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60화
“좋은 딸을 두었어.”
“네.”
“이제 4살이라지? 잘 키워봐.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가수가 될지도 모를 아이야.”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 계속해서 하연이 칭찬을 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 바로 한신 그룹의 정점인 이창돌 회장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옆집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걸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딸 가진 아빠라서 자네 마음을 잘 아네. 이제 슬슬 반항도 하고 자기 고집도 생길 때 아닌가.”
“전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해진 것 같긴 합니다.”
“그렇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야. 그렇다고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또 버릇 나빠지지. 딸이란 참 키우기 어려워. 아들처럼 막 대할 수도 없고.”
그는 이세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황태진, 그 노친네랑도 아는 사이라지?”
응? 미래 그룹 황태진 회장에게 노친네라니. 친한 사이인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만나서 술 한잔 하다가 자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제 이야기요?”
“그래. 한신 타이거스 개막전 축하공연에 자네 딸이 내정되었다고 했더니 그 자기밖에 모르는 고집쟁이 늙은이가 대뜸 잘했다며 칭찬을 하더라니깐. 사실 좀 놀랐어. 그럴 위인이 아닌데.”
“그러셨군요. 두 분이 친한 사이신가 보네요?”
“우리가 친하다고? 하.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재계인이다 보니 얼굴을 아는 것뿐이야. 그런 성격 고약한 노인네랑 친구 할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걸?”
그러기에는 너무 친근하게 이야기하십니다만.
그는 계속해서 딸과 아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딸은 참 귀여운데 가끔은 그 속을 모르겠다는 둥 나이가 들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는 둥 그래도 자식들 중에서는 가장 애착이 간다는 둥.
그가 옆에서 계속 말을 거는 바람에 경기를 볼 여력조차 없다.
그러던 차에 하연이와 이세미가 나타났다.
둘 다 같이 샤워를 했는지 마르지 않은 머리를 하고선 온몸에서 향기로운 비누 냄새가 났다.
“아빠아아!”
하연이는 금세 내 품에 안겼다.
아. 향긋한 냄새. 내 딸이지만 정말 좋은 냄새다.
이대로 하연이를 인형 삼아 꼭 끌어안고선 함께 잠이 들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나는 하연이를 옆자리에 앉히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 일인지 이창돌 회장을 시작으로 이세미. 그리고 정성수 차장님까지 모두 흐뭇한 얼굴로 나와 하연이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 어색하게 말이다.
“흠흠. 마침 샤워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고맙습니다.”
“뭘요. 하연이가 혼자서도 샤워를 참 잘하더라고요. 물어보니까 집에서도 혼자 샤워한다던데 깜짝 놀랐어요.”
“뭐? 4살짜리가 혼자 샤워를 한다고?”
이창돌이 깜짝 놀라 반문하자 이세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머리 감겨준다니까 혼자서 저 작은 두 손으로 거품을 내는 게 아니겠어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더라고요.”
“대단하군. 어릴 적부터 독립심을 키워주려고 지 아비가 노력한 흔적이겠지. 정말 대단해.”
이창돌이 나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저기. 회장님. 그게 아닌데요.
머쓱해진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연이도 왔겠다, 자리를 옮기려고 했더니 이창돌 회장이 괜찮다면서 식사까지 시켜준다.
어디서 뭘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는데 휘황찬란한 놋그릇에 뜨거운 사골국물과 함께 깍두기며 김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진수성찬이 펼쳐진다.
이창돌은 웃으며 말했다.
“나주곰탕일세.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정말 끝내주는 집이 있거든. 들게나. 아. 하연이는 곰탕 먹을 줄 모르려나?”
그 말에 하연이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래? 그럼 한번 먹어보렴. 이 할아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어느새 호칭이 할아비가 되었다.
그나저나 하연이한테 곰탕을 먹인 적이 없는데 하연이는 저게 뭔지 알고 저러는 걸까?
아니다. 순대도 좋아하고, 순댓국도 먹을 줄 아니까 괜찮겠지.
순댓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원래 어린아이들은 매운 걸 잘 못 먹는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하연이는 어릴 때부터 매운 것도 잘 먹었다.
김치, 떡볶이, 순댓국 등. 덕분에 요리할 때 참 편했다. 고춧가루나 마늘, 후추 등을 일부러 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무튼 곰탕은 맑은 국물이니까 하연이가 먹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다 이 말씀.
“후루룩.”
숟가락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는데. 캬아. 이거 정말 맛이 끝내줬다.
과연. 한신 그룹 창업주도 반할만한 맛.
기름기 없이 담백한 국물에 진한 육향이 절로 숟가락을 부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정성수 차장님 혼자서만 테이블 뒤에 멀뚱히 서 있다.
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숟가락을 흔들자 그는 괜찮다면서 웃음을 보인다.
그 모습을 본 이세미가 이창돌에게 말했다.
“아빠. 정 차장님도 같이 식사하는 건 어때요? 배고프실 텐데.”
그러자 이창돌이 숟가락을 손에서 놓더니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세미야. 아랫사람하고 같이 식사하는 거 아니다.”
“아빠!”
“이봐 정 차장.”
“네, 회장님.”
“밖에 나가면 김 실장 있을 거네. 둘이서 식사하고 와.”
“알겠습..”
그때였다.
갑자기 하연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창돌을 향해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하연이의 행동에 모두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사이.
하연이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간절한 눈빛을 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하라버지이.”
“으응? 무슨 일이냐, 하연아.”
“아저씨이도 우리랑 가치 머그면 안돼요?”
“그, 그건.”
천하의 이창돌 회장이 지금 4살 꼬마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지막이 말했다.
“정 차장.”
“네, 회장님.”
“자리에 앉게나.”
