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75화
“5월 5일에 하는 행사가 따로 없냐고요?”
“네. 그날이 한국에선 어린이날이잖아요. 아이와 함께 볼 만한 공연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공연이라. 그날만 하는 건 아닌데 매일 밤 5시. 중앙 무대에서 돌아가며 공연 세 개가 진행 중입니다.”
“공연 세 개요?”
“네. 모두 발리의 전통 공연인데, 원숭이 댄스라고도 불리는 케착 댄스,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레공 댄스, 한국의 사자춤과 비슷한 바롱 댄스가 번갈아가며 공연합니다.”
“이름이 재미있기도 하고 생소하네요.”
이곳의 총지배인인 송형기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중에서 5월 5일에 열리는 행사는 발리 전통 공연 중 가장 유명한 케착 댄스라고 그랬다.
“원래는 상반신을 벗은 남자 100명이 불을 둘러싸고 무리 지어 추는 춤인데, 저희는 무대가 크지 않아서 40명이 진행합니다. 그렇다고 결코 박진감이 덜하거나 하진 않죠. 발리 최고의 무용수들이 선보이는 하나의 작품이니까요.”
그의 말에 따르면 케착 댄스는 원래 악마를 쫓는 의식이었으나 이를 인도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와 결합하여 재구성하여 만든 군무라고 한다.
“애들이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애들이 더 좋아합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런 말을 꺼냈다.
“혹시. 그거 제가 배워서 따라 할 수 있는 걸까요?”
“네?”
무슨 영화인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빠가 딸을 위해 무대에 직접 올라 열연. 이를 본 딸이 감동한 장면이 떠올라 꺼내 본 말이었다.
“딸아이에게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주고 싶거든요. 그러려고 한 달이나 시간을 빼서 여기 온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직접 공연에 참가하고 싶다. 이 말씀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요.”
송형기는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안 되지. 이들한테 나쁜 점수를 받으면 그대로 나가리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는 입을 열었다.
“공연은 모두 세 개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연단입니다. 마침 오늘 그쪽 단장이 리조트를 방문하였으니 지금 그에게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송형기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이내 화려한 발리의 전통의상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단 하나의 실수로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꼬장꼬장함으로 가득한 여성은 송형기에게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송형기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딸을 위해 공연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모레 있을 공연에 등장인물로 나올 수 있을까요?”
“모레라. 그러니까 배울 시간은 오늘 저녁과 내일 하루뿐이라는 이야기로군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 제가 엄마 없이 애를 키웠습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후회되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동안 딸아이에게 많이 못 해준 것 같아 이제야 시간을 빼서 이곳 발리로 여행을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요?”
어쩐지 다소 누그러진 것 같은 얼굴.
송형기 역시 미처 몰랐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제가 딸아이를 위해 무언가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단순히 선물만 주기에는 어쩐지 아쉬움이 큽니다.”
“왜 하필 저희 공연입니까?”
“5월 5일이 한국에선 어린이날이라서 의미도 있고, 기왕 발리에 왔으니 이곳의 전통 공연을 따라 하면서 딸아이에게 웃음을 주고 싶어요.”
“흐음.”
“지금까지는 늘 딸아이가 저한테 춤을 춰서 웃음을 줬거든요. 그러니 이제는 제가 한 번 정도는 아이에게 웃음을 줄 수 없을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죄송스럽고요.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고 하면 아빠로서 뭔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말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게. 그냥 선물만 주고 끝내면 되는데. 갑자기 불타올랐네.’
그래도 하연이와 또 언제 이렇게 오랜 시간 해외로 여행을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가능하다면 하연이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 때가 있으면 아빠와 함께 온 이번 여행을 떠올리면서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하연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고.
그런데 송형기가 감명받았다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 동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치열하게 하는 거지? 날 옹호해주는 건가?’
두 사람은 나를 옆에 두고 최소 10분이 넘게 열변을 토했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고 송형기가 강하게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러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토론은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결론 난 건가요?”
“알겠답니다. 대신 한 치의 오차 없이 가혹하게 가르칠 테니까 각오하라고 하는군요.”
“와! 고맙습니다! 단장님! 고맙습니다! 총지배인님!”
“뭘요. 두 분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룹에서 웬 부녀가 온다길래 회장님 일가친척인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시죠?”
“아 네. 저는 평범한 소시민이에요.”
“하하. 소시민치고는 무척 용감하신데요? 이런 제안도 다 하시고.”
“뭘요. 제가 좀 오버를 한 것 같은데 흔쾌히 수용해주시고. 두 분 모두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도 딸 키우는 아빠라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그 심정, 이해합니다.”
나는 거듭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혹시 제가 공연을 배워야 한다면 리조트 내에 베이비시터 같은 분들이 따로 있을까요?”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조트 안에 놀이방도 따로 있고 24시간 베이비시터가 상주하고 있으니까요.”
“잘됐네요! 여긴 진짜 최고의 리조트인 것 같습니다!”
“하하. 아직 리조트 촬영은 안 하셨죠? 이번 공연 끝나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벌써 위에서 뭐 나온 거 없냐고 말이 나오는데, 제가 좀 급박한 상황입니다.”
“물론입니다! 공연 끝나는 대로 바로 영상 촬영 들어갈 겁니다.”
나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하연이에게 갑자기 회사에서 일이 생겨 오늘내일 놀이방에서 아빠 없이 놀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연이는 내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차나요오! 나아 걱저엉 하지이 말고오 아빠아 일해요오.”
