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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53화 (53/135)

내 딸은 국힙원탑 53화

이세미는 이창돌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작은 화면 안에서는 어린아이가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빠르게 교차하는 영상이 어지러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게 뭔데?”

“제가 추천한 가수의 뮤직비디오요.”

“그래? 애비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이창돌이 인상을 찌푸리자 이세미는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물었다.

“가수 목소리는 어떠세요?”

“목소리라. 무척 어린 것 같은데? 살짝 발음이 뭉개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이렇게 부르는 게냐?”

“설마요. 실제로 이 친구 나이가 무척 어리거든요.”

“몇 살인데?”

“4살이요.”

“뭐? 4살?”

이창돌은 장난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세미를 바라보았다.

“4살이 무슨 노래를 한단 말이냐. 거기에 뮤직비디오까지 찍고. 내가 아무리 가요계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런 걸로 놀리는 거 아니다, 욘석.”

“정말이에요, 아빠. 못 믿으시겠으면 이것도 보세요.”

그녀는 이창돌의 손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을 가로채더니 무언가 조작하고는 다시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말한 친구가 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서 화제를 모았다는 기사예요.”

“흐음.”

이창돌은 끝까지 기사를 읽고는 이세미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엄마 없이 자란 미혼부의 자식에 올해 4살의 신동이라. 확실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긴 하다만 아직 대중적으로 유명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네. 아빠 말처럼 아직 아주 유명한 친구는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친구죠. 제가 장담하건대 분명 이하연을 뛰어넘은 국민가수가 될 거예요.”

“이하연이라면 몇 년 전에 자살한 연예인 아니더냐?”

이세미가 슬픈 얼굴을 하고선 답했다.

“네. 그녀가 아니었으면 유학 생활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아무튼 너는 이 친구가 올해 개막전 축하공연에 오르면 좋겠다, 이 말이지?”

“네! 분명 큰 화제가 될 거예요. 한신 그룹은 어디서 저런 귀요미 뉴페이스를 구해왔냐며 온라인이 떠들썩해지겠죠!”

“귀요미? 뉴페이스? 무슨 말을 하는 겐지. 아무튼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정말요?”

“그래. 우리 막내딸 부탁인데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허허.”

“와! 감사합니다, 아빠!!”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창돌에게 달려들어 그를 와락 안고서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이창돌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미야. 회사 일은 할 만하니?”

“네. 학교에서 공부만 하다가 직접 현장에 오니까 느끼는 게 많아요. 주변에서도 많이 도와주고 계시고요.”

“그래. 그래야겠지. 정성수인가 하는 그 친구는 어떻더냐? 쓸만하더냐?”

이세미는 이창돌에게서 떨어져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주 뛰어난 인재더라고요!”

“뛰어난 인재라. 네가 봐도 그렇단 게지?”

“네. 일 잘하지, 책임감 있지.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났어요.”

“후후. 평판이 좋더구나. 따르는 사람도 많고.”

“혹시 아빠 그거 아세요?”

“무얼?”

이창돌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세미를 바라본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 차장님 꿈이 한신 그룹 사장인 거?”

“뭐?”

“인터넷에서 쓰는 아이디가 내 꿈은 한신 사장이지 뭐예요. 글쎄.”

“푸하하하. 그래? 진짜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아니지. 사내 녀석이라면 그 정도 배짱과 포부는 있어야지. 암.”

두 사람은 한동안 정성수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가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대화를 멈췄다.

“회장님. 첫째 도련님께서 유정건설 M&A 건으로 긴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태하가? 알았다. 잠시 기다리라고 해.”

“네, 회장님.”

그는 순식간에 따뜻한 아빠의 얼굴에서 차가운 기업가의 얼굴로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이세미에게 조언하듯 말했다.

“세미야.”

“네, 아빠.”

“이 자리에 앉고 싶으냐?”

이세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려고 미국에서 고생한 거잖아요.”

이창돌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답했다.

“후후. 그럼 무슨 일을 하든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게다.”

“물론이죠.”

“네가 말한 한신 타이거스 개막전 축하공연도 마찬가지야. 지금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하도록 해. 보는 눈이 많을 테니.”

“네,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힘든 거 있으면 정 차장과 잘 의논해보고. 그놈이 네 옆에 붙어있으니 그래도 안심이 되는구나.”

“열심히 할게요.”

“알았다. 이만 나가보거라. 네 오빠 들어오라고 하고.”

회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큰오빠, 이태하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빠. 아빠가 들어오래.”

“응? 세미 네가 이 시각에 여기 왜 있어?”

눈앞의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긴 왜야. 아빠랑 이야기 좀 했지.”

“아버지랑? 뭐 됐다. 너 요즘 미전실에서 일하고 있다며? 일은 할 만해?”

“그럭저럭. 평사원으로 입사했는데 다들 상전 모시듯 대하니까 조금 불편한 거 빼면 일은 할 만해.”

“크크.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사원으로 입사한 건지. 임원급으로 들어갔으면 너도 편하고 주변도 편하잖아.”

“갓 대학 나왔는데 임원급은 오버지. 이것저것 배우고 있어.”

“하여간 이상한 녀석. 어디 불편한 거 있으면 나나 지하에게 이야기하고.”

“응. 그럼 나 먼저 간다. 좋은 하루 보내.”

그녀는 싱긋 웃고선 이태하를 뒤로한 채 문을 열었다.

- 쿵

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마치 조금 전 그녀의 아비인 이창돌 회장이 보여준 것과 같은 빠른 표정 변화.

‘흥. 지금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로 여기겠지만 두고 보라지. 조만간 내 존재를 불편하게 여길 순간이 올 테니.’

