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0화
김소라는 강원도 첩첩산중에서 태어났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장 가까운 슈퍼에 가려면 차를 타고도 20분 이상 나가야 할 정도의 산골.
그녀는 고향을 벗어나기 위해 아득바득 공부했다.
그 결과 그녀는 상경할 수 있었고,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광고홍보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자신을 아끼던 교수의 추천으로 비디오쉐어의 창업멤버로 합류했다.
아직 회사가 실질적으로 돈을 벌고 있지 않던. 그러니까 조직원이라고 해봤자 사장이던 심태열과 자신밖에 없던 시절에 말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사장인 심태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비디오쉐어는 나름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지만, 회사의 악명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처음에는 열정적이고 스마트하게 일을 처리하던 심태열 사장이 날이 갈수록 오만하고 방자해진 탓이 컸다.
물론 자신도 이게 곱게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에겐 성공이란 목표가 더욱 중요했다.
현대 문명과는 동떨어진 곳처럼 느껴졌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라면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최근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회사는 빠른 속도로 주저앉고 있었고, 심태열의 거만함은 하늘을 찔렀다.
심태열이 자신을 잡기 위해 지분을 제시했지만, 이제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입에 발린 말일 뿐.
‘탈출해야만 해. 어떻게든.’
가라앉는 배와 함께 침몰하느니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튼튼한 뗏목으로 옮겨 탈 지혜가 필요한 시점.
퇴근 후.
오늘도 열심히 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넣을 마땅한 곳이 없는지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전 동료이자 자신의 부사수였던 김진형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두 번째 벨이 울리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낚아채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김 대리님. 김진형입니다.
“으응!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 혹시 이직 생각 있으세요?
이 녀석은 족집게인가.
자신이 지금 이직에 굶주려 있다는 걸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어필했었구나.
그녀는 마우스를 이동해 구직 사이트를 띄워놓은 창을 내렸다.
그러고 웃으며 말했다.
“음. 좋은 조건이라면?”
- 하하. 좋은 조건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데요?
“왜? 나 스카우트하려고?”
- 조건이 맞는다면요?
앗! 이 녀석. 정말로 회사를 차릴 생각인 거다.
김소라는 머리를 굴리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큰 건 아니야.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딱 10%만 더 받았으면 좋겠어.”
- 지금은 얼마 받으시는데요?
“그게...”
그녀는 상대에게 자신의 연봉을 밝히는 게 조금 부끄러웠지만 이내 수긍했다.
어차피 그 또한 과거 비디오쉐어에 다녔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잠재적인 고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딱 3,000만 원 받고 있어.”
- 네? 겨우 3,000만 원이요? 대리님 심 사장님하고 같이 창업 멤버 아니셨어요?
그러게. 그나마 초봉이 2,400만 원이었던 게 지금은 올라서 이나마 되었던 거다.
김소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비디오쉐어와 심태열에게 아쉬웠던 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말이. 말만 창업 멤버지 다른 사람에 비해 받은 혜택은 하나도 없어! 맨날 일만 시키고 보너스 한 번 준 적 없단 말이야.”
- 대리님도 고생이 많으셨네요. 저는 그래도 심 사장님이 더 챙겨주셨을 거라 생각했어요.
“말도 마. 맨날 가스라이팅 당했지.”
- 어떻게요?
“넌 나랑 같은 이 회사의 창업 멤버니까 조금만 더 참고 견뎌라. 그럼 언젠가 임원도 되고 연봉도 수직상승 할 테니까. 아. 물론 지분 이야기도 했다. 나쁜 새끼. 항상 말로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생각해보니 더욱 괘씸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심태열 좋은 일만 시켜 준 것 같고, 자신은 바보처럼 희생만 당한 것 같다.
회사의 성장이 곧 자신의 성장이라 느껴져 어떻게든 사장인 심태열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인데.
