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2화
상준이가 나와 하연이를 내려주며 말했다.
“즐거운 여행 돼라.”
“그래. 너희도.”
내가 주말을 이용해서 춘천에 간다고 하자 상준이도 마침 재희 씨와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며, 우리를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었다.
재희 씨는 하연이의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연아. 아빠 말씀 잘 듣고, 즐겁게 지내렴.”
“네에!”
그러더니 하연이 손에 5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쥐여준다.
“앗! 재희 씨. 괜찮아요!”
“아네요. 여행왔으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이건 이모가 주는 용돈이니까 편히 써.”
하연이가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5만 원을 자신의 주머니로 호다닥 집어넣는다.
어찌나 잽싸던지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말이다.
두 사람과 헤어져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니 소윤이 엄마가 우릴 반겼다.
“아니 하연이 아버님!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해오셨어요?”
“별거 아니에요. 애들 먹을 과자랑 과일. 그리고 어른이 먹을 음식 좀 사 왔어요.”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글램핑이라는 건 텐트는 물론이고 기타 장비가 모두 준비된 곳이라 몸만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 준비할 수 있는 건 먹을 것 정도.
그녀는 우리를 3호 텐트로 들어가면 된다고 말했다.
“옆에 2호가 저희 텐트고요. 1호는 주하네 텐트에요.”
“주하네는 아직 도착 안 했나요?”
“아. 강원도 온 김에 좀 둘러보고 5시쯤 도착한대요.”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소윤이를 데리고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윤이 아빠 신상윤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하연이 아빠 김진형입니다.”
“소윤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연이가 어린이집에서 스타라죠? 하하.”
스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래도 엄청 잘하고, 춤도 잘 춘다고 소윤이가 맨날 집에 오면 하연이 얘기만 해요.”
“아 네. 소윤이랑 하연이랑 많이 친하다고 들었어요. 둘이 잘 놀아주니까 저야 고맙죠, 뭐.”
“어이쿠. 짐이 많으시네요. 일단 텐트에 들어가서 좀 쉬시다가 이따 많이 이야기 나누시죠.”
그는 내게 손목을 꺾으며 술을 마시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후후. 캠핑에서 술을 빼놓을 순 없지. 뭘 좀 아는 사람이다.
소윤이네와 헤어져 바비큐 장비가 설치된 공간을 지나 텐트 안으로 들어오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
전기장판 위에 프레임 없는 커다란 매트리스 2개가 나란히 붙어있고, 간이 싱크대에 냉장고.
심지어 개별 화장실까지 마련되어 있다.
게다가 여기 왜 이렇게 따뜻해?
살펴보니까 바닥에 난방도 들어오고, 온풍기도 설치되어 있다.
“이건 뭐 텐트가 아니라 거의 펜션 수준인데.”
저절로 혀가 내밀어진다.
하연이도 여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뛰어다닌다.
“와아! 텐트으! 텐트으!!”
그렇게나 좋을까.
잘 온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짐을 푼 나는 하연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캠핑 의자에 앉았다.
텐트 앞으로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갑자기 하연이가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간다.
“어? 하연아! 어디 가!”
녀석의 뒤를 쫓아갔더니 하연이가 나무 사이에 낮게 걸린 해먹을 가리키며 나를 쳐다본다.
“왜? 여기 올려달라고?”
“웅!”
나는 하연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린 뒤 해먹 위로 올려다 주었다.
하연이는 춥지도 않은지 해먹을 그네 삼아 흔들흔들 몸을 흔든다.
“하연아. 재밌어?”
“네에!”
“그럼 아빠랑 같이 누워 볼까?”
하연이가 그게 가능하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그녀를 위로 안고는 함께 해먹에 누웠다.
“끼야아!”
“흐흐. 재밌지?”
하연이를 내 배에 올리고는 몸을 좌우로 세게 흔든다.
하연이는 무서운지 내 손을 꼭 붙잡는다.
“무, 무서어어!! 내려줘어어!”
