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68화
“그래? 그럼 만나지 뭐.”
“아빠눈 거기이 실타고 해짜나요?”
“기획사에 널 안 보내겠다는 거지, 이태식이 싫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아빤 이태식 좋아하는걸?”
응? 그랬었나?
생각해보니까 아빠가 어렸을 적은 이태식이 전성기였던 시절이다.
음악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며 잘 나가던 때.
“무슨 목적으로 너를 만나자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괜찮을 것 같아.”
“왜요오?”
“너 역시 가수를 꿈꾸고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이태식은 한국 대중가요계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야. 지금도 여전히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를 운영하면서 활동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에게서 여러 가지 조언을 들을 수도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분야의 정점을 찍은 고수의 이야기는 듣고 싶다고 쉽게 들을 수 없다. 게다가 10개의 말 중에 9개가 나와는 맞지 않더라도 나와 맞는 그 한마디가 내게는 성장의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며칠 뒤.
나는 아빠와 함께 PKT 엔터 본사에 오게 되었다.
전생에선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는데 환생한 뒤로는 처음이다.
‘이것저것. 많이도 꾸며놓았네.’
이윽고 사장실 문이 열렸고, 이태식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PKT 엔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웰컴 투 더 PKT 월드!!”
저 멘트 지금도 그래도 쓰고 있구나.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가 내게 다가와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야. 네가 바로 하연이구나! 실물이 훨씬 더 예쁜데? 하하.”
모두 자리에 앉자 아빠가 입을 열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일 때문에 불러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연이가 요즘 잘 나가지 않습니까? 가요계 선배로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지만 나는 그가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부른 게 아니란 걸 안다.
‘단지 잘 나가는 신인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초대할 사람이 아냐. 다른 꿍꿍이가 있어.’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태식은 금방 본심을 털어놓았다.
“아직 비밀이지만 곧 저의 새 앨범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새 앨범이요? 이제 음악은 안 하시기로 한 거 아니셨어요?”
“하하. 경영에만 집중하려고 했는데 하연이 노랠 들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네?”
이태식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작은 꼬마 아이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었습니다. 제 정체성은 대표가 아니라 여전히 가수니까요.”
“그러셨군요. 아무튼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 뮤직비디오에 하연이가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겠습니까?”
“카메오로요?”
“네. 요즘 대한민국 사람 중에 하연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연이가 제 뮤비에 출연해준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이태식은 아무나 뮤비 카메오로 받지 않는다.
철저히 고르고 고른 A급 스타들. 혹은 떠오르는 신인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이들만 엄선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게 바로 나였다.
‘나를 높이 평가해준 것 같네.’
사실 전생에서도 그에게 뮤비 카메오 출연을 몇 차례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나 역시 선배 뮤지션인 이태식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고, 그는 늘 파격적인 실험을 하니까 그가 어떤 식의 뮤직비디오를 찍을지 관심이 없진 않았다.
다만 그가 뮤비에서 지향하는 컨셉과 내가 지향하는 컨셉이 너무 달라서 고사해야만 했다.
‘너무 19금 지향이었으니까.’
하지만 4살짜리 꼬마에게 그런 걸 시키진 않을 테고.
그런 점에서 그와의 이번 콜라보는 내게도 기회였다.
‘내 춤을 따라 하는 열의도 보여주었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아빠는 조금 생각이 달랐나 보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역할로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역할이라. 하하. 제가 그동안 너무 야한 느낌으로 뮤비를 찍어서 걱정하시는 건가 보군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물론 성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하연이는 아직 4살밖에 안 된 친구라서요.”
“그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신곡은 이전의 제 노래와는 달리 신나는 스윙재즈곡이니까요.”
“그럼 하연이는 어떤 식으로?”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는 소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테너 색소폰이요?”
아빠의 눈이 커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
4살 꼬마한테 그 무거운 테너 색소폰이라니.
“하하. 혹시 일본 영화 중에 스윙걸즈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포스터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네. 나름 당시에는 유명한 영화였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그래서 말인데 양 갈래 머리를 한 하연이가 테너 색소폰을 연주한다면 스윙걸즈라는 영화를 본 분들은 어떤 느낌으로 출연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다.
그 정도면 출연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고.
아빠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몇 가지 당부사항을 덧붙인다.
“다 좋은데 너무 무리는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하연이는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물론이죠. 충분히 휴식을 주는 것은 물론 컨디션에 따라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촬영은 언제쯤 진행되나요?”
“빠르면 2주 뒤? 그 부분은 스케줄 조율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태식의 신곡 뮤비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되었다.
전생에는 해보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만큼 기대가 된다.
자기 키만 한 색소폰을 들고 연주하는 꼬마라.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
사장이 되고 나서 뭐가 가장 달라졌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모든 게 다 돈으로 보인다.’
직원들 인건비, 사무실 임대료, 비품비, 각종 공과금, 회식비 등등.
