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1화
“기부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후원하고자 하시는 연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미혼부라서요. 어제 공중파에서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이곳에서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분이 나오더라고요.”
“아! 덕환 씨?”
“맞아요. 그분 사연이 너무 딱해서 그만.”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죠. 그래도 아이를 키우고자 하시는 마음이 강해서 덕환 씨도 호민이도 힘을 내서 잘 살아가고 있어요.”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방송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강한 분이셨어요.”
“혹시 자녀분은 성별과 나이가?”
“여자아이고 올해 4살입니다.”
“그러셨군요. 두 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그녀는 갑자기 두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하더니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다.
마더 테레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눈앞에 있다면 딱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녀는 <아이에게 사랑을>이란 단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 다음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여기에 기본적인 인적 사항이랑 매달 얼마씩 기부하실지 적어주시면 됩니다.”
“혹시 첫 달은 조금 많이 내고, 이후 정기 후원은 다른 금액으로 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처음은 이세미가 보내준 후원금의 절반인 500만 원을 낼 생각이다.
하연이랑도 이미 말을 맞춰두었다.
이후부터는 매달 100만 원씩 후원을 진행할 생각.
‘10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열심히 벌면 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겠지.’
나는 운이 좋아서 일이 잘 풀렸지만, 대다수의 경우 갑자기 혼자 아이를 키울 테니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터.
내가 잘 풀렸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사정을 겪고 있는 이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나는 양손에 힘을 주고는 그녀가 건넨 서류를 작성했다.
그녀는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집이 신림동이시네요. 이곳이랑은 제법 거리가 있는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뭘요. 저랑 하연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후후.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신 듯한데 정말 멋진 분이네요.”
그녀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내가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 작성한 서류를 내미니 그녀가 묻는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하연이랑 놀러 오세요. 가끔 미혼부, 미혼모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조촐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진형 씨랑 하연이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네요.”
“네. 시간이 되면 꼭 방문할게요.”
그녀는 성당을 나가려는 내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시 애 엄마랑은 연락이?”
나는 뒤를 돌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짓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하는 일 중에 아이의 생모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반드시 찾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신청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이의 생모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라.
그녀를 찾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오히려 더 피곤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하연이도 언젠가는 커서 성인이 될 거야.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정도는 알아야 좋을 테지.’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생모 찾기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렸다.
수녀님은 생모를 찾을 확률은 10%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고 강조했다.
“보통은 생모를 찾아도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며 아이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이 대다수예요.”
“그런가요?”
“네. 자신도 본인의 잘못을 잘 알고 있는 거죠. 지금까지 외면했는데 무슨 낯으로 아이 얼굴을 보냐며.”
“그러면 이런 프로그램은 어쩌다가 기획하게 된 건가요?”
그녀는 슬픈 미소를 띠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아이를 낳아준 부모니까요. 인간이란 자기 뿌리에 대해 늘 궁금증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당을 나왔다.
그녀의 말처럼 어린 시절 외국에 입양된 아이들이 부모를 찾으려고 다시 한국에 오는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외국에서 편하게 살면 되는데 왜 굳이 한국에 돌아오냐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뿌리를 찾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던가.
그러니 적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터.
‘하연이가 다시 엄마한테 가겠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연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나는 가만히 성당을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
심태열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다 떠나도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비디오쉐어를 만든 김소라가 회사를 그만두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김 대리. 아니 소라 씨. 다시 한번 생각해봐. 내가 다음 달부터는 월급 2배로 올려줄게. 응?”
“아네요, 사장님. 저는 지금 월급 때문에 회사를 옮기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어? 여태까지 나랑 잘 지냈잖아? 내가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그녀는 뻔히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알면서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고선.
“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지만 진형 씨 나간 뒤에 회사가 엉망이 되었어요.”
“하. 그 얘긴 이미 끝난 문제잖아. 또 왜 그래?”
“아뇨. 지금 회사가 이렇게 휘청거리는 건 그렇게 일 잘하고 성실한 친구를 내보낸 사장님 잘못이 커요.”
“그래서 나도 반성했잖아. 응?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건 저한테 하신 말씀이지 진형 씨한테 한 게 아니잖아요.”
김소라의 뼈 때리는 말에 심태열의 가슴이 뜨끔거린다.
“그럼 내가 당장 김진형한테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되는 거야? 그럼 마음을 돌릴 거야?”
“아뇨. 안타깝지만 이미 기간이 지난 것 같네요.”
“아 진짜! 김 대리! 나한테 왜 이래? 자기 없으면 난 어쩌라고?”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이번 달까지만 다니고 그만두겠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심태열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조용히 물었다.
“어디 갈 곳은 정했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고요.”
“거봐. 아직 정해진 게 아니면 정해질 때까지만 더 다녀보자. 응? 그사이에 생각이 달라질 수 있잖아.”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자신은 정말 구질구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김소라가 없다면 회사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으니까.
현재 그녀는 본업인 AE 직무뿐만 아니라 촬영과 편집. 거기에 경비 처리 같은 잡다한 회계 업무까지 모두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회사를 떠나게 된다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가 하락세를 겪고 있는데 그녀까지 빠지게 된다면 정말 위험하다.’
