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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44화 (44/135)

내 딸은 국힙원탑 44화

“으허헝! 진형 씨! 내 얘기 좀 들어봐요. 글쎄...”

“자, 잠깐만요. 김 대리님. 진정하세요.”

“나 억울해. 나 진짜로 억울하다고오!!”

김 대리가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사람들은 따분한 기증식 행사에 참여하려고 왔다가 흥미로운 사건을 목격했다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저기요, 김 대리님. 알겠으니까 이 손 놓고 이야기해요. 네?”

“으으. 진형 씨. 나 진짜 억울해. AE가 무슨 촬영이냐고.”

그러게. 안 그래도 그건 나 역시 궁금하던 차다.

“김 대리님이 스스로 직무를 바꾼 거 아니었어요?”

“아냐. 난 천생 마케터지 촬영은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그런데 그 카메라는 뭐에요?”

“내 말이!”

나는 그녀를 진정시킨 뒤 행사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노인정 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 진정됐으면 천천히 이야기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은. 심태열 사장에게 실컷 이용당하는 중이지. 하아. 예전에 진형 씨 있을 때가 좋았는데.”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내가 전에 회사가 망가지고 있다고 얘기한 적 있지?”

“네. 그랬었죠.”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해. 새로 들어온 신입 애들이 몇 개월도 못 버티고 죄다 나가버렸으니까.”

“그 정도예요?”

“그래! 그래서 AE인 내가 촬영까지 하고 있다니까 글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람에 따라서는 AE와 영상 쪽을 병행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AE(Account Executive)는 광고 대행사와 광고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면서 둘을 조율하는 역할이고, 영상은 커뮤니케이션 스킬보다는 촬영이나 편집 등의 기술이 요구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사람이 없어서 김 대리님이 촬영까지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응. 진짜 내 꼴이 우습지. 이게 뭐람.”

“사장님한테 싫다고는 안 했어요?”

“당연히 말했지!”

“그런데요?”

김 대리는 침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나름 여기 창업멤버잖아. 회사에 애착이 있기도 하고. 뭣보다.”

“뭣보다?”

김 대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태열이 조금만 더 버티면 나한테 지분을 챙겨준다고 그래서.”

“지분이요?”

“그래. 물론 나도 알아. 상장도 안 했는데 무슨 지분이야. 허공의 돈일 뿐이지.”

“그걸 알면서도 승낙한 거예요?”

“흐흐. 나 바보 같지?”

어. 바보 같다.

나름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지분 이야기에 저렇게 홀라당 넘어가고 말이다.

그거 악덕 스타트업 사장들이 직원들을 꼬실 때 흔하게 써먹는 레파토리 아닌가.

어디 가지 말고 버티면 내가 지분 챙겨줄게.

하하. 도대체 뭘 믿고?

회사가 망하거나 다른 업체에 인수됐다고 하더라도 내부 사정이 적자일 경우 휴지 조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초년생들에게 회사 지분에 대한 제시는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불안하지만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것.

‘이런 사례를 뉴스에서 종종 보기는 했지만. 똑 부러진 김 대리가 당할 줄은 몰랐네.’

나는 안 됐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인데요?”

“여기서 한신 그룹 관련 행사가 있다고 해서.”

“한신 그룹 관련 행사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게 왜요?”

“우리가 한신 그룹 유튜브 영상 제작사거든. 영상 찍어달라고 그래서 왔지. 알잖아. 광고주가 해달라고 하면 해야지, 어쩌겠어.”

“비디오쉐어에서 한신 그룹이랑 계약도 했어요?”

“응. 계약한 지 얼마 안 됐어. 그런데 진형 씨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렇게 멀끔하게 차려입고선?”

김 대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행사 주인공이 바로 저거든요.”

“주인공? 진형 씨가?”

“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김 대리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박!! 진짜로 진형 씨가 기부하는 거야? 한신 그룹은 그저 서포터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튼 그렇게 됐네요.”

“대박! 대박! 진형 씨 비디오쉐어 나가고 진짜 잘 나가는구나? 나 진짜 감동 받았어!”

“시간을 너무 지체한 거 같네요. 진정하셨으면 다시 이동할까요?”

