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74화
“아빠아!! 이러나요오! 이러나라고요오!”
졸린 눈을 뜨고 보니 하연이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가 지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하연이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가운데 창밖에선 울창한 열대우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볼 생각도 못 했는데. 경치 죽이네.’
과연. 총지배인이라는 사람이 감탄을 자아낼만한 풍경이라고 했던 말이 납득된다.
밖으로 나가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영장이 우리를 반겼다.
이게 나와 하연이 둘이서만 사용하는 개인 풀장이라니.
마음속 깊이 정성수 차장님에 대한 감사함이 가득 차오른다.
오늘은 아무런 계획 없이 푹 쉬기로 한 만큼 나는 하연이에게 수영을 제안했다.
“하연아. 우리 수영할까?”
“웅! 조아요!”
여기 온다고 하연이랑 같이 커플 수영복을 맞춰왔다.
같은 컬러와 무늬가 들어간 수영복.
초록색 잎과 꽃무늬가 가득한 수영복인데 어쩐지 열대지역인 이곳 우붓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연이가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입수하려고 하자 나는 서둘러 하연이를 제지했다.
“하연아! 잠깐만. 먼저 몸에 물을 적신 다음 준비운동하고 들어가야지! 아빠가 전에 워터파크 갔을 때 했던 말 기억 안 나?”
“으응.”
“우선 심장에서 먼 곳에서부터. 그러니까 다리, 팔,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장에 물을 묻힌 다음 가볍게 몸을 풀어줘야만 해.”
하연이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나를 보며 따라 했다.
이어서 입수.
- 풍덩!
내가 갑자기 수영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까 사방으로 물이 튀었는지 하연이가 어푸푸 세수를 하며 화를 낸다.
“아빠아아!!”
“히히. 나 잡으면 용치~”
하연이는 오기가 생겼는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앗! 거기 깊은데!
나는 깜짝 놀라 하연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연이가 지금. 수영을 하고 있지 않나.
‘뭐야? 수영 배운 적 없었잖아?’
설마 하연이는 타고난 수영 천재?
언어와 음악에 이어 이번에는 수영까지?
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연아..”
그런데 하연이가 이쪽으로 빠르게 헤엄쳐 오더니 내게 물장구를 튀겼다.
“바다라앗!!”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극한까지 끌어모은 기를 한 번에 방출했다.
“에.네.르.기.파아아!!”
손안에 담겼던 에너지가 거대한 물살이 되어 하연이를 향해 날아간다.
“푸하핫! 어푸푸!”
하연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물을 먹은 모양인지 힘겨워하기에 하연이를 목에 태워 하늘 높이 올렸다.
“하하. 아빠가 하연이 잡았다!”
“놔! 이거어 노으라고오!”
이 재밌는 걸 내가 왜 놓겠냐.
그러자 하연이가 이번에는 내 머리카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끄아악! 하연아, 그만! 그마안!!”
“노으라고오!”
나는 비명과 함께 물속으로 잠수했다.
물속에서 하연이의 허우적거리는 손이 느껴진다.
나는 빠르게 물 위로 나와서는 하연이를 꽉 안아주었다.
“하연아! 괜찮아?”
하연이는 분했는지 말없이 내 가슴에 자기 머리를 기댄다.
파르르 떨리는 손길.
이런. 내가 너무 장난이 심했다. 인생 첫 해외여행인데다가 너무 좋은 방에 묵게 돼서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보다.
나는 하연이를 그대로 안고서는 수영장 모서리에 앉혔다.
“하연아? 괜찮니? 아빠가 미아...크윽!”
하연이는 흡사 물총고기가 된 것처럼 입에서 강한 물줄기를 뿜어 내 얼굴에 명중시켰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처할 시간도 없이 말이다.
“히히히! 소갔찌이?”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는다.
이 녀서억. 아빠 눈에 물들어갔잖아!
나는 황당해 하다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김하연 너어!”
“메에로옹!”
하연이가 나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민다.
어휴. 정말 뉘 집 따님이신지.
나는 뒤로 벌러덩 누워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하늘에서 찬란한 햇살이 내려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파아란 하늘.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나중에 늙어서 은퇴할 나이가 되면. 이런 곳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할 테고.
