맞췄지만 이후 2곡은 내가 정답을 맞혔다.
그러니까 2:2 동점인 상황.
이제 드디어 나머지 한 곡으로 이번 게임의 승자가 갈리게 된다.
나와 하연이는 모두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마트폰에 귀를 집중했다.
- 둥둥둥. 두두둥둥.
낯선 비트의 전주가 귀를 간지럽힌다.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손에 잡히지 않는 곡명.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하연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정다아아압!!”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하연이도 확실히 곡명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5. 4. 3...”
“아아 잠까안!!”
“2. 1. 제로. 땡!”
“으에엥!”
하연이가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5초가 지나도록 답을 하지 못하면 탈락시키기로 사전에 룰을 정하지 않았나.
나는 조금 더 집중해서 곡을 들었다.
이하연의 곡 중에서는 극히 드문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장르인데 재즈처럼 도중 도중 코드웍에 변화가 도드라진다.
‘이 곡 이름이 뭐였더라.’
알 듯 모를 듯 간질간질해서 더 애가 탄다.
그러다가 퍼뜩 곡명이 떠올랐다.
“정답!! 그리움! 이거 분명 미니 앨범 6집에 있던 그리움이야!”
“아!!”
하연이는 그제야 곡명이 떠올랐는지 진한 탄성을 내뱉었다.
후후. 이래 봬도 아빠가 이하연 팬질만 12년 넘게 했다고.
아무도 그녀의 진면목을 모를 때부터 아빤 그녀의 찐팬이었다 이 말씀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곡은 정말 어려웠다.
이하연이 방송에 나와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은 곡인데다가 평소 본인이 즐겨 부르던 음악 장르와는 무척 다른 노래였으니까.
아무튼 나는 승자가 되었고, 하연이는 패했다.
고로 마사지 메뉴는 내가 정하게 되었다.
마사지샵에 도착한 우리는 마사지를 받을 방에 카메라를 설치하고선 나란히 누웠다.
나는 오일 마사지를. 그리고 하연이가 받을 마사지는 따뜻하게 데운 돌을 사용한 웜 스톤 마사지를 선택했다.
하연이는 마사지를 받는 내내 할머니 같은 소리를 내었다.
“으어어. 으어어.”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스마트폰을 들어 따로 하연이의 표정을 찍었다.
하연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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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어어어. 나도 저기 가서 마사지 받고 싶다!!!!
└ ㅋㅋㅋㅋㅋㅋㅋㅋ오늘 표정 정말 역대급이네요. 하연이가 입 벌린 표정 너무 웃김
└ 완전 대박이네요 ㅠㅠ 보는 내내 제가 다 힐링 됨
└ 진짜 시원해 보여요.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메뉴판 정보 좀 같이 올려주세요
└ 이번 영상 너무 좋네요. 보다가 너무 시원해서 잠들어버렸다는
└ 대박! 발리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당장 가봐야겠네요!
└ 와 보기만 해도 제 등이 시원해지는 거 같아요. 근데 하연이 표정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
마사지 영상은 예상외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다들 자기도 저기서 마사지를 받고 싶다며 리조트 정보와 마사지 가격을 올리라고 성화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아무런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
‘이곳에 오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보지 않을까? 그러면 더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입소문을 만들 수도 있을 테고.’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인터넷 검색창에 한신 리조트 발리를 검색하는 이들도 늘어날 테니 리조트 측에도 더 도움이 될 터이다.
이후로도 이런 식으로 리조트 곳곳을 찍어 올렸다.
확실히 그냥 리조트 내 시설을 알리기보다는 복불복 게임을 진행하면서 올리니까 영상을 찍을 때도 재미있고 보는 사람들도 더 흥미롭게 느끼는 것 같다.
그중 압권은 사다리 타기에서 진 내가 레스토랑에서 발리식 닭요리인 아얌 텔루르 봄부 발리(Ayam Telur Bumbu Bali)를 무려 5인분이나 먹는 장면이었다.
원래는 메뉴만 고르는 거였는데, 하연이가 주문하는 양까지 자기가 정하겠다며 떼를 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맛있었던 닭요리도 이제는 물을 삼켜야 겨우 넘어갈 정도로 힘겹기 그지없다.
‘먹방 하는 분들. 진심 존경합니다.’
마지막으로 닭 다리 한 조각이 남았는데 저건 정말 더 이상 못 먹을 거 같다.
저것까지 먹었다간 지금까지 먹었던 것들은 모조리 쏟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할 일인지 원망할 일인지, 하연이는 자기 신곡인 ‘달려’의 안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면 봐주겠다고 그랬다.
줄곧 천사였던 하연이가 지금 내 눈에는 악마로 보였지만 게임은 게임.
나는 눈물을 머금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없이 춤을 춰야만 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주변의 손님들도 이윽고 손뼉을 치면서 스마트폰으로 나를 찍으며 흥겨워한다.
이러다 수치사 당할 것 같다.
김하연. 내일 두고 보자.
하루의 마무리는 유주와의 영상통화였다.
내가 스팸이 걱정된다고 하자 유주는 카카오톡으로 영상통화를 했고, 그게 어느새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 하연아!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네에!! 선생니임 보고시포요오!”
- 우쭈주. 내 새끼. 선생님도 우리 하연이가 너무우 보고 싶어. 힝. 선생님도 따라갈걸 그랬나 봐. 하연이 보고 싶어서 어쩌지?
둘이 저렇게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다 뿌듯하다.
하연이가 나 말고도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유주와의 통화를 끝내고 하연이를 재운 뒤 노트북을 가지고 로비로 내려왔다.
이 시간에는 로비가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더 집중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개방감도 좋고, 은근히 들려오는 백색소음도 나쁘지 않고.’
열심히 오늘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로비가 시끌벅적해지더니 누군가가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타고 왔던 캐딜락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저 사람은 한신 그룹의 막내 이세미잖아.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이곳의 총지배인인 송형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정성수 차장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