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국힙원탑-59화 (59/135)

내 딸은 국힙원탑 59화

이날 광주 경기장에선 홈 개막전을 맞아 다채로운 이벤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관중석은 코로나19 방역 완화의 영향인지 수많은 인파로 꽉 들어찬 가운데 한신 타이거스 선수들의 사인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성수 차장님이 내게 슬쩍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선수 있으면 사인볼, 받아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야구 별로 안 좋아하시나 보군요?”

이게 다 내가 어릴 적 한신 타이거스의 연이은 부진 때문이다.

너희가 조금만 더 잘해줬어도 내가 야구에서 축구로 갈아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유주가 함께 왔으면 사정이 달랐을 테지만, 딱히 같이 올 이유가 없었다.

광주까지는 거리도 멀고.

뒤에서 하연이 어깨를 주무르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던 정성수 차장님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무슨 일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정성수 차장님이 이세미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세미 뒤로 양복 입은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졸졸 따라오는데 무언가 높으신 양반들 같다.

이세미는 하연이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 하연아. 오늘 정말 옷 예쁘다. 아빠가 골라준 옷이야?”

하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세미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누군데?”

“어리니딥 선생님이요오.”

“아. 어린이집 선생님이 골라주셨구나. 눈썰미가 좋으신 분인가 봐. 공주님처럼 예쁘다.”

그녀는 한동안 하연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쁘실 텐데 저희 제안을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공연하는 당사자는 하연이니까 제가 아니라 하연이가 수락한 거죠.”

“그래도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저번에 봤을 때와는 왠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때는 어설픈 대학생이랄까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유학생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정장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직장인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카리스마 같은 게 풍기고 있었다.

‘호랑이 새끼는 암만 어려도 호랑이라는 뜻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공연과는 별개로 거액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너무 큰 금액이라 받고서 깜짝 놀랐어요.”

그녀는 내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정 차장님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그랬군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보내주신 후원금의 절반은 저와 하연이 같은 미혼부와 그들의 자녀를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덕분에 좋은 일에 쓸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네? 그걸 또 기부하셨다고요?”

“뭐 잘못된 거라도?”

“아, 아뇨. 괜찮습니다. 선물로 드린 거니까 그걸 어떻게 쓰든 당사자 마음이죠.”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정 차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연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연아. 오늘 축하 공연에서 신곡도 발표한다며? 기대하고 있을게. 너의 공연에 행운이 깃들길!”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는 정 차장님과 함께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로 가득 차 있던 주변이 썰물 빠지듯 휑했다.

재벌가의 자식으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경기장 관계자가 다가오더니 곧 축하 공연이 시작된다며 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하연이와 눈높이를 맞추고선 부드럽게 말했다.

“하연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실수해도 괜찮아. 하연이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네가 뭘 하든 아빤 언제나 우리 하연이 편이야. 알지?”

“웅!”

하연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더니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천만 불짜리 미소. 그래. 누가 이 미소를 보고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있겠나.

곧 사회자의 멘트가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녀! 올해 4살의 신동! 김! 하! 연! 양을 소개합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하연이가 그라운드 위를 향해 나아갔다.

“하연아 힘내! 파이팅! 넌 할 수 있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하연이가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깜찍한 윙크와 함께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리고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아아! 젠장. 너무 아쉽다. 어딘가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멋진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만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는 한 장면 같았달까. 응원한다고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

대기실을 나와 잔디 위로 올라오자 경기장을 꽉 메운 관중들이 보내는 뜨거운 열기가 훅 올라온다.

빨간색과 흰색이 반반씩 섞인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노란색 응원용 막대풍선을 들고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대부분 쟨 누구지? 하는 표정들.

왜 아니겠는가. 나는 이하연이 아니었고, 아직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어린 유튜버일 뿐.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반드시 증명할 것이다.

내가 괜히 전생에 국민가수로 불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관계자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하자 이내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튜브 데뷔곡인. 원패밀리였다.

흥겨운 비트가 경기장을 가득 울렸고,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쟨 누구야? 춤 잘 추는데?”

“헤헤. 제법이네. 4살짜리 꼬맹이 주제에.”

“인트로 괜찮네. 왜 이런 노래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

“노래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가수 얼굴은 첨 보네.”

흥. 조금만 기다려봐라.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해줄 테니.

이윽고 전주가 끝나고 노래를 부를 차례가 왔다.

보통은 립싱크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만은 절대로 싫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심지어 몇몇 아이돌의 경우 마이크 없이 춤만 추고 내려오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가수이지 댄서가 아니었다.

전생에도 정말 목이 완전히 가지 않는 이상 무조건 라이브만을 고집했다.

라이브는 가수인 자신의 정체성이자 자존심이었으니까.

“지베에 도라오며언.”

첫 소절부터 고음이 폭발하자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웅성거리는 것 같더니 이내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는 관중들.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나 진심을 담아 불렀지만, 지금은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혼신을 다해 불렀다.

가끔 친한 동료 가수들끼리 농담삼아 이야기하곤 했는데 우리끼린 접신(接神)한다고 그랬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이크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야말로 물아일체의 경지.

물론 그렇다고 안무를 게을리하진 않았다.

노래에 방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율동이 이어진다.

“와! 쟤 너무 귀엽다! 노래도 너무 잘해!”

“노래 좋네? 이거 가사가 가족의 소중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가?”

“노래 좋다아. 쟤 왜 저렇게 잘하는 거야?”

4분여간의 노래가 끝나고.

