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국힙원탑-42화 (42/135)

내 딸은 국힙원탑 42화

그녀는 가방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더니 내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준비성이 좋은 사람이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가르치는 재미가 있다.

왜 그렇지 않는가.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사람과 소극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의 차이.

아무래도 상대가 적극적으로 임하면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신명 나기 마련이다.

장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영상 기획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묻는다.

영상 기획이라.

이건 따로 정답이 없다.

장비야 이미 검증되고 가성비가 좋은 제품들 중에서 취사선택하면 된다지만, 기획은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니까.

‘하나하나 세심하게 스토리보드를 짜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라이브로 찍고 편집 없이 내보내는 사람도 있지.’

나는 잠시 고민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스타일의 문제라서 뭐가 더 좋다고 하긴 어렵네요. 혹시 민규가 연기할 때 대본 그대로 읽는 걸 좋아하나요 아님 상황에 따라 애드리브를 치는 편인가요?”

“음. 아직은 어려서 대본 그대로 읽는 편이긴 한데. 집에 와서는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제가 들어봐도 민규가 한 말이 더 상황에 잘 어울릴 것 같았고요.”

“그래요? 그러면 기획은 기본적인 것만 하고 즉석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그걸 추가하는 식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가요? 저는 또 스토리보드라는 걸 짜야 한다고 들어서 인터넷에서 양식을 다운로드해서 인쇄해뒀는데.”

“물론 스토리보드를 세세하게 짜고 가면 좋긴 한데. 이건 짧은 유튜브 방송이니까 너무 인위적이거나 기존 방식을 답습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거든요. 오히려 요즘은 숏폼이라고 1분 이내에 짧게 편집한 영상을 밀어주는 추세이기도 하고요.”

“1분이요? 으아. 그건 너무 짧네요.”

“사실 1분짜리 영상이 더 기획을 잘해야 하긴 하지만. 아무튼 요는 너무 기획에 매달리지 않아도 촬영과 편집만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무슨 영화나 드라마 찍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것조차 수첩에다 받아 적었다.

학창 시절에 꽤나 모범생이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민규 어머니.”

“네. 하연이 아버지. 말씀하세요.”

“혹시 괜찮으시면 하연이 채널 아트도 하나 만들어 주실 수 있으세요?”

“하연이 채널 아트요? 제가요?”

“네. 제가 만든 것보다 방금 만드신 게 훨씬 더 좋아 보여서요.”

“정말요?”

그녀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지더니 돌연 아랫입술을 지끈 깨문다.

뭐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기분 좋으라고 하시는 이야기는 아니죠?”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어쩜. 저 웹디 그만둔 지 7년이 넘었는데.”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부여잡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휴. 죄송합니다.”

“뭘요.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왜 갑자기 울컥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대학을 못 나왔어요.”

“아 네.”

“특성화고를 나와서 바로 웹디로 취업을 했는데 당시에는 나름 잘나갔거든요. 솜씨 좋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고요.”

“그러셨군요.”

“하아. 그러다 민규 아빠를 만났죠.”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워진다.

“젊은 나이에 임신.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출산. 이후로는 한 번도 포토샵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정말 오랜만에 만져본 거였고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익숙하게 잘하시던데요?”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좋게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무튼. 좀 그랬어요. 제가 포토샵을 다시 만지는 날이 오는 건 상상도 못 했거든요.”

“농담이 아니라 이쪽 일 다시 해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진짜요?”

“네. 유튜브 채널 아트나 썸네일뿐 아니라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들어간 여러 가지 배너 같은 건 외주작업을 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인정받으면 제법 돈벌이가 된다고 들었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인정을 받은 다음에 이야기다.

그전까지는 페이도 낮고 월급쟁이와 다르게 일이 꾸준히 들어오는 작업은 아니니까.

그런데 돈벌이라는 말에 민규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돈벌이는 괜찮아요. 돈은 제법 넉넉하거든요. 그래도 소일거리로 할 수 있다면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크으. 돈은 제법 넉넉하다니. 부럽다. 나도 소일거리로 영상 찍고 유유자적 살면 좋겠다.

아이들을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아서 우리는 컴퓨터를 끄고 아래로 내려왔다.

둘은 같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연이가 민규에게 무언가 화를 내고 있다.

“아니이야. 그게 아니고오! 아이 차암. 답탑해에! 오른 바알 먼저! 그 다으매 왼발!”

“어어. 알겠어. 오른발 먼저 나가고 왼발이란 말이지?”

