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4화
정성수 차장님의 제안은 이러했다.
하연이가 개막전에 한신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고 현장 축하공연을 펼칠 수 있겠냐는 것.
가능하면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미 공개된 ‘원패밀리’를 부르면 좋은데, 혹시라도 다른 곡이 있으면 그걸로 불러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시구도 같이하나요?”
- 시구요?
“네. 제가 야구를 많이 안 봐서 잘 모르지만, 개막일에 연예인 시구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요.”
- 아. 보통 축하 가수와 시구자는 다르게 진행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 하하. 왜요? 만약 가능하다고 하면 하연이한테 시구시키시려고요?
“에이. 설마요. 하연이가 힘이 없어서 제대로 던지지도 못할 텐데요.”
- 가끔 어린 친구나 장애가 있는 분들이 시구자로 나올 때는 마운드와의 거리를 좁혀서 던지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는 그밖에 애국가를 부르는 이와 축하공연을 하는 가수도 다르게 할 예정이며, 시구는 정치인에게 부탁할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하연이랑 상의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 네. 급한 거 아니니까 이번 주 안으로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럼 좋은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하연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하연이는 재미있을 것 같다며 제안을 받자고 했다.
“아빠아! 나 그거 할래요오! 응?”
“그래? 이건 진짜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춰야 하는데 괜찮겠어?”
“웅! 나아 잘할 쑤우 이써요오!”
역시 우리 하연이는 자신감 빼면 시체다.
관중들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일단 지르고 본다.
그러면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을까나.
정 차장님 말대로 일단 원패밀리를 부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곡이고.
게다가 아직 오프라인에서는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으니까 홍보 효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연아. 현장에서 부를 노래는 원패밀리가 좋겠지?”
“으음. 혹시이 다으른 노래도 부를 수 이써요?”
“다른 노래? 뭐?”
하연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시인고옥!”
“뭐? 신곡이라고?”
아니 원패밀리 발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신곡이란 말인가.
설마 하연이 머릿속에는 새로운 음악이 용천수에서 물이 솟듯 펑펑 생성되는 걸까?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하연이가 내게 말했다.
“그나알 시인고옥 발표오해요!”
그러니까 하연이 말은 이랬다.
정 차장님한테 부탁해서 원패밀리에 이어 신곡까지 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신곡은 개막전에 발표하되 그와 동시에 유튜브에선 뮤직비디오도 함께 공개해서 버즈량을 폭증시키자는 것이었다.
‘이게 4살 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정말 맞아?’
하연이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는 어서 신곡을 완성해야겠다며 자기 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하연아. 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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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정말 좋은 기회를 얻었다.
프로야구 개막전 축하 가수로 초청받다니.
전생에도 몇 번이나 초청받아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봄을 맞아 따사로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초록빛이 찬란한 잔디 위에서 부르는 노래는 실내 무대에서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게다가 한신 타이거스면 나름 과거의 명문구단으로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팀 아닌가.
역사가 오래되고 사연이 많은 팀일수록 진성팬들이 많은 법이었다.
‘이번 기회에 한신 타이거스의 팬들까지 내 팬으로 만들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히 준비가 필요했다.
원패밀리 한 곡만을 부르고 내려오는 것도 물론 나쁜 방법은 아니다.
발표한 지 오래된 것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는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노래니까.
하지만 뭔가 아쉽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공연. 그런 식으로는 별다른 이슈를 만들기 어려울 터다.
고작해야 4살짜리 꼬마가 프로야구 개막전 축하 가수로 나왔다 정도의 온라인 기사 몇 개가 나오겠지.
운이 좋으면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 장면 정도.
그런데 그 자리에서 원패밀리와 함께 신곡을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
그와 동시에 유튜브에는 신곡의 뮤직비디오를 올리고 말이다.
현재 유튜브 외에는 별도의 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원패밀리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고 있었다.
50만을 달성한 뒤로는 조회수가 횡보하고 있었던 것.
이럴 때일수록 신곡을 발표해서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프로야구 개막전 축하공연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좋은 기회야.’
오프라인에서 공연을 직접 본 사람은 물론이고 생방송과 온라인을 통해 여러 가지 버즈가 생산될 테니까.
다행히 전생에 만들어 둔 신곡은 몇 개 더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문제는 안무와 뮤직비디오.
음악과 안무는 별개의 영역으로, 아무리 음악이 좋더라도 안무가 엉성하면 좋은 반응을 이끌기 어려웠다.
‘요즘처럼 비주얼 요소가 중요해진 시대에는 더더욱.’
뮤직비디오는 그러한 비주얼 요소를 최대한 부각해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홍보 수단이었고.
뮤직비디오 제작에 있어서는 박선종이라는 든든한 카드가 있으니 이제 안무에만 집중하면 됐다.
김하연은 신곡의 악보를 쓰는 한편, 이에 맞는 안무를 짜기 위해 노력했다.
신곡 발표를 위해 이렇게 머리를 싸맨 게 얼마 만인지.
김하연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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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자기 방에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것 같더니 하연이는 내게 신곡이 적힌 악보를 들이밀었다.
“..하연아.”
“응!”
“너, 악보도 그릴 줄 알아?”
“어리니딥에서 배웠떠요!”
대체 하연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선 뭘 가르치는 걸까.
무언가 엄청난 선행학습을 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될 수준이다.
하지만 음악에 까막눈인 나는 하연이가 건넨 악보를 봐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하연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응? 선종이 아저씨한테 뮤직비디오 제작 의뢰하라구?”
“네에! 하여니는 예쁘은 뮤비가아 피료해에!”
