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6화
하연이의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장소는 한강에 위치한 선유도로 낙점되었다.
조사해보니까 공간도 넓고, 특이하게 생긴 조형물도 많고 해서 이미 뮤직비디오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꽃샘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었기에 촬영은 빠른 속도로 진행하기로 했다.
선종이 형은 터미네이터가 된 듯 온몸을 감싼 짐벌을 착용하고는 거기에 카메라를 장착한 후 사정없이 움직였다.
앞으로 들이밀었다 뒤로 뺐다, 옆으로 돌았다, 뒤로 돌았다. 보는 사람이 다 정신이 없어지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였다.
“하연아! 지금 표정 좋아! 그렇게만 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종이 형과 대조적으로 하연이는 한 자리에 서서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귀여운 느낌보다는 박력 있달까. 춤 선이 날카롭고 박자에 맞춰 딱딱 끊어지는 게 아이돌의 칼군무를 연상케 한다.
저런 안무를 하연이 혼자서 짰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실제로 출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옆에 있던 상준이도 그저 놀랍다는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하연이가 춤추는 모습을 지켜봤다.
“야. 신상준.”
“어어. 말 시키지 마라.”
“정신 좀 차리고.”
“아 왜?”
녀석. 어찌나 하연이의 춤사위에 빠져들었는지 말을 시키니까 짜증부터 낸다.
“진짜 괜찮아?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쉬어.”
“뭘. 내가 좋아서 온 건데.”
“너 주말에 일해서 대휴 받은 거라며.”
“괜찮아. 안 그래도 뮤직비디오 어떻게 찍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찍는 거였구나.”
하연이 신곡 뮤비 촬영에 대해 세 얼간이에게 알리자 갑자기 상준이가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마침 쉬는 날인데 선유도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놀러 오겠다면서 말이다.
덕분에 상준이 차를 타고 편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저번 뮤직비디오 촬영 때 힘을 보태주었던 유주는 어린이집 근무를 해야 하니 함께 오질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하연이는 어린이집 대신 이곳 선유도에 와서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는 것이었다.
상준이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그런데 왜 굳이 평일 오전에 와서 찍는 거야? 하연이 어린이집도 빼먹고.”
“평일 오후나 주말엔 사람이 많이 몰리잖아. 그러니까 사람 없을 때 후딱 찍고 빠져야지.”
“아. 그렇군. 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처럼 사람들 통제해서 못 들어오게 하고 찍는 줄 알았지.”
“그거야 대형 프로덕션일 때 이야기고.”
통제? 그런 건 제작하는 쪽에서 밑에 사람을 많이 둘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촬영한다고 통행을 막거나 통제하면 괜히 뒷말이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두어 시간이나 되었을까.
선종이 형은 다 됐다며 촬영을 마쳤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각.
새벽같이 일어나서 여기 도착한 게 8시 조금 전이었는데 말이다.
“형.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더 안 찍어도 되겠어요?”
“응. 하연이가 진짜 연습을 많이 했나 봐?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던데?”
“다행이네요. 저번 곡하고는 다르게 자기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나오는 영상이라고 집에서 준비를 많이 했어요.”
“그래. 이번 곡은 뮤비 내내 하연이가 풀로 나오니까. 저번 곡하고는 완전히 다르지.”
하연이의 첫 뮤비였던 ‘원패밀리’는 오브젝트를 통한 상징과 비유 기법을 주로 써서 하연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이번에 찍은 신곡 ‘달려’의 경우 100% 하연이가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만 연출되었다.
게다가 도중 도중 약간의 연기랄까. 쇼맨십이 들어간 부분도 있었고.
그런데 그걸 2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다 끝냈다니.
심지어 실제 촬영 시간은 1시간이 조금 넘었다.
장비 세팅하는 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으니까.
촬영 감독인 선종이 형도 대단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걸 소화해낸 하연이도 참 대단하다.
나는 하연이에게 두꺼운 패딩을 입히고는 집에서 준비한 두부순대를 건넸다.
보온 도시락에 담아오니까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순대에서 올라온 김이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간다.
순대를 본 하연이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벌렸다.
“아~~”
나는 웃으며 하연이 입으로 두부순대를 쏘옥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어이구 내 새끼. 잘도 먹는구나.
내가 하연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사이.
옆에 있던 상준이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튜브에 올린 그 순대 광고 시즌2냐?”
“뭐가?”
“광고로 찍었던 그 영상이랑 지금 하연이 순대 먹여주는 모습이 비슷해서 말이지.”
“됐고, 너도 배고프지? 이것 좀 먹어봐. 진짜 맛있어.”
내가 상준이에게도 두부순대를 권하자 그는 냉큼 순대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천천히 오물거리던 상준이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아래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탈곡기가 움직이는 줄.
“야! 이거 뭔데? 진짜로 맛있는데?”
“맛있으니까 광고를 찍었지.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잖아? 와. 이런 순대는 진짜 처음이다! 식감도, 맛도! 진짜 레알 신세계네, 이거!”
녀석이 두부순대를 폭풍 흡입하려고 하자 나는 녀석의 손을 탁하고 쳤다.
“앗! 왜? 언제는 먹으라며?”
“하연이 줄 건 남기고 먹어, 인마.”
“아앗. 그렇군. 하연아 미안. 삼촌이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 아하하하.”
가볍게 요기를 하고 주변을 정리한 우리는 선종이 형이 데려온 촬영팀과 헤어져 인근의 브런치 카페로 이동했다.
