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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45화 (45/135)

내 딸은 국힙원탑 45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못 받아본 적은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조차 초콜릿 폭탄을 받았었고.

‘선임들이 참 좋아했었지. 부러워하기도 했고.’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는 아니지만.

하연이에게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그런데 흥이 깨지기도 전에.

또다시 귀여운 꼬마 숙녀에게서 초콜릿을 받을 줄이야.

마음이 벅차오른다. 서른이 되었지만, 아직 나 안 죽었구나!

“꼬마야. 이거 나 주는 거야?”

아이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니? 하연이랑 친구야?”

“시인소오윤!”

“소윤이구나. 하연아. 소윤이랑 너랑 같은 반이니?”

“네에! 마자요.”

“그렇구나. 좋은 친구를 뒀네.”

내가 소윤이가 건넨 초콜릿 상자를 받자 하연이가 잠시 입술을 삐쭉 내민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내 착각이겠지.’

하연이를 데리고 나오려는데 하연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아빠아. 다으메 소유니 우리 집에 놀러어와도어돼요?”

“물론. 소윤이처럼 착한 친구라면 언제든 오케이야.”

“푸. 아라쪄요.”

하연이가 내쉰 한숨이 꼭 곰돌이 푸를 뜻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나 지금까지 하연이한테 인형 하나 선물한 적이 없구나.

초콜릿 받은 것도 있고. 오늘은 하연이한테 인형이나 한 개 사줄까.

나는 하연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대신 인근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하연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아빠아. 어디이 가요오?”

“쇼핑하러.”

“쇼피잉?”

“응. 물건 사는 거야.”

쇼핑이라는 말에 하연이의 두 눈이 밝게 반짝인다.

우선 옷 가게부터 들렀다.

지금까지는 유주랑 친구들이 선물해 준 걸로 어찌어찌 버텼는데 오늘에서야 어린이집 앞에서 확신했다.

‘다른 애들은 매일 다른 옷을 입혀서 보내는구나.’

그동안 이 단순한 사실을 왜 모르고 살았던 걸까.

아빠 실격이다 정말.

그나저나 요즘은 정말 옷이 잘 나오는 것 같다.

아동복도 성인복 못지않게 종류도 다양하고 원단도 고급스럽다.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는데 하연이가 내 손을 잡고 이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나 보다.

하연이의 손을 잡고 따라갔더니 작은 마네킹에 보랏빛 원피스가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차분하면서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하연이랑 무척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런데 이 디자인 말이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기억났다!

이하연이 평소 즐겨 입던 옷이랑 비슷한 디자인이다.

진짜 하연이는 어쩜 취향까지 이하연이랑 이렇게 비슷할까.

하연이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나는 하연이가 좋아할 만한 옷을 한 벌 더 구해서 탈의실로 가져왔다.

‘하연이가 이하연이랑 취향이 비슷하다고 하면. 분명 이것도 좋아할 거야.’

그 사이 하연이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지나가던 직원이 그 모습을 보고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우아우아. 정말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러게. 저게 어떻게 4살 아이의 포스인지 믿기지 않는다. 진짜 이하연의 재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한 분위기가 대단하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하연이에게 새로운 옷을 내밀었다.

“이게에 머에요?”

“아빠가 고른 옷.”

“아빠아가?”

“응. 한번 이것도 입어볼래?”

하연이는 한동안 내가 건넨 옷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탈의실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직원이 괜찮냐며 묻는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혼자서 옷 입을 수 있을까요?”

“네. 하연이는 혼자서 다 잘하거든요.”

“따님이 몇 살이에요?”

“4살이요.”

“네? 4살이 혼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고요?”

나는 그게 어려운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남들 다 그러는 거 아니었어요?”

“하. 하. 다른 4살 부모님이 들으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 얘기를 하시네요.”

“그런가요?”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그러고 보면 하연이는 혼자서 옷도 잘 입고, 밥도 잘 먹고, 샤워도 혼자서 하고. 웬만한 건 스스로 다 알아서 잘한다.

그래서 내가 참 편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는데, 하연이가 특이한 거였구나.

새삼 우리 딸이 참 대견스럽고, 감사하다.

잠시 뒤.

하연이가 내가 건네준 옷을 입고 나왔다.

