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48화
나는 하연이를 씻긴 뒤 방에 데려가 재웠다.
이어서 술자리 장소를 거실이 아닌 위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옮겼다.
유주까지 합류하면서 판이 커졌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일찍 끝날 것 같진 않단 말이지.’
송재희는 유주의 손을 꼭 잡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잘 지냈냐, 어떻게 지냈냐, 보고 싶었다, 어린이집 교사 일은 할 만하냐 등등.
처음에는 도회적으로 보였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느새 푸근한 옆집 친구처럼 변해간다.
그러다가 하연이 이야기로 초점이 맞춰졌다.
“조금 전에 네가 데려온 아이가 하연이지? 진형 씨 딸?”
“맞아. 엄청 귀엽지?”
“응. 눈앞에 천사가 있는 줄 알았다니깐!”
“응응. 정말 천사가 맞아. 게다가 요즘은 유튜브에서 나름 잘나가는 아이라서. 팬들도 많아.”
“유튜브? 하연인 그런 것도 해?”
송재희는 유주에게 하연이의 유튜브 채널 주소를 물어보더니 빠르게 영상을 살펴본다.
그러고는 돌고래 같은 탄성을 연신 질러댔다.
“와우! 대박! 진짜 엄청난데? 무슨 아이돌 같아!”
“조금 전에 네가 봤던 뮤직비디오는 실제로 국내 음원 차트 TOP 100에도 들었어.”
“그 정도야? 내가 요즘 최신 노래를 잘 안 들어서. 벌써 나이 먹었나 봐. 요즘 애들 노래는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 누가 누군지 이름도 잘 모르겠고.”
“하하. 나도 그래. 원래 나이 들면 예전에 듣던 노래가 익숙해진다고 하잖아?”
유주의 말에 서로 자기도 그렇다며 한마디씩 보태고 나선다.
현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어디서 들은 얘긴데,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생소한 음악을 접하게 되면 이를 어린애들이나 듣는 유치한 노래로 치부한다더라고요. 그래서 본인이 어릴 적 노래만 듣게 된다고.”
“오. 그 이야기 나도 SNS에서 본 거 같아. 평균 33살부터이던가? 그때부터는 더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것 같던데?”
확실히 나 역시 그런 면이 조금 있는 것 같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최신 차트를 열심히 듣고 있달까.
하지만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상준이를 놀렸다.
“그래? 나는 요즘 노래만 듣고 있는데. 다들 너무 일찍 조로(早老)한 거 아냐?”
“한자 쓰지 마 인마. 지금 변호사 앞에서 주름잡냐?”
나는 웃으며 우리의 학창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가 묶인 유튜브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Call me Call me
Call Call Call Call Call Call me
내게 전화해서 속삭여줘
나를 사랑해 왔다고
첫 곡을 틀자마자 음원 발매 당시 8주 연속 1위를 기록한 띵곡이 나왔다.
다들 호들갑을 떨며 난리다.
“으어! 추억 돋네! 마블걸스의 Call me 잖아!”
“콜 미, 콜 미! 콜콜콜콜코올 미~”
“어쩜. 나 이 노래 진짜 좋아했는데.”
모두의 목소리가 커지자 나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는 주의를 줬다.
“쉿. 밑에 하연이 자고 있어. 목소리 좀 낮춰줘.”
“앗! 그랬지. 쏘리.”
이제는 모두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상에 젖는다.
이어서 나온 곡은 이하연의 히트곡. <완벽한 날>이었다.
내 주의를 받고 얌전히 있던 상준이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인다.
“크아아!! 내 애창곡 1위인 완벽한 날이잖아!”
“쉿!! 목소리 낮추라니까.”
“으. 진녕아 미안타. 그래도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드아아!”
녀석은 제법 술에 취했는지 흐느끼며 완벽한 날을 크게 따라부른다.
이런 민폐 덩어리를 봤나!
나는 아래로 내려와 조심스럽게 하연이 방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하연이는 곤히 자고 있었고, 층이 달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위층 소음이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다 같이 생활하는 공동거주 구역인데 한 번 더 주의를 줘야겠다.
‘밑에는 괜찮지만, 옆집엔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하연이 방문을 닫고 위로 올라가려던 찰나.
무언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연이 침대 아래쪽을 보니 이불이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응? 뭐지?’
자세히 봤더니 하연이가 반주 소리에 맞춰 발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 자는 줄 알았더니. 안 자고 있었어?
나는 웃으며 하연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물었다.
“김하연 나와라 오버. 안 자고 있으면 당장 응답하라.”
이내 하연이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자아고오 있다아 오버어.”
“크크. 하연아. 자야지! 안 자고 뭐 해?”
“..노래에 소리가아 들려서어.”
저런. 어쩔 수 없나.
나는 할 수 없이 하연이를 데리고 위로 올라왔다.
한참 완벽한 날의 클라이맥스가 진행되고 있던 상황.
모두가 신나게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나와 하연이가 함께 올라오자 다들 좋아서 죽으려고 한다.
“하여나아!!! 안 자고 있었어? 삼촌이 우리 하연이 보고 싶었다아!”
“하연이 왔네. 안녕?”
유주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왜? 하연이도 놀고 싶대?”
“너희가 하도 크게 노래를 불러서 못 자겠다더라.”
신상준이 이내 오버하며 몸을 움직인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하연이를 향해 허리를 굽신거린다.