#
아침과 점심을 모두 굶은 우리는 허기진 배를 이끌고 방에서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을 찾았다.
메인 수영장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발리의 전통 음식을 팔고 있었다.
“뭐가 좋으려나. 그래. 하연아. 이거 어때?”
내가 고른 메뉴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볶음밥 요리인 나시고렝.
한국에 있을 때도 몇 번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짭조름하면서도 달달한 게 제법 내 입맛에 맞았다.
하연이는 고개를 젓더니 수제버거 그림을 가리켰다.
역시 이 나이 때 애들은 햄버거를 보면 못 참는구나.
그 마음 이해한다. 햄버거는 아이들의 친구니까.
오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배를 채웠다.
어차피 늦은 오후라 식당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서양 사람 몇몇이 수영장에 한가로이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게 들어가니까 그제야 머리가 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나는 하연이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향후 일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하연아. 오늘은 그냥 푹 쉴 거야. 어제 장거리 비행한다고 지쳤으니까.”
“웅!”
“그리고 내일부터는 여길 소개하는 홍보영상을 찍어야 하는데, 우리 원래 베트남 가면 하려고 했던 게임 있지?”
“웅.”
“그걸 여기서 하려고 해. 그런데 그건 아빠가 고른 후보지 중에서 네가 정한 데를 무조건 1시간 이내에 가본다는 계획이었잖아?”
하연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외부로 나갈 필요가 없으니까 이 안에 있는 시설들 위주로 게임을 진행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런 방식은 어때?”
“어또케에?”
하연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게임은 아빠가 다 준비해왔거든. 게임에서 진 사람은 무조건 이긴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거야. 벌칙은 그냥 뽀뽀하기 이런 게 아니라 리조트 안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어야 해. 그러니까 조금 전에 하연이는 아빠가 고른 나시고랭이 아니라 수제 버거를 골랐잖아?”
“으응.”
“만약 네가 게임에서 지면 무조건 아빠가 골라준 나시고랭을 먹어야 하는 거지. 어때?”
“아! 이해해쪄요오!”
그래그래.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리조트 전체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다.
리조트 인근을 한 바퀴 돌아본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하연이는 하품을 하며 또다시 숙면에 들었고, 나는 TV 채널을 이것저것 돌리며 빈둥거리다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영장에 들어갔다.
한참을 혼자 그렇게 수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낯선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쓸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경치가 이렇게나 좋은데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직원들은 일 잘하고 있으려나?’
원래는 회사 이름으로 베트남에서 브이로그를 찍을 계획이었는데, 사정이 생기면서 나와 하연이. 둘만 휴가를 떠나오게 되었다.
김소라는 회사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말고 하연이랑 둘이서 푹 쉬고 오라고 했지만.
어디 사장 마음이 그런가.
‘여기서 잘 쉬다가 돌아가면 300% 풀 가동해야지.’
수영장을 나온 나는 난간에 기대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죄다 젊은 커플이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여자는 비키니를 입고 있고 남자는 우람한 몸매를 과시한다.
최근 PT를 받으면서 근육이 제법 붙긴 했는데 그래도 저들하고 비교하면 왠지 초라해진다.
‘내년 정도 되면 나도 저런 근육을 가질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베드에 올려놓았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오전에 받았던 그 정체불명의 전화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드디어 연결됐다! 김진형!
어라? 유주 목소리다.
해외 유심으로 바꿔 끼웠더니 발신자 확인이 안 된 모양.
“무슨 일이야?”
- 잘 갔는지 궁금해서 걸었지! 리조트에는 잘 도착했어?
“으응. 지금 리조트야. 수영하고 있었어.”
- 수영? 팔자 좋네. 하연이는?
“졸린지 방에서 자고 있어.”
- 넌 혼자 수영하고 있고?
“응.”
- 조오켔다! 애 재우고 혼자 망중한이네.
오늘따라 이상하게 유주가 공격적이다.
하연이랑 둘이서만 여행 온 게 부러웠던 걸까?