그 모든 게 흐릿한 안갯속의 허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김진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형 씨. 진짜 미안해. 내가 진형 씨 회사 다닐 때 좀 심하게 했지?”
- 하하. 뭐 지난 이야기잖아요.
“부정은 안 하네. 미안해. 정말. 내가 잘못했어.”
- 뭘요. 회사 다니다 보면 다 그런 거죠. 착한 사수 같은 거. 거짓말이잖아요.
“내가 그땐 정말 아랫사람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저 심태열한테만 잘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내 생각이 짧았어.”
상대는 잠시 말이 없는 것 같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말인데요. 3,500만 원 드릴게요. 어떠세요?
“응? 뭐가?”
- 연봉이요. 지금 3,000만 원 받으시니까 10%면 3,300만 원이잖아요? 저는 그것보단 조금 더 드리겠단 말이에요.
“뭐! 정말?”
3,500이라니.
진정 자신이 꿈꾸던 숫자였다.
누군가에는 보잘것없는 금액일지 모르겠지만, 늘 저것만 받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한 수치.
매해 연봉인상률 5%를 고수하던 심태열에 비하면 김진형은 천사나 다름없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
- 네. 그 정도는 충분히 챙겨드릴 수 있어요. 대신 열심히 해주셔야겠지만.
“물론이지! 나 야근 밥 먹듯이 하는 거 진형 씨도 잘 알잖아? 맨날 야근할게!!”
- 하하. 아녜요. 그럼 제가 곤란해요. 야근은 가끔씩만. 아. 그리고 야근수당도 따로 챙겨드릴게요. 근무 시간을 따로 체크해 주셔야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겠죠?
김소라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포괄임금제가 당연시되는 영상업계에서 야근수당을 따로 챙겨주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녀는 서둘러 답했다.
“응응!! 나 반드시 진형 씨네 회사로 갈게! 계약하러 언제 가면 될까?”
김소라. 올해로 3이 중복되는. 서른세 살이 된 그녀는 무언가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역시 올해는 뭔가 달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3이 2개나 들어와서 그런지 연초부터 좋은 일이 생기고 있어!’
생각해보면 김진형이 나가기 전 나름 진지하게 심태열에게 대들지 않았던가.
그가 나가는 건 회사 입장에서 손해다, 김진형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인재였냐며.
결국 심태열도 나중에는 김진형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래. 진형 씨는 최고의 동료였지. 나는 옳은 선택을 하는 거야.’
그날 밤. 그녀는 정말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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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놀다 보면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면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이하연. 정신 차려. 넌 4살 꼬맹이가 아니잖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달리하였다.
‘아냐. 나는 지금 김하연이지 이하연이 아냐. 더 이상 이하연에 대한 생각은 하면 안 돼.’
자신이 이하연이었을 땐 어떤 의미에선 업계에서 TOP을 찍은 사람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국민가수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래도 행복하진 않았다.
사는 이유도 불명확했고, 그저 겉으로만 웃고 있을 뿐.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비록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얻은 건 아니지만 나름 유튜브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가며 성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아빠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그러니 나는 이하연이 아니라 김하연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해.’
그녀는 뒤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 재미있게 노는 건지.
그러다가도 쉽게 질리는지 또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 와중에 싸우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고.
아이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고도의 상호작용을 하며 사회를 익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란 참 신기해.’
전생의 자신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아비가 등·하원이 귀찮다면서 대부분 집에 방치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몇 번인가 구타당하고 나서는 울지 않게 되었던 것 같고.
이제는 흐릿해져 잘 떠오르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
그녀는 다시금 몸을 움직여 아이들의 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어느새 깊숙이 놀이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즐겁다. 즐거운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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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하연이와 함께 TV를 보고 있는데 마침 미혼부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나왔다.
나는 리모컨을 눌러 소리를 키웠다.
3살짜리 남자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어느 30대 남성의 이야기.