경기장은 나를 응원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뜨거운 관심과 열기가 익숙한 듯 낯설다.

“와!!! 최고다!! 꼬마야 진짜 잘한다!!”

“꼬마야! 삼촌이 앞으로 너 팬 할게!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아!!”

“소르음!! 야! 나 팔뚝에 닭살 좀 봐아!”

훗. 이 정도로 호들갑은.

아직 본무대는 끝나지 않았단 말씀.

이어서 사회자의 멘트가 나왔다.

“이야. 정말 엄청난 무대였습니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이게 과연 4살 꼬마 아이의 실력인지 제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었는데요. 이어서 김하연 양의 신곡! ‘달려’를 마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발표하지 않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려주는 곡이라고 하네요? 과연 어떤 곡일지. 기대됩니다!”

지상파에서 하는 생방송 중계와는 별도로 아빠가 지금 유튜브 라이브를 하고 있을 텐데.

여기 있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쯤 유튜브에서 이걸 보는 내 팬들은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한 번도 보여준 적도. 발표한 적도 없는 신곡이니까 말이다.

#

└ 신곡이라고? 이게 뭐죠?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하연이 신곡이다! 신고옥!!!!

└ 와! 이거 진짜 뭡니까? 이렇게 갑자기 신곡 발표라니!!!

└ 원패밀리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신곡인가요? 추진력 어마어마하네요

└ 오홍! 원패밀리보다 훨씬 더 빠른 템포의 곡이네? 안무도 아이돌 칼군무같고.

└ 춤 실력 죽이네. 우리 하연이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진짜 못 하는 게 없네요. 이모가 사랑해~♡♡♡

└ 이럴 줄 알았으면 광주 가는 건데. 하연이 아버님 너무해요. 우리한테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신곡 발표라니 ㅠㅠ

└ 이제 전주 끝난다. 어떤 노래일지 기대된드아아!! 가즈아!!

나는 사전에 김소라한테 부탁해서 ‘달려’의 뮤직비디오까지 HiYeom하연 채널에 동시 노출하였다.

처음에 하연이가 개막전 축하 공연에서 신곡을 발표하자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속으로 반신반의했다.

보통은 티저부터 내고 신곡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올린 다음 뮤직비디오를 통해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니까.

그런데 그동안 말 한마디 없이 오프라인 공연에서 갑작스럽게 신곡 발표라니.

배신감이 느껴질 순 있겠지만 분명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지금도 봐라. 댓글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나.

너무 빠르게 댓글이 달리는 바람에 일일이 확인할 순 없지만, 부정적인 댓글보다 긍정적인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노래가 좋다는 둥 춤이 대단하다는 둥 이전 곡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놀랐다는 둥. 칭찬 일색.

하연이도 참 대단한 게 준비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고 있는 오프라인 무대가 처음인 사람이 과연 맞는가 싶을 정도.

내 눈에만 대단하게 보인 건 아니었는지 처음에는 다소 시큰둥하던 관중석도 연신 손뼉을 쳐대며 하연이의 공연에 100% 빠져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 하연이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는데 저게 뭐라고 이렇게 뿌듯한지 모르겠다.

며칠 내로 우리 딸 이름이 들어간 직캠 영상을 볼 수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하연이가 유튜브에서 떴던 첫 영상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올린 직캠이었다.

그게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걸리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잘은 몰라도 이번 공연을 통해 하연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폭 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지 않아 하연이가 노래를 모두 마쳤고, 관중석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김하연! 김하연! 김하연!”

“노래 좋다아! 진짜 멋졌어!!”

“앵콜! 앵콜! 앵콜!”

나 참. 무슨 개막전 축하공연에서 앵콜을 외치는 사람이 다 있는지.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나는 대기실로 돌아온 하연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하연이의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하연아! 진짜 잘했다! 진짜 진짜 진짜로오!”

“헤헤. 나 자알해떠요오?”

“응! 여기 물부터 마셔. 목마르겠다. 어휴. 빨리 옷 갈아입어야겠구나. 땀이 무슨.”

다행히 여벌 옷은 몇 개 챙겨왔다.

나는 경기장 관계자에게 혹시 근처에 샤워할 수 있는 시설이 없냐고 물었다.

“샤워 시설은 있는데. 그게 남성용이라서요.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전에 워터파크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하연이가 절대로 나와 같이 탈의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던가.

어떡한다. 근처 모텔에라도 들러서 하연이를 씻겨야 할까.

하연이는 결벽증 같은 게 있는지 집에서도 나와 샤워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그 문제로 한창 고민하고 있는데 뒤가 다시 어수선해지는 것 같더니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미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와아! 하연아! 진짜 공연 잘 봤어! 신곡 이름이 달려 인 거야? 정말 그 이름처럼 파워풀하고 힘찬 무대였어!”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는지 별안간 하연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애 땀 좀 봐! 안 되겠다. 하연아. 언니랑 지금 당장 VIP실에 가서 샤워부터 하자. 진형 씨. 하연이 제가 데려가서 샤워시켜도 괜찮죠?”

좀 급작스럽긴 한데 마침 씻을 곳을 찾고 있기도 했고.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두 사람.

정 차장님은 그 사이 경기나 보고 있자며 나를 데리고 VIP 라운지로 이동했다.

VIP 라운지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며 그를 따라갔는데.

잠깐만요. 저 아저씨는 누구시죠?

분명 TV에서 많이 봤던 인물인데.

VIP 라운지 정중앙에 있는 소파에는 한신 그룹의 창업주. 이창돌 회장이 앉아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