개막전까지는 이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물론 그사이에 뮤직비디오를 만들라면야 충분히 만들 수 있지만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순 없었다.
나는 일단 선종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는 냉큼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할게! 그거 내가 한다고!!”
“네?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 이번에는 백만 넘는 영상 찍어봐야지!”
허허. 선종이 형도 참.
하연이도 그렇고 선종이 형도 저렇게 신곡에 불타오르고 있는데 아빠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럼 대략적인 기획이랑 장소 섭외 같은 건 제가 진행할게요. 편집 도와드릴 일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그래. 저번엔 실내 스튜디오에서 찍었으니까 이번에는 야외에서 찍으면 어떨까 싶은데?”
“야외요? 지금 겨울이라 춥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준비 철저히 해서 후다닥 찍어야지. 그런데 곡은 이미 하연이가 만들어뒀다고 그랬지?”
“네. 놀랍게도.”
“크크. 진짜 보면 볼수록 놀라운 친구야. 하연이는 새로운 노래들이 마구 샘솟나 봐?”
그러게. 그 점은 나도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노래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건가 싶기도 하고.
‘요즘 한국 음악계가 표절 사태로 시끄러운데 말이지. 설마 하연이도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4살짜리 꼬마가 그렇게 술술 신곡을 만들어 낸다는 게 의아했다.
나는 하연이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연아.”
“네에.”
“혹시 말이야. 원패밀리도 그렇고 이번에 하연이가 새로 만든 노래 있잖아.”
“웅.”
“아빠가 혹시나 싶어서 말이야. 요즘 표절 논란이 무척 심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거 어디 다른 데서 듣고 따라 부르는 건 아니지?”
하연이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 저언부우 하여니가 만드러써요.”
“그렇지? 미안. 아빠는 혹시나 싶어서.”
“괜차나요오.”
대인배도 이런 대인배가 없다.
기분이 상할 수도 있을 텐데 씨익 웃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는 하연이를 봐라.
아 참 내 정신 좀 봐.
지금 선종이 형이랑 통화 중이었지?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대고는 외쳤다.
“선종이 형?”
“야. 너 방금 나랑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 까먹었지?”
“아하하.”
“짜식. 웃고 넘어가기는. 하연이가 귀여워서 봐준다.”
“미안해요.”
“아냐. 본의 아니게 하연이랑 대화하는 거 엿들었는데 그러니까 표절은 절대 아니라 이거지?”
“네. 그런 것 같네요.”
“좋았으. 그럼 곡도 있겠다. 이걸 어떻게 하면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지 궁리해봐야겠네. 그런데 진형아.”
“네, 형.”
“하연이한테 물어봐봐. 혹시 안무 같은 거 짜둔 게 있는지.”
“아. 그건 지금 한참 하연이가 짜는 중이에요.”
“그래? 오케이. 그럼 안무 다 짜면 그거 촬영해서 나한테 보내줘. 참고해서 기획하게.”
하연이가 노래를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안무를 어떻게 짜는 지는 조금 이해가 된다.
입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거기에 적합할 것 같은 동작을 몇 개 만들고는 그중 가장 어울리는 동작을 채택. 이어서 그다음 안무를 짜기 시작한다.
블록을 쌓아 올리는 느낌이랄까.
그나저나 안무 짜는데 집중했는지 하연이는 지금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든 상태다.
곁에서 내가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이 동작, 저 동작을 반복해서 춰본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고는 그 모습을 촬영하게 된다. 얼굴에는 잔뜩 아빠 미소를 짓고선.
후후. 이거 나중에 신곡 뮤비 발표된 뒤에 비하인드 스토리? 뭐 그런 식으로 올리면 꽤나 반응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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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주면 어린이집 새 학기가 시작된다.
하연이는 사랑반에서 행복반으로 한 단계 진급할 예정.
하연이가 다시 등원하게 되면 평일에 시간을 빼기 어려울 것 같아서 나는 그전에 순대 홀릭을 찾아가기로 했다.
다행히 순대 홀릭 공장은 경기도 이천에 있어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천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순대 홀릭이 위치한 공장에 도착하니 최철상 대표님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마중 나왔다.
“어서 오세요! 제가 순대 홀릭 최철상 대표입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김진형입니다. 이쪽이..”
“하연이죠? 영상에서 보던 것과 똑같이 생겼네요. 정말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하하.”
그는 하연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방으로 이동한 나는 우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순대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연이랑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뭘요. 저야말로 그렇게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려주신 영상 덕분에 저희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가 순대 만드는 제조 과정을 찍을 수 있냐고 묻자 그가 흔쾌히 동의했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다 생각이 있으시니 부탁하시는 거겠죠. 얼마든지 찍어가세요. 공장에는 제가 말해둘 테니.”
“감사합니다.”
음식이든 공산품이든. 물건의 제조 과정은 의외로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 중 하나였다.
별 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클릭하고 나면 빠져든달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기 위해 오랜 시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순대 제조 과정은 유튜브에도 잘 없는 희귀 장면이잖아. 잘만 하면 대박을 터트릴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철상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말이죠.”
“말씀하세요 대표님.”
“제가 처음에 제안드렸던 그. 하연이를 모델로 하고 싶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네.”
“그거 어떻게 안 될까요? 하하. 그 생각은 진작에 접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또 욕심이 나네요.”
하연이를 순대 모델로 한다라.
나쁘지 않다.
게다가 순대 홀릭 순대는 진심 꿀맛이기도 하고.
하연이의 의사를 물어보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하연이가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 하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