하지만 장난기가 발동된 나는 더욱 힘차게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언제 왔는지 소윤이가 부러운 눈빛으로 나와 하연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응? 소윤이 왔니?”
“...”
“왜? 소윤이도 여기 타고 싶어?”
나는 하연이와 함께 해먹에서 내려와 소윤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소윤이는 우두커니 서서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오 아저씨이라앙.”
오호라. 그러니까 지금 하연이한테 한 걸 너한테도 해달라는 거지?
나는 웃으며 소윤이를 잡고 내 배 위에 올린 뒤 해먹에 누웠다.
“에헤헤. 재미써어!”
소윤이와 신나게 해먹으로 그네를 타는데 하연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마치 소윤이랑은 그만 놀고 어서 자기랑 놀아달라는 것처럼.
“뭐야. 김하연. 너 무섭다고 그랬잖아?”
“나도오! 나도오!!”
하연이가 때때로 어른스러울 때가 있지만 역시 애는 애다.
맨날 답답한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만 하다가 이렇게 탁 트인 야외에 나와 애들하고 함께 노니까 나도 신이 난다.
‘다음엔 캠핑 장비를 마련해서 하연이랑 둘이 놀러 다녀야겠다.’
어느새 산봉우리 위로 해가 걸치더니 노을이 짙어진다.
#
지글지글.
뜨거운 불판 위로 삼겹살과 목살. 그리고 등을 구부린 새우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텐트 안에 들어가 자기네들끼리 놀고,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수다 삼매경.
다들 한 손에는 캔맥주가 한 캔씩 쥐어져 있고, 다른 손에는 어서 고기를 내달라는 듯 젓가락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나는 다 구워진 고기와 새우를 접시에 담고는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자! 다 되었습니다!”
“와아!!”
“얘들아! 나와서 고기 먹어! 새우도 있어!”
소윤이 아빠가 소리치자 텐트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나온다.
“소윤아. 추우니까 패딩 점퍼 입고 나와.”
“그래. 하연이 너도. 감기 걸린다.”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다시 쪼르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두꺼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안에서 먹을 때와 야외에서 먹을 때는 이상하게 맛이 달랐다.
요리를 한 사람도 동일하고, 재료도 동일하고, 모든 게 다 똑같은데 왜 밖에서 먹으면 더 맛이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모두 즐겁게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윤이 아빠가 내 옆자리로 오더니 캔맥주를 들이민다.
“고기 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소윤이네랑 주하네 아니었으면 이런 곳이 있는 줄은 평생 모르고 살 뻔했네요.”
“하하. 저도 소윤이 태어나고 나서야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어요. 예전 같았으면 뭐하러 그 돈 주고 이런 곳 가냐고 했을 텐데. 애가 있으니까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더라고요.”
그러게. 애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비교하면 사고방식이 180도 바뀌게 되더라. 뭘 하든 아이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니까.
이번에는 주하 아빠까지 옆으로 와서는 입을 열었다.
“주하가 하연이 이야기를 많이 해요. 자기 반에 정말 멋진 친구가 있다면서.”
“그래요?”
“그리고 저도 하연이 팬입니다.”
“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를 실행하더니 HiYeom하연 채널을 내게 보여주었다.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하연이는 무슨 아이돌 같던데요?”
“이런. 고맙습니다. 어린이집에는 따로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구독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 원래는 HiYeom하연 채널은 제가 따로 보고 있던 채널이었어요.”
주하 아빠는 평소 키즈 채널을 자주 보는데 그중에서도 HiYeom하연을 즐겨보고 있었다며 하연이가 주하의 어린이집 친구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컴퓨터 앞에서 혼자 하연이 영상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하가 뛰어오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뭐라고요?”
“어! 이거 우리 반 하연이라고. 그래서 알게 됐죠.”
그러니까 주하의 어린이집 친구라서 보는 게 아니라 원래 HiYeom하연 채널의 구독자였던 것.
“세상 참 좁네요.”
“그러게요. 유튜버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뉴스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유튜버를 하는 사람은 하연이가 처음이었어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동안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볼 뿐 말이 없던 소윤이 아빠가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아! 이거 진짜 하연이 맞나요?”