초록색의 박스 후드티인데 조금 전 입었던 보라색 원피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뭐랄까. 이전에 입었던 옷이 귀족 영애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꼬마 힙합 전사가 서 있는 것 같다.

발랄하고 보이시한 느낌이, 입는 옷에 따라 이렇게나 사람이 달라 보일 수 있구나 싶을 정도.

가게 직원도 자기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야.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네요! 너무 귀여워요!”

“헤헤. 하연아. 이 옷은 어때?”

“쪼아요!”

하연이도 마음에 든 눈치다.

사실 이하연은 캐주얼한 옷과 포멀한 옷을 둘 다 좋아했다.

사복으로는 캐주얼한 옷을 선호했고, 공연이나 방송이 있을 때는 포멀한 옷을 주로 입었다.

‘사실 뭘 입어도 워낙에 가냘픈 몸매라서 잘 어울렸지.’

하연이 역시 이와 비슷했다.

뭘 입어도 옷걸이가 좋으니까 옷발이 선다.

“아까 입은 옷이랑 이거랑 둘 다 포장해주세요. 아. 아니다. 하연아 지금 입은 옷은 그대로 입고 갈래?”

내 물음에 하연이는 좋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바로 입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꼬마야. 잠시만 있어봐. 언니가 상표 떼줄게.”

그녀는 옷에서 태그를 떼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말했다.

“정말 예쁜 따님을 두셨네요. 너무 귀여워요.”

“고맙습니다.”

“옷발도 정말 잘 받고. 자주 오세요. 따님이 저희 브랜드 디자인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후후. 아주머니. 하연이야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죠. 꼭 여기 브랜드뿐만 아니라.

계산을 마친 우리는 다른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층 아래에 인형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가게에 들른 나는 뭘 사줄까 고민하다가 대형 곰돌이 푸 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연아. 저 인형 어때?”

“푸?”

“응. 푸 좋아해?”

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가격표를 보고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하연아. 왜? 아빠가 이거 사줄게.”

“시러어. 비싸아.”

“괜찮아. 아빠 요즘 돈 많이 벌잖아.”

하연이를 달래려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요즘 돈벌이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외주도 많이 들어오고, 제작 의뢰 문의도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그중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영상을 고르고 있지 않던가.

이런 추세라면 조만간 혼자서 일을 하는 건 어려울 듯하니, 사람을 뽑아 규모를 늘려야 할 것 같다.

내가 대형 인형을 집으려고 하자 하연이는 한사코 거절하더니 그 옆에 있던 주먹 크기 정도의 푸 인형을 집어 올린다.

“이게 더 조아요, 나안.”

“진짜로?”

“웅. 진짜로오!”

푸우. 나는 하연이보다 더 커다란 인형을 사주고 싶었는데.

예전부터 로망이었단 말이다. 딸에게 거대한 인형을 사주는 거.

그래도 하연이가 싫다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작은 푸 인형을 하연이에게 사주고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하연이가 후드티 끈에 푸 인형을 묶어서 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하연아. 그게 뭐야?”

“헤헤. 예쁘라고오.”

“네가 직접 한 거야?”

“웅. 이상해에?”

그럴 리가! 엄청 귀엽다. 참신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마치 푸 목걸이를 한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하연이를 가리키며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쟤 좀 봐. 엄청 귀엽네.”

“하하. 푸 인형 목걸인 거야? 저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지?”

“귀엽다. 깨물어주고 싶엉.”

컥. 그건 좀 곤란하지.

나는 하연이를 위로 안아 올리고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빠르게 이동했다.

“하연아. 오늘 쇼핑 재미있었어?”

“네에! 다으메 또 와요오!”

“좋지. 다음에도 하연이가 좋아하는 거 많이 사줄게.”

“아빠 최고오!”

곧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나왔고 하연이는 맛있다며 폭풍 흡입한다.

입가에 잔뜩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마저 사랑스럽다.

하연아. 아빠한테 와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사랑해.

나는 내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는 것도 모르고 하연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끝도 없이 바라보았다.

물론 이 깜찍한 모습을 영상으로 찍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고.

#

이세미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하연이가 나오는 유튜브 채널을 쉬지 않고 반복해서 보는 것.

한국에서는 이걸 입덕 한다고 표현하던데 자신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연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까지 바칠 수 있었다.

“에구에구. 하연아. 사랑해.”

