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73화
송형기는 한신 그룹에서 운영하는 한신 리조트 발리의 총지배인이다.
나름 이 바닥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커리어를 자랑하는 그였다.
벨보이부터 시작해서 총지배인까지 오른. 그야말로 호텔계의 전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두고 처량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짬에 애들 공항 마중이나 나가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으로 발령 나기 전에 스카우트를 제안했던 다른 호텔로 진작 옮길걸.
하지만 그는 속내를 숨긴 채 반갑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보아하니 남자는 많아 봤자 서른 살.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다.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는 4살 정도로 보였다.
‘이런 애들에게 최고급 VVIP 서비스를 제공하라니. 한신 그룹도 이제 끝났군.’
자신을 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이라고 밝힌 한 남자는 마치 회장님이 직접 리조트를 찾은 것처럼 극진히 이들을 모시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다물고는 이번 일이 끝나면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건물이 코로나 기간에 완공되면서 투숙객이 없던 차였다.
“여기서 호텔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걸립니다.”
“꽤 머네요?”
“낮에 오시면 차가 막혀서 2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이 새벽이라 빨리 가는 거죠.”
송형기는 두 사람을 밖에서 대기 중에 있던 중후한 캐딜락 차량에 탑승시켰다.
“오오! 캐딜락!”
“아시는군요. 미국 대통령의 의전차량과 동일한 모델입니다. 방탄 기능도 장착되어 있죠.”
“방탄 기능이요?”
“VVIP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시간이 늦었네요. 타시죠.”
차 안에서 그는 기묘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애 아빠란 양반은 신이 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내다보고 있는 반면, 꼬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
‘4살짜리한테 해외여행은 별 감흥이 없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꼬맹이가 뭘 알겠나.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과는, 뭐랄까 결이 조금 다르다.
많이 피곤해 보이지는 않는데 차분하고, 담담하다.
마치 이런 곳에 너무 자주 와봤기에 빨리 숙소에 도착해서 그저 쉬고 싶어 하는 귀부인처럼 보인다.
‘허. 내가 지금 애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신 차리자, 송형기.’
오래지 않아 이들을 태운 차량이 리조트에 도착했다.
젊은 남성이 말을 걸어온다.
“우와. 건물이 정말 멋지네요. 이국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에요.”
“이번에 새로 만든 건물이니까요. 그리고 여기.”
“응? 이게 뭔가요?”
“웰컴 주스와 캔디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연아 목마르지? 이거 마셔봐. 우릴 환영해서 주는 주스래.”
“네에.”
부녀는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웰컴 주스를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셨다.
송형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이렇게 놀라면 한 달간 머물 방을 보면 어쩌려고 저러나.’
송형기는 이들이 묵을 방을 친히 안내해주었다.
“머무실 곳은 여기입니다.”
“우와! 엄청 크네요?”
“저희가 보유한 객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5 베드룸 로열 풀빌라입니다. 정글 한가운데 위치해서 경치도 좋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내일 일어나서 보시면 감탄을 자아낼 만한 풍경이죠. 그럼 안쪽으로 이동하셔서 구경하실까요?”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따라온다.
보아하니 한신가의 자녀나 일가친척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자에게 VVIP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내 실적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위에서 작업을 넣은 건가? 나중에 이들에게 안 좋은 말이 나오면 그걸 핑계 삼아 강등시키려고?’
그럴 순 없지.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이직하기 위해서라도 현재 직장에서 나쁜 평판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바닥은 무척이나 좁아서 실적이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을 채용하려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송형기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이들에게 조명이 환하게 켜진 수영장을 보여주었다.
남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훗. 당연한 반응이지. 이 방은 아무나 올 수 있는 데가 아니란 말이다.
원래 계획은 각국 정상들이나 왕족. 또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의 방. 그저 돈이 많다고 해서 내주는 방이 아니었다.
그는 리조트에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다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히 불러주십시오. 그럼 이만 편히 쉬시길.”
방을 나온 송형기는 진지하게 이직을 논하기 전. 한 달간 이들에게 잘 보여서 좋은 평가를 받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
“하연아. 여기 좀 봐! 화장실이 아니라 열대 식물원에 온 것 같지 않니? 아. 하연이 넌 식물원이 뭔지 모르겠구나. 식물원은..”
아빠도 참.
좋은 건 알겠는데 너무 티를 낸다.
물론 자신도 좋았다. 여태 자기가 방문했던 호텔이나 리조트 중에서도 이 정도로 뛰어난 시설을 자랑하는 숙소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기분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무뎌질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아빠랑 둘이서만 해외로 여행을 왔다는 게 중요했다.
거기에 무려 한 달이라는 긴 여정.
이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면서 장거리 비행을 한 피로가 몰려온다.
“아빠아. 나 잘래요오.”
