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47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송재희라고 합니다.”
다소곳하면서도 어딘가 강단 있는 말투.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상준이 친구 김진형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그녀를 안으로 들이고는 준비한 차를 건네주었다.
“녹차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아해요. 집이 무척 깔끔하네요. 미니멀리즘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아이랑 둘이서만 사는 집이라서 물건이 별로 없어요. 하하.”
상준이는 뭔가 뿌듯한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내 여자친구 이쁘지?”
“참 자기도. 호호.”
나는 분명히 보았다.
송재희가 상준이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는 것을.
“으힉! 하하. 다들 인사해. 이쪽은 현모. KBC 기자야. 우리 중에서는 제일 유명할걸? TV에 얼굴도 많이 나오니까.”
“얌마. 뉴스에 나오는 기자 얼굴 따윈 아무도 모른다. 지나가는 사람 백 명한테 물어봐라. 나 아는지. 아 참. 구현모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현모 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하하. 상준이가 저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상한 이야기 하진 않았나요?”
“그럴 리가요. 대한민국 최고의 기자라고 늘 자랑하고 있어요.”
“이열. 신상준. 다시 봤다?”
“으하하. 그럼 내가 당연히 내 친구들 칭찬하지. 뒤에서 호박씨를 까겠냐?”
하하 호호. 분위기 좋다.
상준이는 이어서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 파티 호스트이자, 이 집 주인. 김진형. 조금 전에 인사했지?”
“응. 근데 자기야. 진형 씨한테 아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러게. 하연이라고 엄청 귀엽고 깜찍한 친구가 있는데. 진형아. 하연이는?”
“아. 하연이는 유주한테 잠시 맡겼어.”
“또? 너흰 도대체 무슨 사이냐?”
상준이가 타박하듯이 말한다.
“무슨 사이긴. 어린이집 교사랑 학부모 사이지.”
“그래?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자주 연락하는 것 같은데.”
상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내게 묻는다.
어휴. 여자친구도 옆에 있는데 저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그런데 재희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유주? 혹시 신유주 말인가요?”
“어라? 재희 씨가 유주를 어떻게?”
순간 송재희의 동공이 커지더니 목소리가 커졌다.
“혹시 진형 씨, 한석대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영상디자인학과?”
“네. 맞긴 한데 그걸 어찌.”
“어쩜! 저 기억 안 나세요? 유주랑 과 동기 송재희요! 우리 그날 술 엄청 마셨잖아요!!”
“네?”
술을 엄청 마셨다고? 내가? 당신이랑?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 한석대 유아교육과 송재희예요. 기억 안 나세요?”
“그게 잘..”
상준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더니 나를 잔뜩 경계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으르렁거린다.
“야. 너희 둘 뭐야? 그리고 송재희. 너 부림대 신방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말 안 해줬구나. 나 한석대 있다가 부림대로 편입했어.”
“진짜?”
“응. 애들 돌보는 건 아무래도 적성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 신상준.”
“어.”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표정이 조금 이상한데?”
“아, 아니. 나는 그저 처음 듣는 이야기라.”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다.
상준이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마리 토끼고, 송재희가 호랑이 같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잠깐만! 재희 씨. 한석대 유아교육과 출신이라고요?”
“네. 거길 졸업한 건 아니지만요.”
“유주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전 진형 씨도 기억나는데요? 둘이 CC였잖아요? 맞죠?”
거참.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이 좁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사회에 나온 뒤로 한석대 출신은 처음 만났다.
‘그렇게 큰 학교도 아닌데 말이지.’
한석대는 인서울 대학 중 하나였지만 그다지 네임밸류가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재학생 수도 적었고.
반면 부림대는 나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대 아닌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사이.
송재희가 웃으며 말했다.
“백마탄 기사님 말이에요.”
“백마탄 기사?”
“그게 무슨 소리야?”
송재희의 말에 다들 난리가 났다.
”그 날 기억하세요? 술 먹다가 옆자리 테이블에 있었는데 도중에 합석했잖아요?”
“설마?”
“네! 그 자리에 저도 있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그러고 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땐 유주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 자리에 송재희도 있었던 것 같다.
송재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날 우리가 술을 좀 많이 마셨거든. 다들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는데 유주가 많이 취했나 봐. 그런데 진형 씨가 유주가 걱정되었는지 따라가서는 말없이 옆에서 노숙을 함께 해줬다지 뭐야.”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현모와 상준이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
“난 또 뭐라고. 그 일 잘 알고 있지. 그 뒤로 둘이 사귀었잖아?”
“그래. 진형이 녀석이 술 마실 때마다 늘 하는 레퍼토리잖아. 그런데 그 자리에 재희 씨도 있었다니. 정말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네요.”
대충 이야기가 정리된다.
그러니까 내가 유주를 처음 만난 날.
그 자리에 송재희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때와는 너무 달라져서 지금도 긴가민가하지만.
‘하긴. 그때 본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네.’
송재희에 따르면 자신은 그 직후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하게 되면서 유주와의 연락도 끊겼다고 한다.
“유주는 요즘 어떤가요? 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결국 어린이집 교사가 되었나 보네요?”
“네. 제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 교사에요.”
“멋지다. 유주는 잘 될 줄 알았어요. 자기 꿈이 명확했거든요.”