“아! 네 정신 좀 봐. 그래야지. 가자 가자. 클라이언트에게 욕먹겠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화장을 고치고선 앞장 서 나갔다.

그래. 이런 게 김 대리지.

노인정 앞마당에 설치된 행사장으로 이동하니 정성수 차장님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안녕하세요.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가 김 대리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나는 아무일 아니라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촬영하시는 분이 제가 전에 알던 분이라서요. 그나저나 오늘 행사는 제가 뭘 하면 되는 건가요?”

“별 건 없습니다. 안마의자랑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노인정에 전달하고 사진 몇 장 찍어주시면 됩니다.”

“영상도 찍는다고 들었는데요?”

“아. 저희 한신 그룹 유튜브 계정에도 올릴까 해서요. 싫으시면 영상은 찍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김 대리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을 것 같습니다.”

괜히 김 대리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주 짧은 스케치 영상으로 제작할 거고, 이런 건 그다지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이슈는 아니니까 영상 조회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네.”

“그리고 건강검진 프로그램은 노인정에 다니시는 모든 분에게 혜택이 주어질 겁니다.”

“정말요?”

“네. 아가씨께서 강력하게 어필하셔서요.”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한 일이죠. 그럼 시작할까요?”

나는 어르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인정 대표에게 안마의자와 건강검진 프로그램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적힌 피켓을 전달했다.

노인정대표와 피켓을 한 쪽씩 들고선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을 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고맙다며 소리치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보니까 괜히 어깨가 으슥해진다.

“고마워요! 안마 잘 받을게!”

“진짜 심성이 착한 친구네. 고마우이.”

행사가 모두 끝나고 나는 정 차장님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걸 왜 한신 그룹 유튜브 영상에 올리시려는 건가요? 전에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고 해서 기부 주체가 한신 그룹이 아닌 저로 하자는 거 아니셨어요?”

“아. 제가 미리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그는 내게 자신들이 구상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전에 하연이 어린이집에서 갔던 스키장이 한신 그룹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자회사 개념이랄까.

그곳에서 사람을 구하는 등 선행을 펼친 내게 한신 그룹이 그룹 차원에서 보상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극구 받지 않겠다고 하더니 노인정에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역제안해서 한신 그룹에서도 오케이를 했다는 것.

내가 홍보 쪽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 그럴싸한 이야기다. 틀린 말도 아니고.

“그랬군요. 이해했습니다.”

“사전에 설명해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뭘요. 재벌가 자녀 케어하려면 정신없으실 것 같긴 해요.”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보더니 말없이 씨익 웃었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행사장을 떠나려는데.

나와 정 차장님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김 대리였다.

“진형 씨!”

“응? 아직 안 가셨어요? 촬영 다 끝났잖아요?”

그녀는 떠나가는 정성수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한신 그룹이랑 잘 아는 사이야?”

“아뇨. 갑자기 그건 왜요?”

“그래? 내가 알기로 저 사람이 한신 그룹에서 굉장히 잘 나가는 에이스로 알고 있어서.”

“그래요?”

“응. 나랑 커뮤니케이션하는 한신 그룹 홍보팀 담당자가 그러더라고.”

“뭐라고요?”

“오늘 행사장에 오는 그룹 관계자를 특별히 조심하라고. 그룹에서 키우는 실세인데 절대로 기분 상하게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그렇구나. 정 차장님 회사에서 잘나가는 분이었구나.

‘그래서 꿈이 한신 사장이었던 건가?’

아무튼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우리도 이쯤에서 헤어질까요?”

“어. 그, 그래. 아무튼 멋지다. 좋은 일 하고 그걸 자기가 아니라 노인분들 위해서 기부하고.”

“뭘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런데 진형 씨.”

“네?”

“저번에 내게 했던 말 아직 유효하지?”

“어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한다.

“나중에 자기 회사 차리면 나 꼭 데려가겠다는 거?”

“아. 하하. 그거요?”

“농담으로 하는 말 아냐. 자기 요즘 잘나가잖아? 하연이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콘진원에서 발표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

회사 다닐 땐 관심도 없더니 나오니까 스토커가 따로 없다.

“알고 계셨어요?”

“진형 씨 회사 다닐 때 내가 좀 엄하게 한 건 맞지만. 그래도 애정이 있으니까 그랬던 건 알지?”