“으으. 하연아 삼촌이 미안하다. 내가 이 노랠 너무 좋아해서 말이지.”
“헤헤.”
하연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방글거리며 미소를 보인다.
나는 상준이를 일으켜 세운 뒤 말했다.
“농담이야. 하연이도 같이 놀고 싶은지 노래에 맞춰서 박자를 타고 있더라고. 그래서 데리고 올라왔지.”
“뭐야? 그랬던 거야? 으이구! 하연아 사랑한다아!!”
상준이 녀석이 하연이에게 뽀뽀하려고 하자 나는 녀석의 이마에 강력한 딱밤을 때리고는 하연이를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아야야. 인마! 아프잖아!”
“옆집 들리겠다.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어디서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가지곤.”
“흑. 서럽다. 서러워! 김진형, 예쁜 딸이 있다 이거지? 흥! 하나도 안 부럽다! 내겐 지상 최고의 여신! 송재희 님이 계시니까!!”
녀석은 옆에 있던 송재희를 왈칵 껴안고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비벼댔다.
나 같으면 뒤통수를 한 대 세게 갈길 것 같은데 그래도 남자친구라고 송재희는 상준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우쭈주. 우리 상준이는 누나가 그렇게 쪼아요?”
“히잉. 네. 상주니는 재희밖에 없어요!”
“그래그래 요기로 와요. 누나가 예뻐해 줄 테니까.”
“하하. 신상준 완전 웃기네.”
“하연아. 너는 저런 거 보고 배우면 안 돼? 알았지?”
바보 커플 덕분에 술자리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완벽한 날이 끝나더니 이어서 또 이하연의 곡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하연이 무척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오랫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인기곡이 많아서가 아닌가 싶다.
다행히 이번에는 신나는 댄스곡이 아닌 잔잔한 발라드곡.
모두가 술잔을 부딪치며 조용히 음악에 빠져든다.
유주는 눈을 감고 가만히 몸을 흔들었고, 송재희는 조용히 허밍을 했다.
그러다 문득 현모가 하연이를 지그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단 말이지.”
“뭐?”
“하연이가 죽은 이하연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오! 찌찌뽕! 나도 그 생각 했었는데!”
상준이가 거들고 나서자 현모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하연을 따라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그게 다 이 아빠가 이하연의 찐팬인 영향 아니겠냐.”
“아무튼 대단한 재능이야. 분명 이하연을 뛰어넘는 아티스트가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마라. 하연이는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까.”
현모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어서 말을 꺼냈다.
“최근에 기사 난 게 하나 있는데, 이하연 아빠 이야기였어.”
“이하연 아빠? 무슨 내용이었는데?”
다들 현모의 입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어떤 말이 나올지 주목했다.
이하연이 자살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길래 요즘은 이하연 관련 기사를 통 보지 못했더랬다.
그런데 이하연 아빠와 관련된 기사가 나왔다니.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이하연이 죽기 전에 자기가 모았던 돈을 모두 스위스 은행에 집어넣은 모양이야.”
“오호라. 금액이 만만치 않겠는데?”
“그렇겠지? 일각에서는 5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동안 그렇게 자기 아빠한테 뜯기고도 엄청나지.”
“장난 아니네. 그런데 이하연 아빠는 왜?”
“이하연 아빠가 그 돈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이었어. 변호사 고용해서 미친 듯이 찾는다더라.”
“미친 새끼!”
“거기 달린 댓글이 아주 가관이었지. 아빠라는 놈이 딸은 죽었는데 딸이 모은 돈을 탐내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말이야.”
“그렇겠네. 실질적으로 이하연 아빠 때문에 이하연이 자살한 거 아냐? 씨발. 아빠라는 새끼가 완전 웬수가 따로 없네.”
어쩐 일인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방긋 웃고 있던 하연이의 얼굴에 주름이 보인다.
“야야. 그만하자. 애 앞에서 조금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앗. 그러네. 미안미안. 아무튼 진형이 너는 하연이 잘 키워라. 하연이한테는 너밖에 없잖아.”
물론이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딸 하연이는. 내가 지킨다!
‘그나저나 이하연 아빠는 진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구나. 쓰레기 같은 새끼. 천벌을 받아야 할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하연이를 더욱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하연이의 작은 체구가 느껴지면서 아빠로서의 책임감이 한결 더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연아 걱정하지 말렴.
아빠는 누구랑은 다르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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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나는 인근에 있는 은행의 VIP룸에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와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테이블.
한쪽엔 에스프레소 머신과 간단한 다과가 준비된 가운데 일반 은행 창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가득하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으로 계급이 나뉘는구나.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군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송재희였다.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네. 이쪽으로.”
나는 그녀를 따라 창구로 이동한 다음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로 VIP 전담 직원 송재희라는 명패가 선명하다.
“재희 씨는 은행에서 오래 근무하셨나 봐요?”
“대학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죠.”
“VIP 전담 직원이면 뭔가 일을 잘해야 오는 곳 아닌가요?”
“호호.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고 초짜 신입이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 바로 상담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하연이와 진형 씨 계좌 모두 저희 은행 계좌라고 그러셨죠?”
“네. 맞아요.”
“그럼 신분증 좀 거기 올려주시겠어요.”
나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 작은 상자 위에 놓았다.
갑자기 왜 은행에 왔냐고?
어제 술자리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하연이와 나의 금융 관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