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43화
나는 주인 할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할머니. 저분들은 어디서 오신 거예요?”
“우리 노인정 친구들이고마.”
“노인정이요?”
“하모. 여기 매출 올려준따꼬 떼로 왔다카이. 못말린다 아이가.”
오늘 따라 주인 할머니 사투리가 구수하다.
같은 노인정에 다니는 분들이 매출 올려주겠다고 단체로 방문하셔서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아무튼 식당에 사람이 많아진 건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다.
나와 하연이가 여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데 잠깐.
노인정이라면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공간 아니던가.
안마의자는 이제 갓 서른이 된 나 같은 놈이 아니라 저런 어르신들에게 더 필요한 물건일 터.
‘건강검진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나는 짱구를 굴리다가 정 차장님에게 문자를 넣었다.
<차장님. 혹시 안마의자, 저희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곧바로 답장이 온다.
<물론이죠. 말만 하십시오.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관악구 신림동 ㅇㅇ노인정으로 배달 부탁드립니다>
<네? 노인정이요?>
그 문자를 끝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정 차장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노인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노인정에 기증하려고요.”
“네? 안마의자를요? 엄청 비싼 건데 이거?”
“저보다는 어르신들한테 더 필요한 물건 같아서요.”
“허허. 실례지만 노인정 측과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아뇨. 하지만 정 차장님이라면 잘 이야기해주실 것 같아서요.”
상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알았다고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자택 주소는 알려주셔야겠습니다. 건강검진에 필요한 문진표랑 약 등을 받으셔야 하니까요.”
“아 그것도 말인데. 혹시 노인정 분들에게 양도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요?”
“알아보니까 저한테 해주시기로 한 건강검진이 최고급 프로그램이라서 무척 비싸더라고요. 입원해서 1박 2일로 진행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만.”
“하연이 때문에 입원은 무리고, 이걸 대중적으로 많이들 하는 검진 프로그램으로 바꾸면 적어도 열 분 이상이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희가 선물을 드리고자 하는 건 진형 씨입니다.”
“어떻게 쓰든 자유라고 하셨잖아요? 안 될까요?”
그는 고민하는 것 같더니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하연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빠아. 누구야아?”
“응. 내꿈은한신사장님. 하연이 너도 알지? 우리 하연이 채널에 자주 댓글 달아주시는 분.”
“웅!”
“그 분이 아빠한테 뭘 선물해주고 싶다고 하는데 아빠가 받기보다는 다른 분들이 받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 얘기 한 거야.”
“선무울 바든거 또오 선물 주려고오요?”
“하하. 맞아. 역시 우리 하연이는 이해력이 좋네. 많이 먹어.”
“네에!”
하연이와 순대를 다 먹기 전.
정 차장님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는 알겠다면서 대신 이거 한 가지만은 양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저희가 노인정에 안마의자를 기증하는 날. 진형 씨도 반드시 그날 노인정에 오셔야 합니다.”
“그건 왜죠?”
“이 물건을 주는 주체는 저희 한신 그룹이 아니라 바로 김진형 씨니까요. 저희가 노인정에 안마의자를 기증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 뭐냐,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드리면 안 되는 건가요?”
“그것도 방법일 수 있겠으나 그러면 스케일이 커집니다. 어디는 주고 어디는 안 줄 수 없으니까요. 주려면 서울시에 있는 많은 노인정에 사회공헌 활동을 목적으로 기증해야겠죠.”
“으음. 생각보다 이야기가 복잡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날 스케줄 빼둘게요.”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일정은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아 맞다. 잠시만요.”
나는 그가 하연이의 팬이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하연이를 바꿔주었다.
“여보떼요오?”
“아앗! 하연이? 하연이니?”
“네! 제카 김하연인데요오! 누구세요오?”
“나 내꿈은한신사장님이야! 하연이 채널에 매일 댓글 다는! 아저씨 알아?”
“네에! 자알 알아요오! 댓그을 남겨어주셔서어 고맙스읍니다아.”
“흐흐흐흐. 뭘 그런 걸 가지고. 하연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해. 알았지?”
“네에!”
그는 무척이나 감명 받은 듯 하연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팬 미팅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
팬과 스타가 만나면 팬 미팅이지.
#
아이들이 모두 하원한 어린이집에는 원장인 주은영과 사랑반 담임인 신유주 둘만이 남아있었다.
신유주는 혼자서 어린이집을 모두 청소한 뒤 원장실로 들어왔다.