어쩜 어린 게 이렇게나 깜찍하고 귀여울 수 있을까.

게다가 정성수의 말처럼 이하연 뺨치는 노래 실력의 소유자.

이건 단순히 대상을 따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재현. 그 자체였다.

힘든 유학 시절. 이하연의 곡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가.

그녀는 빠르게 김하연에게 빠져들었고, 이것은 정확히 정성수가 노린 바였다.

“아가씨. HiYeom하연 채널에 새로 업데이트된 영상 보셨습니까?”

“어떤 거 말씀이시죠? 하나 분식에서 순대 먹는 거 말씀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죠.”

“후후. 조금 전에 새로 뜬 영상은 못 보셨나 보군요.”

“엇! 그런 게 있었나요? 뭔데요?”

“쇼핑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영상입니다. 15분 전에 떴습니다.”

“크윽! 그걸 왜 몰랐지? 잠시만요.”

그녀는 서둘러 유튜브에 접속해서는 HiYeom하연 채널에 올라온 새 영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아. 하연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옷도 못 보던 옷이네. 후드티 너무 잘 어울려!”

그 모습을 본 정성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우리 하연이에게 든든한 물주가 탄생했어!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HiYeom하연 채널은 키즈 채널이라서 후원이 불가능합니다.”

“어머. 그런가요? 아쉽네요. 왜 그렇게 불합리한 시스템을 둔 거죠?”

“아동 착취 같은 논란이 있었거든요.”

“저런. 그럼 하연이에게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건 불가능하단 말씀인가요?”

“다행히 최근에 김진형 씨가 하연이 후원 계좌를 만들어서 이걸 커뮤니티에 올려뒀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알려드릴까요?”

“아뇨. 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그녀는 서둘러 커뮤니티를 둘러보다가 김진형이 올린 하연이 후원 계좌를 확인했다.

“오케이. 얼마가 좋으려나. 처음이니까 너무 큰 금액을 보내면 상대가 당황하겠죠?”

“뭐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저는 백만 원 보냈습니다.”

“백만 원이요? 그걸 누구 코에 붙여요?”

컥. 샐러리맨에게 백만 원은 꽤 큰 액수란 말이다.

게다가 일시적인 게 아닌 꾸준한 후원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너무 큰 금액을 보낼 순 없었다. 지속가능성이 떨어지니까 말이다.

정성수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께선 얼마나 내실 생각이신지요?”

“가만있어보자. 제 계좌에 얼마나 들어있죠?”

“현금으로 50억 수준이십니다. 그밖에 부동산이랑 주식, 펀드, 가상화폐 등에 분산 투자되어 있죠.”

“음. 그럼 1억 정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차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1, 1억이요?”

아무리 경제관념이 없어도 그렇지.

1억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정성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너무 큰 금액은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에? 이게 부담스럽다고요? 겨우 1억인데요?”

크윽. 진짜 싫다. 너에겐 1억이 큰 금액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한해 연봉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이란 말이다!

이세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외쳤다.

“그럼 5천만 원은 어때요?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 제 생각엔 1천만 원만 후원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대신 지속적으로 후원하시면 더 좋고요.”

“겨우요? 상대가 이걸 받고 실망하면 어쩌죠?”

“장담컨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후원 계좌에 돈을 입금했다.

“정말 이 정도만 입금해도 괜찮겠지요? 혹시 상대가 실망하면 차장님이 책임지셔야 해요!”

“네, 아가씨. 정말 괜찮습니다.”

이걸 받은 김진형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이세미는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지만 경제관념에 있어서는 일반인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과연 재벌가의 자녀. 태생적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정성수는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김진형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했다.

#

“뭐, 뭐야 이거!”

오래간만에 후원계좌를 확인한 나는 하마터면 의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그도 그럴게 무려 천만 원이라는 되는 거금을 한 사람이 쏘아 보냈으니까.

누군가 하고 보낸 사람을 봤더니 이세미다.

우아. 재벌가 자식이라고 하더니. 정말 장난 아니구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돈은 제가 하연이를 위해서 잘 쓸게요.’

나는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인터넷을 참고하며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제한이랄까. 이걸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나만의 가이드 말이다.

‘이게 없으면 내 맘대로 하연이 후원 계좌에 들어온 돈을 유용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적어놓고 보니까 제법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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