그런 점에서 한신 타이거스 개막전 축하공연은 자신이 한신 그룹에 들어온 뒤 준비하고 있는 첫 대형 프로젝트였다.

출발이 좋아야 마무리도 좋다지 않나.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 또각또각

그녀가 발을 내밀 때마다 자신감 넘치는 하이힐 소리가 복도 가득 울렸다.

#

김하연은 생각했다.

‘내가 죽기 직전 스위스 은행에 돈을 넣었다는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입금 역시 한 번에 이뤄진 게 아니라 중간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임시 계좌에 넣었다가 이곳을 거쳐 스위스 은행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아니면 자신의 주은행 계좌 정보를 알고 있던 전생의 아비가 멋대로 추측한 걸지도 모른다.

‘큰 금액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 떠나서 정말 내 돈에 대한 집착은 어지간한 인간이다.

자식이 죽었음에도 마치 자식 돈이 자기 돈인 양 눈이 뻘게져서 찾으려고 안달이라니.

그녀는 그를 떠올리며 이를 갈다가 문득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스위스 계좌로 돈을 옮긴 건 잘한 일이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유언장을 멋대로 위조해서라도 내가 번 돈을 모두 차지하려고 했을 테니까.

자살을 결심하고 며칠 뒤.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날 거라면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아비에게 복수 비슷한 거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내가 남긴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길 원치 않았으니까.

스위스 은행에 비밀계좌를 개설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스위스 은행에 연락해서 자신의 계좌를 알려주었더니 충분한 재력이 인정된다면서 은행 직원이 직접 한국에 방문해주었다.

내가 직접 스위스에 가지 않고서도 알아서 찾아오는 서비스.

스위스 은행 직원은 이것저것 내게 묻더니 왜 굳이 스위스 은행에 비밀계좌를 개설하냐고 물어보았다.

개설 목적은 무척이나 중요한 항목이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스위스 은행 측에서 계좌 개설을 거부할 수도 있다면서.

“주변에 제 돈을 탐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불법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네. 저 이곳에선 나름 유명한 가수거든요.”

“알겠습니다. 저희 은행에 맡기시면 돈이 어디로 사라질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말이죠.”

“말씀하세요.”

“..제가 죽으면. 다른 누군가가 제 돈을 빼갈 수 있나요?”

상대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저었다.

“원칙적으로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모르면 그 누구도 돈을 빼갈 수 없습니다. 그건 예금주 본인도 마찬가지죠. 절대 번호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원칙적이라는 말은 예외도 있다는 뜻인가요?”

“네. 예금주가 갑자기 사망했을 경우에는 상속권자에게 돈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단서를 달았다.

“대신 상속권자에게는 스위스 은행에 돈이 있다는 걸 증명할 단서가 필요합니다. 이런 내용이 적힌 유언장이나 편지 같은 것들 말이죠.”

“만약 그걸 위조한다면요?”

“하하. 저희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스위스 은행의 명성이 이토록 오랜 기간 이어지진 못했겠죠.”

“그렇겠죠?”

“네. 철저하게 필적 감정을 진행합니다. 평소 상속권자와의 관계 같은 것도 조사하고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비밀계좌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중간 통로로 거칠 가상 계좌에 넣은 뒤 스위스 계좌로 옮겼다.

‘그러니까. 당신이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쉽게 그 돈을 찾을 순 없을 거야.’

김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다시 태어나서도 자기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남자였다.

#

오늘따라 하연이가 이상했다.

분명 친구들과 함께한 글램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혼자서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는 벌써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저러고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하연이 기분도 달래줄 겸 하연이가 좋아하는 순대를 찔 계획을 세웠다.

냉동고 문을 열었더니 순대로 가득 차 있다. 순대 홀릭 대표님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추가로 3박스를 더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찾아뵙고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다.

그 참에 순대 공장도 방문해서 순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촬영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고.

나는 촉촉하게 찐 순대를 접시에 담아 하연이 앞에 내놓았다.

“짠! 우리 하연이 좋아하는 순대 대령이오!”

“으응?”

“하연이 기분이 영 안 좋은 것 같아서 아빠가 준비해봤지. 어때? 먹음직스럽지?”

하연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역시 타고난 순대 덕후.

하연이랑 맛있게 순대를 먹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정성수 차장님이었다.

‘응? 정 차장님이 무슨 일이지? 기부 건은 다 끝난 거 아니었나?’

나는 전화를 받고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 차장님.”

- 오랜만입니다, 진형 씨. 별일 없으시죠?

“네. 저야 뭐. 정 차장님도 안녕하시죠?”

- 네 덕분에요.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하연이 어린이집 봄방학이라 집에서 둘이 같이 있어요.”

- 오호라. 봄방학이군요. 그런데 혹시 진형 씨나 하연이는 야구 좋아하십니까?

야구? 갑자기 웬 야구?

사실 야구를 안 본 건 꽤 되었다.

어린 시절 응원하는 팀이 패배를 밥 먹듯이 했으니까.

한때는 막강한 왕조를 구축했다고 하던데 자신이 어린 시절에도 이미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진 못했다.

사람에겐 인내심의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축구로 넘어온 게 이제 10년이 넘었다.

“하하. 굳이 물어보신다면 야구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합니다.”

- 이런. 그러시군요. 그럼 하연이는요?

“음. 제가 따로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를 거예요.”

- 그렇군요. 그럼 조금 애매하긴 한데. 혹시 하연이가 한신 타이거스 개막전 축하공연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한신 타이거스 개막전 축하공연에 하연이가 출연한다고?

조금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어린 시절 짧게나마 응원하던 팀이 바로 그 한신 타이거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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