“이모.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다른 선생님들 다 일찍 보내고 저한테만 할 말이 있다니?”
“원장 선생님.”
“퇴근 시간 지났잖아요. 아무도 없는데 무슨 원장 선생님이에요. 이모도 참.”
신유주의 핀잔에 주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유주야. 너 3년 전에 있었던 일 기억나니?”
“3년 전이요?”
“그래. 6세 반 남자애 하나가 여자애를 밀쳐서 다친 일 있었잖니.”
“아! 준서랑 지혜요?”
“맞아. 하필 책장 모서리에 얼굴이 찢어져 10바늘이나 꿰맸잖니. 휴. 아직도 그때 일이 생생해.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지지. 애는 미친 듯이 울지. 다른 애들은 공포에 질려서 소리 지르지.”
“기억나죠. 당시 하나 샘이 담임이었잖아요?”
“맞아. 그 일로 남자애는 퇴소하고, 하나 샘도 자기가 애들 관리 못했다며 책임지고 사표 내고.”
“아쉽게 됐어요. 하나 샘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나는 아직도 하나 샘한테 너무 미안해. 자기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원장인 내가 책임지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야.”
“이모...”
신유주는 주은영의 손을 꼭 잡고는 괜찮다며 다독였다.
“그건 사고였잖아요. 준서가 평소 사고뭉치도 아니었고, 그날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바닥에 넘어지다가 그런 거였고요.”
“휴. 그래도 지혜가 크게 다친 건 사실이야. 나는 아직도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잊히지가 않아.”
“이모.”
“그래서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민규랑 하연이 말이야. 조금 더 떼어놓으면 안 될까? 애들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만 말이야.”
“민규랑 하연이요?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계속 그때 일이 마음에 걸려.”
3년 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유주 역시 주은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두 아이를 굳이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조금 떼어놓겠다는 게 뭘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일단 사랑반이랑 희망반은 내부 활동이든 외부 활동이든 시간표를 좀 다르게 짜면 어떨까 싶은데.”
“시간을요?”
“응. 외출이야 따로 하니까 상관없겠고. 식사 시간이랑 간식 시간을 바꾸면 괜찮을 것 같은데.”
식사 시간과 간식 시간이라.
그 정도는 크게 문제없을 것 같다.
최소한 인위적인 격리조치는 아니었으니까.
신유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그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이해해줘서 고맙다, 유주야.”
“뭘요. 이모가 여기 원장인걸요.”
“그건 그렇고. 유주 너 말이야. 시집갈 생각은 없는 거야?”
“네?”
하연이와 민규 이야기를 하다가 왜 난데없이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그것도 집안 사람 모두 금기시하고 있는 주제를 말이다.
신유주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런 모습조차 이모인 주은영에게는 햄스터가 두 볼을 부풀리고 토라진 모습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도 이제 서른이잖니. 이모가 잘 아는 친구가 있는데. 거기 조카가 한국대 법대 출신이라더라. 어때? 한번 만나볼 생각 없어?”
“됐어요 그런 건. 전 골드미스가 꿈이라고요.”
“골드미스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게 아니면 누구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응?”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연애 못 해 본 지 백만 년이 넘었는데.
자조 섞인 웃음을 보이려던 찰나.
신유주의 마음속 한편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모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그를 처음 만난 건 학교 근처 한 술집이었다.
과 동기인 송재희가 갑자기 어깨를 툭하고 치더니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주야. 쟤 좀 봐. 꽤 생기지 않았냐?”
“누구?”
“가운데에 검은색 모자랑 검은색 점퍼!”
“음. 뭐 그럭저럭 괜찮네.”
“그럭저럭은 무슨. 저 정도면 완전 S급인데!”
얘는 맨날 게임을 하는 것 같더니 S급이라는 표현이 아예 입에 붙었구나.
“됐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래.”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쩐 일인지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 테이블과 우리 테이블이 붙어있는 게 아닌가.
동기들은 들뜬 얼굴로 모르는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황당한 얼굴로 과 동기들을 바라보았더니 송재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유주야! 얘네도 우리 학교 다닌대. 합석 괜찮지?”
“으응.”
아 진짜 저놈의 지지배.
왜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일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분위기 어색해지게 갑자기 자리를 뜰 명분도 없고.
신유주는 가장 끝에 자리에 앉고는 눈앞에 보이는 맥주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이 맛이지.