하다못해 작은 간식을 사는 데 쓰이는 것도 결국 돈이었다.
누가 들으면 심술쟁이 스크루지가 된 게 아니냐고 나무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전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의미가 담겨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점은 꾸준히 일거리가 들어오고 있었고, 단가도 높아지면서 직원들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큼의 수익이 나고 있단 사실이었다.
회사 분위기도 좋다.
고참 둘, 신입 셋. 남자 둘, 여자 셋.
김소라도 선배로서 신입사원들을 잘 이끌어주고 있었다.
“과장님. 혹시 마감 일자를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조금 늦출 수 있을까요?”
“내일로? 왜?”
“지금 급하게 들어온 편집 건이 2건이나 있어서요. 오늘 내로 마무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하라면 할 순 있는데 그러면 퀄리티가 엄청 떨어지겠죠.”
“으흠. 알겠어. 그건 내가 클라이언트 측에 한번 잘 이야기해볼게. 하루 정도면 문제없을 거야.”
그녀는 한동안 클라이언트와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영 씨 축하해.”
“네?”
“상대 측도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네. 퀄리티만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 달래.”
“와.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뭘. 영상만 잘 만들어와.”
진짜 사람 많이 변했다.
내가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김소라가 싱긋 웃으며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간만에 회식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회식이요?”
“네. 신입들 들어오고 딱 1달 되었더라고요. 오늘.”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회식은 이전에도 몇 번 하긴 했었는데 오늘이 입사 한 달이라면.
챙겨주는 게 사장으로서 당연한 도리 아니겠나.
나는 흔쾌히 콜을 외쳤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선약이 없다면서 이에 따랐다.
우리는 평소보다 2시간 정도 일찍 사무실을 나와 인근의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다들 공짜 술이라고 좋아 죽는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자 그 좋던 분위기는 다 어디 가고 전투적으로 돌변한다.
서로 자기가 고른 음식을 시키겠다며 양보의 기미가 없다.
김지환은 프라이드치킨을 먹고 싶다고 그랬고, 오세영은 골뱅이무침을. 조유리는 고갈비가 먹고 싶단다.
그렇게 이질적인 메뉴가 모두 한 가게에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보통은 아무거나 시키라고 하지 이런 일로 싸우진 않잖아.
내가 뽑았지만 정말 웃긴 친구들이다.
나는 단숨에 상황을 제압했다.
“워워. 그만그만. 다 시켜줄 테니까 그만 싸워요.”
“정말요?”
“와! 사장님 대박!”
“역시 우리 사장님이 최고야!”
“대신 양파 한 조각도 남기면 안 됩니다. 알겠죠?”
“네에!”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눈앞에 먹을 게 많으니까 나도 괜히 신이 났다.
그런데 옆에 앉은 조유리가 뜬금없이 하연이 이야기를 꺼낸다.
“사장님. 저기 말이죠.”
“네에? 잘 안 들려요, 유리 씨.”
“하.연.이.말.이.에.요!”
“아. 하연이요. 네네. 왜요?”
“혹시 코디네이터가 따로 있나요?”
“아뇨.”
“그럼 누가 옷 골라주고, 화장해주나요?”
“음. 유주라고 제 대학 동창이기도 하고, 하연이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있거든요. 그 친구가 도와주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녀는 무언가 아쉽다는 얼굴로 고갈비에 붙은 가시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초라해 보인다.
“그건 왜요?”
“아,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그게. 저.”
그녀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요.”
“옷 입고 화장하는 거요?”
“아뇨. 제가 하는 거 말고 다른 사람 시켜주는 거요.”
“아.”
“어릴 적부터 그런 거 좋아했거든요. 내가 예쁘게 꾸며준 아이가 다른 사람들한테 주목받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요.”
그랬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하연이는 내 딸이지 곰도리형제단 소속은 아니다.
조유리가 하연이의 코디네이터 업무를 하게 된다면, 나야 물론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지만, 업무 상 상관없는 일을 하는. 그러니까 사장의 딸을 사적으로 도와주는 꼴이 되고 만다.
왜 뉴스 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지 않던가.
군대에서 공관병으로 일하다가 대가 없이 사단장의 자녀 과외를 한다거나 집안일을 한다거나 해서 나중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
조유리가 먼저 관심을 보인 일이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나는 조유리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고는 말했다.
“마음은 고마운데, 그건 정중히 사양할게요.”
“에? 왜요?”
“하연이는 우리 회사 소속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괜한 말이 나오면 서로 곤란해질 테니까요.”
“아, 아네요! 사장님! 저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물론 나도 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세영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하연이 매니저는 사장님이죠?”
“그렇죠?”
“그럼 하연이를 우리 곰도리형제단에 들어오게 하는 건 어떤가요? 아직 소속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뭐? 하연이를 곰도리형제단에?
잠깐만. 이거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즉시 스마트폰을 들어 변호사인 상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