두부순대를 몇 점 주워 먹은 상준이의 허기가 눈을 떴는지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내부 인테리어가 참 인상적인 카페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자 상준이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괜찮지? 우리 집 인근에 있는 카페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중 하나야.”
“그러네. 가게가 아기자기한 게. 인테리어 솜씨가 좋아.”
“맛도 나쁘지 않아. 음식도 괜찮고 커피 맛도 제법이지.”
확실히 상준이가 사는 합정동은 예쁜 카페의 메카랄까. 인테리어도 참신하고 메뉴도 다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 많다.
하연이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살펴본다.
그러다 어느 틈에 가게 여사장님과 친분을 쌓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통창을 배경으로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니 무언가 가족영화를 찍고 있는 느낌조차 든다.
예전의 하연이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나 말고는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의 하연이는 모르는 사람과도 잘 이야기하는 등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내가 계속 혼자 데리고 있었다면 절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지.’
내가 하연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앞에 있던 상준이가 손가락을 튕기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어이. 딸바보는 그쯤 하시고.”
“뭐가. 내가 내 예쁜 딸을 보겠다는데.”
“너 혹시 차 안 필요하냐?”
“차?”
내가 상준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는 품에서 차 열쇠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은색 삼별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스마트키.
나는 스마트키와 상준이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이건 뭐야?”
“뭐긴 뭐야. 차 키지.”
“아니 그러니까 이걸 왜 나 주려는 건데?”
“나 차 새로 바꿀 거거든. 관심 있으면 네가 사라고.”
어휴. 난 또 뭐라고. 이걸 공짜로 준다고 하는 줄 알고 긴장했네.
나는 안도하며 말했다.
“차야 있으면 좋지. 어디 먼 데 갈 때 대중교통 이용하려니까 불편하더라.”
“당연하지, 인마. 게다가 넌 이제 어엿한 사장이잖아. 품위 유지를 위해서라도 차 한 대는 굴려야지.”
“그래서. 얼마에 팔려고?”
“님이 먼저 제시욤. 뿌잉뿌잉”
상준이가 자신의 두 볼에 동전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을 올려 계란을 만들더니 혀를 삐죽 내밀었다.
아하하. 이 녀석 정말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나는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는 말했다.
“장난은 작작 하고.”
“아야야. 폭력은 싫어요! 상주니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한 대 더 맞고 싶다 이 말이지?”
“크크. 농담이야. 농담. 너 때문에 소중한 내 이마가 남아나지 않겠다. 천오백에 사가.”
“천오백만 원?”
“그래. 지금 중고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다. 거저지, 거저.”
나는 상준이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너 혹시 이거 침수차냐?”
“뭐?”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 싸게 파는데?”
“어휴. 이놈은 진짜 싸게 준다고 해도 난리네. 친구니까 싸게 주는 거지! 하기 싫으면 관둬. 그냥 딜러한테 팔면 되니까.”
나는 상준이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렸다.
“상준아. 예전부터 꼭 은색 별이 타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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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밀려있던 외주 작업을 처리한다고 정신이 없다.
나는 기분 전환하는 느낌으로 일하는 틈틈이 순대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었는데 이거 반응이 정말 걸작이었다.
올린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오십만 조회수를 돌파.
덕분에 하연아빠TV의 구독자 수도 5만 명에 육박하는 등 호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해당 영상을 하연이 채널이 아닌 내 채널에 등록했다.
하연이가 등장하지 않는 영상이었으니까. 게다가 순대 제조 과정을 HiYeom하연 채널에 올리기에는 조금 뜬금없다.
아무튼 댓글은 놀랍다는 반응 일색이다.
└ 와...저걸 다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구나. 대단하네
└ 이게 뭐라고 계속 반복해서 보고 있는 거지? 나 순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상한 데서 힐링이 되는 신기한 영상이야
└ 순대 만드는 거 진짜 어려운 일이네. 작업자분들 정말 대단하십니다!!!
└ 순대야. 사랑해 ♡
└ 만들어지는 과정이 완죤 신기하네요. 작업자분들 고생 많으세요!
└ 이런 영상 보면 평소 생각도 없던 음식이 막 먹고 싶어짐 ㅠㅠ
└ 달인이 따로 없네요. 모두 존경스럽습니당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마 여기 하연이 순대 광고 찍은 그 업체 공장인가요? 하연이 아버님의 빅피쳐 인정!
└ 오! 여기가 거기임? 광고 보고 시켜 먹어봤는데 진심 꿀맛이었음.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고 있었구나. 고맙습니다 장인분들!!
후후. 큰 그림은 무슨. 그저 이런 영상을 꼭 한번 찍어보고 싶었다.
공장에서 무언가가 완성품으로 만들어지는 영상은 그 자체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내가 댓글들을 살펴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내며 인기척을 냈다.
“흠흠. 사장님?”
“앗. 김 대리님. 아니다. 김 과장님이구나.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그녀는 이번 주부터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런데 웬 과장이냐고?
내가 그녀의 연차와 경력을 고려하여 과장 직급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나와 김소라 둘뿐이었지만 호칭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사람 기분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과장 달아준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손해 보는 건 전혀 없었다.
김소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베트남 관광청에서 들어온 의뢰보셨어요?”
“베트남 관광청이요?”
“네. 하연이 유튜브 채널 보고 연락이 온 것 같은데, 베트남에서 한 달간 머무르면서 브이로그 형식으로 자녀와 함께 보내는 영상을 찍어줄 수 있느냐는 의뢰요.”
“응? 그런 의뢰가 있었어요?”
나는 서둘러 메일을 확인해보았다.
김소라의 말처럼 베트남 관광청에서 의뢰가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한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