같은 미혼부 이야기라 그런지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여자친구가 출산 며칠 뒤. 까마귀고기를 먹었는지 함께 살기로 한 약속은 잊고, 아이는 자기가 키울 테니 금전을 요구했단다.
그 금액이 너무 커서 거절했더니 이제는 가족이 함께 와서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
‘어처구니가 없군. 자기들 핏줄인데 고아원에 보내겠다니.’
결국 그는 폭발했고 아이를 자기가 혼자서 키우겠다고 말했단다.
그 뒤로 여자친구와 그녀의 가족을 볼 일은 없었다.
아빠 혼자만의 독박육아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가장 답답한 게 뭐냐는 PD의 질문에 단박에 대답했다.
“출생신고요. 병원에 가거나 정부에서 주는 무슨 지원을 받고 싶어도 출생신고가 안 되어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아니, 내가 얘 아빤데! 왜 출생신고를 못 하는 거지? 진짜 화가 나고 짜증이 나요.”
그는 무려 세 번이나 법원에 신청했는데 모두 부결됐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심지어 담당 국선변호사에게 물어봐도 그조차 잘 모르겠다고 했단다.
‘우린 운이 좋았지. 상준이가 도와줬던 게 큰 힘이 되어 줬어.’
그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편의점은 물론 막노동도 해보고, 술집에서도 일하고.
하지만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그때마다 아이를 데리고 갔고 일주일도 일하지 못한 채 나와야만 했단다.
애가 우는데 일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하연이의 손을 꼬옥 잡고서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연이가 나를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아빠아.”
“응.”
“우러요?”
“응.”
“슬퍼서어?”
“응.”
상대방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을지. 그리고 나 또한 저 사람의 슬픔에 십분 공감해서 그런지 마음이 들끓었다.
마구마구 들끓어서 화산이 터질듯 폭발할 것만 같다.
나는 닭똥처럼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대로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방송은 혼자서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 모습과 함께 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는 그를 클로즈업했다.
“호민이가 잘 때가 가장 예쁜 거 같아요. 잘 때 가장 얌전하니까. 사실 미안해요. 내가 키우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아무것도 못 해주는 것 같아서.”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한테는 호민이밖에 없어요. 호민이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네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있으면 뭘까요?”
“역시 출생신고요. 제발 정부에서 출생신고를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출생신고가 안 되면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거든요.”
“만약 출생신고가 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으세요?”
“일해야죠. 지금은 조금이나마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입에 풀칠은 하지만. 이대로는 어렵잖아요. 미친 듯이 일해야죠.”
그 말을 끝으로 방송이 마무리된다.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고는 하연이의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하연아.”
“웅.”
“하연이 너 후원받은 금액 있잖아.”
“웅.”
“우리 그거 일부를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하연이가 받은 돈을 일부 주는 거야.”
“쪼아요오!!”
하연이가 냉큼 말한다.
짧게나마 혹시 싫다고 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
좋아. 돈의 주인인 하연이가 승낙했으니 그럼 이 돈을 기부하면 될 텐데.
그래도 어디에 기부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얼마큼 기부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
나는 하연이를 재운 뒤 내 방으로 올라가서는 열심히 미혼부 후원단체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단체가 있는데 그중에서 미혼부에 대한 지원을 가장 활발히 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미혼부에 대한 지원도 오래전부터 한 것 같고. 와. 방송에 나온 분 후원도 하셨네? 오케이. 내일 시간 나면 여길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다음 날.
나는 오전 일찍 해당 후원단체를 찾았다.
단체의 이름은 <아이에게 사랑을>인데 막상 도착해보니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서 기부하고 싶어 찾아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오래지 않아 푸근한 인상의 한 수녀님이 맨발로 뛰쳐나오신다.
“혹시 방금 전화 주신 분?”
“아 네. 제가 김진형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빨리요.”
그녀가 인자한 얼굴로 어서 들어오라고 소리치고는 내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지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성당 안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