그래. 유주는 자기 꿈이 명확한 아이였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술 마셔야지?”
“아 그래!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여기. 개인사업자랑 사무실 낸 거 축하 선물이다.”
상준이가 내게 쇼핑백을 하나 건넸다.
안을 살펴보니까 고급 양주가 한 병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말했잖아. 개인사업자 및 사무실 계약 축하 선물이라고.”
“그렇다고 이렇게 비싼 걸 사 왔어?”
“당연하지. 내 친구가 사업을 시작한다는데. 마! 이 정도는 기본이지!”
현모도 질 수 없다는 듯 내게 스마트폰을 건넨다.
화면에 초록빛으로 가득한 거대한 화분이 보인다.
초록색 잎사귀가 축축 늘어진 게 마치 동남아 열대우림에 들어온 것 같다.
“나도 선물. 사무실 개업하면 큰 화분이 좋다길래 하나 샀다. 주소 알려주면 그쪽으로 보낼게.”
“뭘 이런 걸 사.”
“짜샤. 이런 건 모른 척하고 받는 거야. 빨리 주소나 알려줘.”
아 진짜 이놈들. 맨날 뭘 주기만 하고. 고마운 한편,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야. 너희 거기 가만히 있어! 탱크가 아니라 최고의 안주를 준비해줄 테니까!”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부엌으로 이동했다.
오늘만큼은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그동안 갈고닦은 요리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야겠다.
최철상한테 받은 순대도 있겠다, 나는 녀석들을 위해 회심의 순대곱창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 잘게 썬 야채를 볶는다.
이어서 순대와 곱창을 투하. 쉐킷쉐킷. 신나게 섞는다.
마지막으로 물에 불린 당면과 간장, 고추장, 마늘, 맛술, 올리고당이 황금비율로 들어간 소스를 넣은 후, 위에 참깨를 조금 뿌리고 마무리.
크으. 내가 만들었지만, 비주얼은 물론 냄새도 환상적이다.
친구들도 이게 뭐냐며 아우성친다.
“야! 이거 냄새 뭐야? 죽이는데?”
“김진형 부엌 가서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냐? 빨리 가져와 봐!”
후후. 보고 놀라지나 마라.
짜잔!
나는 테이블 위에 방금 만든 순대곱창볶음을 내놓았다.
너도나도 젓가락을 들기 전에 스마트폰부터 들어 올린다.
인스타에 올릴 거라나 뭐라나.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 맞냐? 다 만들어진 걸 프라이팬에 데우기만 한 게 아니고?”
“그딴 걸 너희한테 대접할 순 없지. 100% 수제 요리다!”
“오오. 진짜 김지녕이 애 아빠 다 됐네. 요리도 할 줄 알고.”
이런 게 아빠 마음이라는 건가.
녀석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 봐도 기분이 뿌듯하다.
어지러이 술잔이 오가고.
술에 취했는지 상준이가 유주를 불러오란다.
“야. 빨리 유주 씨한테 전화해봐.”
“전화는 무슨. 곱게 술이나 마셔.”
“하연이가 유주 씨 자식도 아니잖아. 계속 하연이 보게 하는 게 오히려 민폐 아니냐?”
“맞아. 유주 씨 불러. 하연이도 봐야지. 내 사랑 하연이 말이야.”
“저도 유주랑 하연이 궁금하네요. 괜찮으시면 연락해보세요. 벌써 8시잖아요.”
시계를 보니 어느덧 8시가 넘었다.
‘유주한테는 9시까지 와달라고 했는데. 조금 빨리 불러볼까?’
유주한테 연락을 할까 하다가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하연이 맡긴 것도 미안한데, 갑작스레 술자리까지 초대하기에는 좀.
뭣보다 괜히 이상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걱정도 되고.
지금도 그렇지 않나.
“그런데 진형이 너 진짜 여자친구 없냐? 하연이도 있는데 애한텐 엄마가 있어야 좋지 않겠어?”
“그래. 바쁜 건 알겠는데 연애도 하고 그래 좀. 하연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너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야지. 맨날 야근만 하던 그 거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현모를 노려보며 답했다.
“구현모. 너나 잘해. 지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이래라저래라야.”
“크윽. 나는 눈이 높아서 그래! 알잖아? 내 이상형이 뭔지?”
뭐라는 건지. 적당히 눈을 낮추지 않으면 넌 절대 연애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이놈아.
그런데 잠시 뒤.
초인종이 울렸다.
9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유주가 하연이를 데리고 왔다.
서둘러 나가보니 유주가 미안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미안. 하연이가 빨리 집에 가고 싶대서.”
“그랬구나. 괜찮아. 매번 이런 부탁 해서 나야말로 미안하지.”
그러다 유주가 현관에 있는 하이힐을 바라보며 묻는다.
“여자도 있어?”
“아. 얘기 안 했구나. 상준이 여친도 왔거든.”
유주가 반색한다.
“우와. 상준 씨 여자친구 생겼구나! 축하한다고 전해줘.”
한참 유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뭐야? 유주 씨 온 거야? 유주 씨!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송재희가 현관 쪽으로 나오며 말했다.
“어머 유주아! 나 재희야! 잘 지냈어?”
“어? 재희잖아? 송재희. 네가 여긴 어떻게?”
유주가 놀란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연이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