심태열은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3배! 3배 더 올려줄게. 아니다. 지분이 필요해? 그럼 당장 서류 써줄게. 어때?”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심태열 사장님. 그럼 저는 이만 일이 많아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 볼게요.”
그녀가 일어섰고 카페엔 심태열 혼자만이 남았다.
공교롭게도 몇 년 전.
자신이 김진형에게 나가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맞아. 그때부터 회사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지.’
김진형이 일 처리 속도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존재감이 큰 사람인 줄은 몰랐다.
혼자서 5인분 몫을 하던 사람이 빠지니까 다들 업무에 부하가 걸리면서 버거워했고, 베테랑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빠르게 신입을 받았지만, 그들은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비디오쉐어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동안 쌓인 인맥과 평판을 총동원해 대기업인 한신 그룹과 영상 제작 계약을 맺을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조차도 버거울 정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김진형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
“심 사장님. 정말 왜 이러세요. 부끄러우니까 당장 일어나세요. 네?”
“아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줄 수 없을까?”
“아니 그러니까 용서한다고 했잖아요. 제발 일어나세요. 사람들 쳐다보잖아요!”
느닷없이 심태열에게 전화가 오더니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
그런데 사람들 다 보는 카페에서 내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건 뭐란 말인가.
심태열은 비굴한 얼굴로 일어서서는 자리에 앉았다.
“정말 나를 용서해주는 거지?”
“네네. 사장님답지 않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정말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고.”
용서를 참 빨리도 구한다.
그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이내 나를 보자고 한 진짜 속내를 꺼내놓았다.
“혹시 말이야.”
“네.”
“잠깐만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네?”
“진형 씨 나간 뒤로 우리가 좀 많이 힘들어. 정말 진형 씨가 얼마나 일 잘하는 인재였는지 새삼 느끼고 있어.”
“...”
“그래도 나름 우리가 이 업계에선 유명하잖아? 그래서 한신 그룹 영상 제작도 도맡아서 하고 있고.”
“들었습니다.”
“그래그래. 나도 이야기 들었어. 한신 그룹이랑 인연이 있어서 노인정에 기부도 했다지? 정말 대단해.”
“그래서 제가 뭘 도와줬으면 하시는 걸까요?”
그는 절박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딱 3개월만. 3개월만 우리 일을 도와줄 수 없을까? 직원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프리랜서도 괜찮으니까 우리 잠시만 같이 일하자. 아니다. 동업자란 표현이 더 좋겠네! 지분에 관심 있으면 말만 해! 응?”
이 양반이 왜 이렇게 비굴해졌지?
혹시 김 대리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해서 이러는 걸까.
나는 슬쩍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번에 보니까 AE였던 김 대리가 촬영을 왔더라고요.”
“맞아. 지금 회사 사정이 좀 안 좋거든.”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내가 반박하자 그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정말 힘들어서 그랬다니까. 남아있는 인력이 얼마 없어! 제대로 촬영할 줄 아는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AE가 촬영은 아니죠.”
“하아. 그래서 이렇게 진형 씨한테 부탁하는 거 아냐.”
“혹시 김 대리님도 회사 그만두나요?”
“어? 그걸 진형 씨가 어떻게?”
역시.
김 대리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나오니 당장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을 찾겠다고 나선 게 나였던 것 같다.
진짜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여기서 굳이 김소라가 내게 온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AE가 현장에 촬영하러 나왔으면 말 다 했죠. 사장님 같으면 계속 회사에 다니고 싶겠어요?”
“그건.”
“그리고 저도 요즘 일거리가 많아서 도와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네요. 오늘 해주신 말씀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 그래?”
“네. 개인 사업자 등록도 냈고 사무실도 차렸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진형 씨라고 부르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하하. 그, 그렇지. 김 사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일이 많아서 이만 일어나봐야겠네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는 멍한 얼굴로 망부석처럼 내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심태열을 뒤로 한 채 카페를 나왔다.
하연이가 있어서 더는 회사에 다니기 어렵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가 필요하다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정말 자존심이라곤 1도 없는 양반이군.’
다시 한번 그런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비디오쉐어를 박차고 나올 수 있게 도와준.
하연이에게 감사를 표한다.
#
하연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수료식과 함께 일주일 동안의 봄방학을 맞았다.
이 기간에 하연이랑 뭘 하면 좋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하연이 반 친구인 소윤이 엄마로부터 이런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하연이 아버님. 저 소윤이 엄마예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강원도에 함께 놀러 가실래요? 지금 사랑반 친구 중 두 팀이 모였어요. 생각 있으시면 편히 연락주세요 ^^>
강원도 여행이라.
그동안 단체 여행은 가본 적이 없었는데, 하연이 반 친구들이랑 함께한다면 하연이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연이에게 물어봤더니 좋다고 한다.
나는 소윤이 엄마에게 답장하고는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춘천에 위치한 자연휴양림에서 글램핑을 한다는데 뭘 어떻게 준비하면 좋으려나.
컴퓨터를 켜고는 필요한 물건을 체크한다.
다른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가 함께 갈 텐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몸만 가서 하연이에게 부끄러움을 줄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