“회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으니까 앉아.”
그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곰탕은 네 그릇밖에 없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연이 혼자서 저 많은 걸 다 먹을 순 없으니 그에게 양보하는 게 좋을까?
그래도 이미 하연이가 입을 댔는데 그걸 주기도 조금 그렇고.
“이봐. 여기 한 그릇 더 가져와.”
하지만 이창돌의 한 마디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곰탕 한 그릇이 추가된다.
설마 나주곰탕집과 이곳 사이에 순간이동 포털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 궁금증은 금방 해결되었다.
“자네도 같이 먹게나. 손녀가 부탁하는 데 할아비가 매정하게 거절한 순 없지 않겠나.”
“고맙습니다, 회장님.”
“원래 내가 이거 먹고 한 그릇 더 먹으려고 여분으로 시켜둔 건데, 자네 주는 거야. 영광으로 알라고.”
“감사합니다!”
그랬던 거였구나.
이창돌 회장은 정말로 나주곰탕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두 그릇을 시켜놓을 줄이야.
‘그런데 하연이한테 분명 손녀라고 이야기했지? 하연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네.’
공연 한 번에 대기업 창업주의 마음을 쏙 빼놓은 하연이. 역시 하연이의 귀여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그렇게 다 같이 나주곰탕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사이.
투명한 유리 창밖으로 관중들의 함성이 커졌다.
“와아아아!!”
방 가운데에 있는 TV를 봤더니 한신 타이거스 타자가 홈런을 쳤는지 먼 곳을 응시한 채 함박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방망이를 던지고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이어서 중계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단합니다! 한신 타이거스의 패색이 짙던 경기였는데요. 7회 말 2사 만루에서 홈런이 터졌습니다! 정말 대단한 홈런입니다!! 쭉쭉 뻗어서 장외로 넘어가는 공. 역전에 성공한 한신 타이거스. 과연 이 기세를 모아 개막전 홈구장에서 승리를 챙길 수 있을까요?”
오호라. 만루 홈런이 터진 모양이다.
이창돌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큰 목소리를 내었다.
“짜식들. 내가 친히 와줬는데 홈에서 지면 혼 좀 내려고 했더니. 이제야 몸이 좀 풀렸나 보군.”
이후 우리는 경기에 집중했다.
그의 말처럼 한신 타이거스 선수들은 이제야 몸이 풀렸는지 연신 불방망이를 뽐냈다.
결과는?
한신 타이거스의 13-8 역전승!
하연이가 축하 공연을 하러 온 자리. 만약 경기에서 졌으면 조금 무안할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한신 타이거스를 응원하는 홈팬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야구라. 생각보다 재미있는 스포츠일지도.’
물론 축구의 그 역동성을 따라올 순 없지만 말이다.
경기도 끝나고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이창돌이 정성수에게 지시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하연이에게 건넸다.
야구공이다.
‘유명한 선수 사인이 들어간 공인가?’
그런데 이창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하연아. 오늘 승리의 터닝포인트가 된 7회 말 홈런 공이다. 만루에 장외 홈런까지 기록했으니 가치가 대단히 높은 공이지.”
“우왕!”
“오늘 하연이가 좋은 공연 보여준 덕분에 할아비의 팀이 이겼단다. 이건 승리의 요정에게 주는 할아비의 선물.”
“고맙뜹니다아!”
하연이가 좋다며 이창돌이 건넨 공을 넙죽 받는다.
헐. 잘은 몰라도 저 공에 값을 매기면 꽤나 높지 않을까? 그것보다 장외로 나간 공을 어떻게 찾은 거지?
재벌가의 능력이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 같다.
모두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오자 정성수가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는 오늘 수고 많았다며 나와 하연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뭘요. 차장님이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뇨. 하연이 공연도 놀라웠고.”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무릎을 구부려 하연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하연이가 나서 줘서 회장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게 하연이와 진형 씨 덕분입니다.”
그와 같이 식사를 한 게 그렇게나 영광인 걸까? 이제는 조직을 나와 사업을 꾸리는 입장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회장님이 가족이나 외부 손님 외에는 함께 식사하시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한신 그룹에는 오래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떤?”
“이창돌 회장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 용의 머리에 올라탈 것이다.”
대기업의 생리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잘 되었다니 나까지 기분이 좋다.
나는 농담 삼아 입을 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차장님이 꼭 한신 그룹 사장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정 차장님. 이게 뭐라고 감동을 먹은 모양이다.
애써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겠는가.
“고맙습니다. 꼭. 그래 보이겠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응원해주었고, 하연이도 할 수 있다며 크게 소리친다.
그와 헤어진 우리는 자정이 다 되었을 즈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연이는 많이 피곤했는지 차에 타자마자 뻗었고, 나는 잠든 하연이를 안고 올라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새근새근 곤히 자는 하연이.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잔다.
하연아.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기죽지 않고 할 말 다 하고. 정말 누구 딸인지 아빠가 너무 대견스럽더라.
하연아. 좋은 꿈 꾸고. 사랑해.
나는 하연이의 통통한 볼살에 입맞춤을 한 뒤 방에서 나왔다.
이제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도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계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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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보내고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못 보던 얼굴이 세 명 보였다.
이번에 뽑은 신입사원들 말이다.
세 사람의 얼굴에 모두 긴장이 가득한지라 나는 이들을 데리고 김소라 과장과 함께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나와 김소라 과장의 소개가 이어진 다음 신입사원의 차례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친구들. 물론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를 뽑은 거였지만, 이력서와 면접에서 밝히지 않은 경험들이 대단하다.
아무래도 이력서를 A4 한 장만으로만 받고, 면접 시간에는 긴장한 나머지 속에 있던 말을 다 꺼내지 못한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