맥주가 인류에게 없었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앞에 앉은 남자. 그러니까 조금 전 송재희가 괜찮은 애라고 했던 검정 모자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뭐지? 내 얼굴이 그렇게 예쁜가?
그녀는 시니컬한 말투로 툭 뱉었다.
“왜요?”
“저기 그 맥주잔. 제껀데요.”
“네?”
별생각 없이 테이블 위에 있기에 마셨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이동하면서 그릇과 컵 등의 위치도 옮겨진 모양이다.
그녀는 황급히 맥주잔을 모자 쓴 남자 쪽으로 밀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진짜 모르고 마셨어요.”
“괜찮아요. 안 계실 때 갑자기 합석한 거니까. 저희가 죄송하죠.”
8명의 남녀는 그날 밤 늦게까지 인근의 술집을 오가며 술을 마셨다.
술집은 3차까지 갔던 것 같고 4차로 노래방을 간 것 같은데 하필 필름이 끊겼다.
끄아아아.
대체 얼마나 잔 걸까.
온몸이 쑤셔왔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웬 잔디밭 위에 누워있는 게 아니겠는가.
거기에 처음 보는 검은색 점퍼가 위에 덮여 있고.
헉.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 지금 밖에서 노숙한 거야?
화들짝 정신이 들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대학 인근의 한 공원이다.
그리고 한 2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어딘가 낯익은 사람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누군가하고 봤더니 어제 처음 만났던 검정 모자, 김진형이었다.
“끄으으윽!”
오래지 않아 그 역시 온몸을 비틀며 괴상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잤어? 어디 아프진 않고?”
“저기. 우린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야?”
“뭐? 기억 안 나?”
하나도 안 난다.
분명 노래방까지 들어갔던 기억은 얼핏 나는데.
내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자 그는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특별히 실수한 건 없었어. 단지 네 친구들은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너만 남았는데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아서 말이지.”
“그런데?”
“비틀거리면서 혼자 가겠다는데 그걸 내버려 둘 수 있어야지. 밤도 늦었겠다, 주변에 음흉한 시선으로 널 보는 남자들도 많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따라왔어.”
“따라왔다고? 그런데 우리 왜 야외에서 자고 있는 건데?”
자신은 대단히 진지한데 상대는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뭐야. 그럼 내가 어디 이상한 데라도 데려가길 원했던 거야?”
“뭐어!”
“농담이야. 네가 여기에서 쓰러져서는 움직일 기미가 없더라고. 어쩌겠어. 그래서 나도 네 옆에 누웠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내가 걱정돼서 따라와서는 여기서 같이 노숙했다는 거야?”
“응.”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신 차렸으면 이제 돌려줄래?”
“뭘?”
“내 점퍼 말이야.”
“..이게 왜 나한테?”
“네가 새벽에 하도 추워하니까 덮어줬지.”
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점퍼를 건네주었고 이어서 말했다.
“너 핸드폰 번호 알려줘.”
“뭐?”
“핸드폰 번호 알려주라고. 이렇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까.”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이후 몇 차례 만남을 이어갔고 오래지 않아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진형이는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연애.
하루하루가 늘 행복했다.
그렇게나 즐거웠었는데.
그러다 어떻게 헤어지게 된 건진 명확하지 않다.
녀석은 차츰 자기를 멀리했고, 우린 그렇게 이별이란 말도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내 애를 부탁한다니.
“휴우.”
신유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련한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말했다.
“이모. 저 선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도 마세요. 아셨죠?
“상대가 한국대 법대라니까?”
“한국대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요. 진짜 한 번만 더 남자 이야기 꺼내면 저 화낼 거예요!”
“아이고, 지지배 성격 하고는. 알았다. 나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지.”
알아요. 이모. 그래도 지금 그 말. 엄청 꼰대 같았던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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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차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불과 며칠 뒤.
안마의자와 건강검진 기부 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벌써 기증식 날이 왔다.
기증식이 다 뭐람.
이렇게 남의 이목을 끄는 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 차장님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성화를 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인정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비디오쉐어 다닐 때 내 사수이자 직장 동료였던 김소라 대리 말이다.
“어라? 진형 씨가 여긴 무슨 일로?”
“그러는 김 대리님은 여기 무슨 일이세요?”
무엇보다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AE였던 김 대리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었던 것이었다.
뭐지? 그새 직무를 바꿨나?
그런데 갑자기 김 대리가 울먹거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