어쩜. 내 딸은 정말 천사가 날개를 떼고 지상으로 내려온 게 틀림없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아빠랑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을 텐데.
나는 하연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리조트 내에 있는 놀이방에 맡긴 뒤 베이비시터에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현금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여긴 무료라며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억지로 그녀의 주머니에 현금 뭉치를 끼워 넣었다.
어차피 큰돈은 아니다. 정성수 차장님이 여기서는 모든 게 다 공짜니까 현금을 많이 들고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베이비시터는 하연이를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하연이를 맡긴 뒤 다시 총지배인실로 이동했다.
자신을 이다 다유라고 소개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도착해서 보니 무용단들이 쉬면서 공연을 준비하는 리조트 내 대기실이다.
다행히 송형기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현지 직원을 한 명 붙여준 덕분에 그녀와는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케착 댄스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서 케착! 케착!이라고 외치며 춤을 춰야 합니다. 일단 노래부터 배워보자고 하시네요.”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울음소리를 배웠다.
어딘가 이상해 보이면서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니까 기묘하게도 하나의 화음이 이뤄지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그날 늦은 시간까지 노래를 배웠고, 다음날은 발리 시내에 위치한 그들의 연습장으로 이동해서 춤을 배웠다.
한 동작만 틀려도 옆에서 이다 다유가 어찌나 혼을 내는지 때로는 눈물이 찔끔 나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하자고 했던 거 아닌가.
나는 이를 악물고 그들에게서 케착 댄스의 진수를 배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흐느적거리는데 살면서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춤이라는 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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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5월 5일. 어린이날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이날 조식이 마감되기 직전까지 잠에 빠져 있다가 카운터의 모닝콜을 받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하연이가 괜찮냐는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아빠아. 진짜아 괜차나요오?”
“으응. 하연이 왔구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식당 문 닫겠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입구에는 클로즈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진 표지판이 보였다.
“이런 늦었네.”
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식을 굶기는 못난 아비라니.
그런데 직원이 갑자기 우리를 보며 활짝 웃더니 간판을 치우고선 자리로 안내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문 닫은 거 아니었어요?”
“두 분에게만 특별히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한신 리조트 발리. 정말이지 인생 최고의 리조트다.
식사하는데 하연이가 정말 괜찮겠냐며 재차 내게 물었다.
“아빠아. 회사일 마느면 우리이 그냐앙 돌아가자아.”
“뭐? 하하. 아냐. 괜찮아. 잘 해결됐어.”
“진짜로오?”
“웅. 하연이 걱정하게 해서 아빠가 미안해.”
하연이는 회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내가 이렇게 하연이와 떨어져서 생활해본 적이 잘 없잖아.’
나는 그녀를 달래주고는 오늘 점심때도 잠깐 일해야 해서 그때만 놀이방에 가서 놀고 있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약속했다.
하연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연아.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오늘 공연만 끝나면 절대로 이럴 일 없다.
점심시간을 따로 빼서 마지막 연습에 사활을 걸었다.
이다 다유가 말을 좀 험하게 해서 그렇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는데, 그녀가 왜 이 무용단의 단장인지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욕쟁이 할머니 같은 느낌?
연습을 마친 나는 샤워를 마치고 하연이와 함께 리조트 중앙에 위치한 중앙무대를 찾았다.
“여기인 뭐하는데에요오?”
“응. 식사하면서 발리 전통 공연도 보여준다고 해서 와봤어. 괜찮지?”
“웅!”
하연이가 좋다며 내 손을 꼭 끌어안는다.
그동안 아빠 없이 모르는 사람이랑 논다고 고생 많았다, 하연아.
나는 저녁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라탄백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그는 우리가 주문한 음식과 함께 커다란 스테인리스 돔 커버로 덮인 접시를 같이 가져왔다.
이렇게 나오는 곳은 여기뿐인지라 다른 이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하연이도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응? 시키인 음식으은 다 나왔는데에?”
“하연아. 이건 어린이날 아빠 선물이야.”
“네에?”
그 말과 함께 웨이터가 돔 커버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접시를 하연이 앞으로 내밀었다.
접시 위에는 갈색 라탄백이 수줍은 듯 앉아있었다.
“어리니나알 서언무울?”
하연이가 놀란 금붕어 같은 눈으로 나와 라탄백을 번갈아 쳐다본다.
“응. 오늘이 어린이날이잖아.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하연이는 양손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더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작게 손뼉을 쳤다.
“조아요. 쩌엉마알.”
하연이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힌 걸 확인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이제 다음 선물이 나갈 차례다.’
무대 가운데 뜨거운 불이 뿜어져 나오는 항아리가 설치되었고, 상반신을 탈의한 남자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바닥에 앉았다.
하연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나 역시 웃통을 벗고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이 저 남자 뭐 하는 거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씨익 웃으며 바지까지 마저 벗었다.
“꺄아!”
여자들이 눈 부위를 활짝 벌린 채 두 손을 얼굴에 올렸고, 남자들은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노출병 환자도 아니고 여기서 나체쇼를 보일 이유는 없지 않나.
하의를 벗자 그 안에 남자 무용단들이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바지가 등장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남자 무용단들이 내게 웃음을 보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오랜 동료처럼. 자네 이제 왔나?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턱 주저앉고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케착! 케착!”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었고 하연이를 비롯한 모두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같은 관중인 줄 알았던 사람이 느닷없이 무대로 가서 춤을 추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