“으응. 그래그래. 피곤하지? 어서 자자.”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한국 시각으로 환산하면 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각.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깼다.
아무래도 늦은 시각에 마신 주스가 원인인 듯했다.
‘비행기에서도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셨고.’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 타닥타닥.
시계를 보니 5시 정각이다.
‘뭐지? 아빤 안 잤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빼꼼히 방 밖으로 머리를 내미니 아빠가 노트북을 켠 채 작업을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시각에?’
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살금살금.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뭘 하고 있나 지켜봤더니 글쎄 여행계획을 짜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한국에 있을 때 다 짜놓고서는 또 뭘 그렇게 수정하고 있는 거야?’
하여간 못 말릴 사람이다.
머무는 방이 너무 좋아서 계획을 수정하는 게 분명했다.
지금도 인근 관광지 둘러보기에서 수영장에서 하연이랑 놀기로 내용을 바꾸고 있지 않나.
진짜 못 말린다니깐.
나는 아빠가 또 무슨 계획을 세우나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조금 더 얼굴을 그쪽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아빠가 인기척을 느꼈던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노트북 조명에 비친 아빠의 얼굴이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우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만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감각은.
젠장. 저질렀다.
3살 때도 지려본 적 없었는데.
어떻게든 의지와 노력으로 버텼는데.
이것만큼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그걸 4살에 와서 실수해버리다니.
나는 큰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앙!”
아빠는 내 쪽으로 급히 달려오더니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각에 네가 왜? 어라? 하연아. 너 지금?”
그마안! 그마아아아안!!
발리에 온 첫날부터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아빠에게 안겨서 목이 터져라 울어 젖혔다.
그대로 자리에 누워있기에는.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
오전 10시가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카운터에서 전화가 왔다.
한신 그룹에서 지은 리조트라 그런지 현지 직원들도 한국어가 제법 능숙하다.
“좋은 밤 보내셨나요? 곧 조식이 마감될 시간이라 전화드려보았습니다.”
“아. 그게.”
곤란하게 되었다.
하연이는 무슨 일인지 새벽에 밖으로 나와서는 그만 오줌을 지렸다.
여태 집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2살 이후로 처음인가?’
하긴 그때야 기저귀를 차고 있었을 무렵이고, 3살 때부터는 스스로 대소변을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아이였는데.
아무래도 갑자기 환경이 달라져서 애가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새벽엔 정말 나도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더랬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면서 온갖 생각이 머리로 스쳤다.
설마 정글에서 죽은 귀신?
이럴 때 뒤돌아보면 정말 귀신이 나타난다지만 나는 각오를 다지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거기서 하연이가 나타날 줄이야.
하마터면 나도 지릴 뻔했다.
하연이가 별안간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다행이야.’
아무튼 지금 하연이는 꿈나라에 떨어져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상태다.
그러니 조식을 먹고 싶어도 먹으러 갈 수가 없었던 것.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은 패스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리조트 안에 있는 식당은 모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시고, 비용도 따로 청구되지 않으니 이용하고 싶으실 때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아깝다.
최고급 리조트의 조식은 어떤 맛일지 기대가 컸는데.
사실 오늘 하려고 했던 첫 번째 일정도 조식을 소개하는 영상을 찍으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숙소에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게 방 인테리어랑 조식 퀄리티니까.’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일정은 길다.
오늘 하루는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하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일까?
나 역시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밤 비행에 날까지 샜더니 피곤하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까슬까슬하면서 차가운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행복해했다.
‘좋다. 좋구나. 여기가 지상낙원이다.’
그렇게 잠이 들려던 찰나.
이상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뭐지? 스팸인가?’
안 그래도 요즘 불법 스팸 전화로 문제가 많지 않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젊은 사람들도 속절없이 당한다고 하니 걱정부터 앞선다.
‘받지 말자. 요즘은 전화만 받아도 돈이 나갈 수 있다고 하잖아.’
나는 전화기를 옆으로 밀고는 잠을 청했다.
정성수 차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세미 씨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씨익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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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아직도 자는 건가? 왜 전화를 안 받아.”
신유주가 투덜거리자 주은영 원장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택배가 안 와서.”
“택배? 여기로 시킨 게 있었어?”
“으응. 그런 게 있어요.”
신유주는 낙담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기껏 여행 간 첫날이라고 신경 써서 보조 교사에게 부탁해 오전 시간을 따로 빼놨더니 전화를 안 받으면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오늘 늦게 출근한다고 말한 주은영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이모.”
“원장님.”
“네, 원장님. 오늘 어디 들렀다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요?”
“아 그거. 작년에 졸업한 학부모가 뭘 줄 게 있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지 뭐야.”
젠장. 되는 일이 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전화하기는 그른 모양이다.
신유주는 퇴근하면 다시 전화하리라 다짐하고선 생활기록부를 펼쳤다.
그래. 일이나 하자. 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