“아 네.”
“진짜 대단하네요. 구독자 수도 엄청 많은데요? 13만 명?”
“하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10만 명 넘으면 실버 버튼인가도 받잖아요?”
생각해보니까 10만 명 넘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아직 실버 버튼은 받지 못했다.
실버 버튼은 유튜버를 전업으로 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종의 분기점 역할을 했다.
적어도 실버 버튼은 달아야지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했으니까.
물론 나는 따로 영상 제작을 메인으로 하고 있으니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속도면 하연이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는 의미.
‘조만간 채널 인증마크도 신청해야겠네. 없는 것보다는 더 신뢰가 생기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엄마들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하연이 정말 대단해요. 유튜브에서도 인기가 많고!”
“저는 오늘 이거 처음 보는데 장난 아닌데요? 무슨 이하연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 같아요.”
다들 하연이를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정신없이 고기를 먹고 있는 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조금 걱정이 돼요.”
“네? 걱정이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나를 주시한다.
“소윤이랑 주하는 평범하게 자라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하연이는 어릴 때부터 너무 남과 다른 길을 걷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에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재능이 있으니까 이렇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거죠.”
“주하 아버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소윤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어도 소윤이는 음치에 몸치라. 하하. 하고 싶어도 못해요.”
소윤이가 아빠를 째려본다.
소윤이 엄마가 그런 소윤이를 끌어안더니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요즘은 의사나 변호사보다 유튜버가 아이들의 장래희망 1순위라고 하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하연이는 정말 잘하고 있는 거죠.”
“제 생각도 그래요. 평범하다는 게 딱 어떤 기준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각자 자기 개성을 살려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무언가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헤헤. 물론 그냥 제 생각이지만요.”
주하 엄마가 배시시 웃으며 시원하게 캔맥주를 들이켠다.
고마운 사람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하연이는 친구 없이 저랑만 지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친구들 만나고 함께 어울리는 모습 보면서.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래요.”
“다 그렇죠 뭐. 아내 통해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소윤이 아빠가 아이들을 슬쩍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혼자서 이렇게나 하연이를 잘 키우셨으니까. 앞으론 더 좋은 일들만 생길 거예요.”
모두 그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주하 아빠가 건배를 제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건배합시다. 하연이와 하연이 아빠의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이후 우리는 밤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늘 위로 참 많은 별들이 보였는데, 하연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별또옹벼리다아!!”
“응? 어디 어디?”
하연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까 정말로 별똥별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아아아!!”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각각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손을 맞잡고 소원을 비는 사람.
두 눈을 반짝이며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그 모습을 어떻게든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사람 등등.
나는 어느 쪽이었냐고?
나는 소원을 비는 쪽이었다.
그래. 하연이와 나의 행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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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미는 이창돌 회장의 막내딸이자 가장 늦게 그룹 경영에 참가한 후발주자였지만 야망만큼은 누구보다도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신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노렸다.
오랜만에 자신의 아비인 이창돌 회장과 독대한 그녀는 그룹의 에이스, 정성수 차장과 심도 있게 논의한 의제를 하나 꺼냈다.
“아빠.”
“그래. 우리 딸. 뭐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느냐?”
“아빠 야구 좋아하시잖아요?”
“야구? 그렇지. 그건 갑자기 왜?”
이창돌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세미를 바라보았다.
모기업인 한신 그룹은 한신 타이거스에 엄청난 금액을 쏟아붓고 있었지만, 한신 타이거스는 매년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신 타이거스는 이창돌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올해 개막전 축하공연에 제가 추천하는 친구를 올리면 어떨까요?”
“개막전 축하공연? 하긴. 이제 2월이니까 개막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네. 제가 좋아하는 친군데, 노래를 정말 잘 부르거든요. 선수들한테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팬들한테도 좋은 선물이 될 거고요.”
“그래? 그게 누군데?”
됐다! 아빠가 자신이 제시한 떡밥을 물었다.
이세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