툴툴거리던 유주는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다친 부위는 어떤지 물어왔다.
“많이 괜찮아졌어.”
- 조심해. 우리 이제 서른인 거. 알지?
“안 그래도 마사지나 받아볼 생각이야.”
- 뭐? 마사지?
유주의 목소리 크기가 높아진다.
“응. 여기 부대시설 이용이 모두 공짜라서 마사지 좀 받아보려고.”
- 그거 이상한 거 뭐 그런 거 아니지?
“이상한?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여기 한신 그룹이 만든 현지 리조트야.”
- 흠흠. 설마 젊은 여자가 해주고 그러는 거면 조심해. 딸이랑 둘이서 갔는데 그건 좀 그렇잖아.
그런가? 어차피 하연이만 방에 혼자 남겨둘 순 없으니 마사지도 같이 받을 생각이었는데.
“알겠어. 가능하면 남자한테 받아볼게.”
- 그래. 남자는 남자한테 마사지를 받는 게 좋다고 어디서 그러더라.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다.
아무튼 아는 사람한테 전화가 걸려 오니까 반갑다.
나는 빙그레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 진짜 좋다. 다음에 너도 기회 되면 꼭 와봐. 무슨 지상낙원이 따로 없어.”
- 그러시겠지. 하연이 무슨 일 안 생기게 조심하고.
“전에 부모님 모시고 왔다고 그랬던가? 아 거긴 베트남이었구나.”
- 그래. 베트남 다낭. 거기 분위기는 좀 어때?
“좋아. 그런데 가족 단위보다는 커플 단위가 많네.”
- 지금은 휴가철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데 왜? 눈에 들어오는 여자라도 있어?
“하하. 그럴 리가. 그냥 그렇다 이거야.”
커플 이야기가 나와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외로움에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그만 이런 이야기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유주야. 넌 왜 연애 안 해?”
- 뭐?
“나야 하연이 키운다고 정신없어서 그렇다곤 해도. 너는 걸릴 게 없잖아. 여전히..아니다.”
- 여전히 뭐?
“아냐. 아무튼 왜 남자친구 안 사귀냐고.”
- 일한다고 바쁜데 그럴 여유가 어딨니? 연애도 다 체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너는 체력이 없고?”
- 애들 보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고 하는 소리지?
“그야 그렇지.”
이해한다. 어린이집 등·하원할 때 가보면 정말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탈출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새삼 하연이가 참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그런데 유주가 역으로 내게 물어왔다.
- 그러는 너는. 왜 여자친구 안 사귀어?
“나? 하하. 난 미혼부잖아. 애까지 딸린. 내가 무슨 연애냐?”
- 으이구. 아주 조선시대 선비님 납셨네. 요즘 세상에 미혼부가 뭐 어때서? 돌싱남들도 잘만 연애하고 다시 결혼하고 그러더라.
“아무튼 난 됐어. 하연이만 잘 커 주면 바랄 게 없으니까.”
- ...
유주는 잠시 말이 없더니 화제를 전환했다.
- 근데 너 5월 5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응? 어린이 날 아냐?”
- 그래. 이틀 뒤가 어린이날이야. 하연이 선물은 준비했어?
이런. 베트남에 가려다가 갑자기 발리로 오게 되면서 새로 여행 준비를 짠다고 깜빡하고 있었다.
“유주야!! 정말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깜빡할 뻔했네!”
정말로 유주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어린이날 인지도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딸, 어린이날도 못 챙겨주는 못난 아비가 될 뻔했네. 한국에서 따로 준비해온 게 없는데, 뭐가 좋으려나.’
유주와의 통화를 끊은 나는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했다.
발리 현지에서 사면 좋을 선물들을 말이다.
그러다가 괜찮은 물건을 발견했다.
‘오. 이거 사주면 하연이도 좋아하겠는걸?’
라탄. 그러니까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야자과의 덩굴식물로 만든 작은 백인데, 크기도 작고 디자인도 예뻐서 하연이가 차고 다니면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만 달랑 주면 뭔가 허전할 것 같고.
나는 하연이의 네 번째 어린이날 선물을 고민하다가 이곳의 총지배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