“네네. 뭐 그러셨겠죠.”

“아이참. 진짜라니까. 나 대학 다닐 때도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말 한마디도 안 했어. 애정이 있어야 쓴소리도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녀가 비굴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애원하는 게 참 웃기다.

서는 데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더니.

씁쓸한 한편 비디오쉐어를 나오길 참 잘했단 생각도 든다.

#

요새 들어 어쩐지 민규를 볼 시간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식사 시간도 달라지고 간식 시간도 달려졌네.’

어쩌면 주은영 원장이 의도적으로 시간대를 다르게 배치했는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나랑 민규랑 격리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아쉽다거나 서운한 건 아니다.

애초에 민규랑은 반도 달랐고.

그런데 민규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다른 애들이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관심을 표한다.

같은 사랑반 친구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인물은 양갈래 머리를 한 귀여운 소녀. 소윤이었다.

“하여나아!”

“응?”

“왜에 민큐유우 오빠아라앙 아노라?”

안 노는 게 아니라 못 노는 거다.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

그녀는 전부터 나랑 놀고 싶었다면서 소꿉놀이를 제안한다.

뭐 상관없겠지.

그나마 소윤이는 사랑반 아이 중에서 자신을 제외하고는 가장 언어능력이 발달한 친구였다.

적어도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안다.

‘다른 애들은 뭐. 여전히 자기 멋대로지.’

그녀와 한창 소꿉놀이하고 있는데 소윤이가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나아 니네 딥에 놀러 가도 돼야?”

“우리 지베?”

“웅! 놀러어 가고오 시포써!”

“그래에.”

아빠도 내가 민규뿐 아니라 여러 명의 친구와 사귀는 걸 더 좋아하겠지.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3살이나 위인 민규랑만 너무 놀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나랑 소윤이가 놀고 있는 곳으로 접근한다.

사랑반에서 가장 덩치가 큰 남자아이. 주하였다.

“야아!”

“깜딱이야!”

주하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치자 소윤이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주하는 자신의 행동으로 소윤이가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나도오.”

“뭐가아?”

“나도오. 갈래에. 니네 집.”

그러자 너도나도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다며 이쪽으로 몰려든다.

그동안 민규만 우리 집에 왔던 게 부러웠던 걸까?

나는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쪼아아! 대시인 약소옥!”

“뭐얼?”

“울 아빠아 방해에 하며언 저얼대 안 돼!”

“응!”

당연한 이야기이지 않나.

아빠는 늘 영상을 만든다고 분주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면 작업에 지장이 있겠지.

오후에는 초콜릿 만들기 시간이 이어졌다.

조그마한 고형 초콜릿을 뜨거운 물에 녹여서 아기자기한 틀에 넣고 굳히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이 쉬운 걸 친구들 대다수는 엄청 어려워한다.

내 걸 다 만들고 주변의 친구들을 도와주자 다들 고맙다고 난리다.

“고마워어! 하여나!”

“하여니 최고오!”

“헤헤. 하여나 나도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더니.

전생에 가수였을 때는 남을 돕고 싶어도 도울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나를 숭배하고 열광하는 팬들.

‘남을 돕는다는 거. 무척 기분 좋은 일이구나.’

이게 뭐라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초콜릿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하원 시간이다.

아빠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서 초콜릿 상자를 뒤에 숨긴 채 조심스럽게 현관 쪽을 향해 나갔다.

아빠는 평소와는 다른 내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에게 짠하고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하연아 이게 뭐야?”

“선무울!!”

내용물을 확인한 아빠의 얼굴에 감동이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헤헤. 요즘은 아빠의 저 얼굴을 보는 게 사는 낙이다.

“하연아아!!!!”

그는 나를 들고선 내 볼에 사정없이 뽀뽀한다.

아이참. 다 좋은데 이건 좀 부담스럽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우리 부녀 옆으로 소윤이가 다가왔다.

마치 조금 전 내가 아빠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아기 고양이가 걷듯 조심스럽게. 뒤에는 무언가를 숨기고 말이다.

그녀는 아빠를 보더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내가 했던 행동을 따라 했다.

“이거어...선무울...”

응? 소윤아.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설마 이거 우리 아빠 주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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