민규가 하연이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3살 오빠가 아니라 3살 동생 같다.

민규 엄마도 그 모습이 웃겼는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 민규야. 지금 둘이서 뭐 하는 거니? 춤 연습하는 거야?”

“앗! 엄마 언제 왔어?”

“방금 왔지. 춤 연습 재미있어?”

민규의 얼굴이 홍시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른다.

“우리도 방금 한 거야! 추, 춤을 추긴 누가 췄다고 그래!”

그러자 하연이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툴툴댄다.

“아까부터 추움 추고 이써자나!”

“뭐래! 우리 방금 췄잖아!”

“어리니집에서 꼬짓말하눈 사람은 버얼 받는다고도 그랬는데에.”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어. 우리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게...”

민규 녀석 왜 저렇게 웃기냐.

이런 허당 컨셉으로 방송하면 꽤나 조회수가 나올 것 같다.

물론 민규 엄마가 그런 컨셉으로 방송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

최철상은 나이 서른에 순대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순대에 갈아 넣은 사람이다.

그렇게 10년을 순대 하나에만 매달린 결과.

이제는 제법 주변에서 인정받는 순대 장인이 되어 있었다.

‘순대 홀릭’이라는 가게의 매출도 안정적으로 나오고 있었고, 입소문을 타고 온라인 주문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최근에는 홈쇼핑 채널도 뚫어서 생산 속도가 주문량을 못 따라갈 정도였다.

맛있는 순대를 개발하기 위한 힘겨웠던 순간은 지나가고.

이제는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아빠와 딸이 허겁지겁 순대를 먹는 영상을 보고 말았다.

영상에 순대가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보지 않는 그에게 위대한 유튜브 알고리즘이 친절하게 인도해준 영상 말이다.

그동안 순대 먹방은 질릴 정도로 봤지만 이건 그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식당이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이.

그저 말없이 순대를 흡입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군침을 돌게 만든다.

아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나 행복하게 순대를 먹을 수가 있는 거지?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홍보를 목적으로 모델을 쓸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로 해야겠다고.

그 뒤로 꼬마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에게 문의 메일을 끊임없이 보냈지만, 결코 답이 없었다.

아쉽게도 최근에는 그 채널에 먹방이나 순대 관련된 영상은 잘 없었다.

대신 엄청나게 양질인 뮤직비디오가 올라와 있다.

댓글도 어마어마하고, 구독자 수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었다.

‘더 지체하다가는 더 이상 내가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겠는데.’

그는 황급히 모델 제안이 아닌 선물 공세로 전략을 바꿨다.

<안녕하세요. 저는 순대 홀릭 대표인 최철상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하연이가 분식집에서 순대 먹는 영상을 무척 감명 깊게 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중략) 혹시 괜찮으시면 집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희가 만드는 제품을 댁에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최철상은 이렇게 메일을 쓰고는 발송 버튼을 눌렀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다 떨린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건 좀 받아라. 좀!’

최철상은 책상 위에 놓인 순대를 손으로 집어 먹고는 이번엔 제발 꼭 연락이 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지금 같아서는 홍보모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대신 우리가 만든 제품은 꼭 좀 먹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맛이 어땠는지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고.

순대 장인의 진심이었다.

#

“하연아. 순대 먹고 싶니?”

“응!!”

단지 순대라는 단어를 꺼냈을 뿐인데 하연이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타고난 순대 덕후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하나 분식에서 사서 먹는 거 말고 우리가 직접 집에서 쪄 먹는 순대 말이야. 괜찮겠어?”

“쪼아요!”

“알았어. 어떤 순대 가게 아저씨가 우리 하연이 순대 좋아하는 거 알고 순대를 선물하고 싶으시다네?”

“와아!!”

“전에 하연이 널 모델로 쓰고 싶다고 한 분 같은데, 이분도 정 차장님 못지않게 끈질기구나.”

“모데엘?”

하연이가 커다란 두 눈을 금붕어처럼 깜빡이며 물었다.

나는 하연이의 고사리처럼 작은 손을 붙잡고 천천히 말했다.

“응. 너를 이 음식. 그러니까 순대를 소개하는 대표 얼굴로 쓰고 싶다는 거야. 하연이가 순대를 먹으면서, 이게 이렇게나 맛있어요! 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지.”

“오오옹.”

하연이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왜? 관심 있어?”

“네에! 수운대에 마시쩌어! 하여니는 수운대에 쪼아!!”

“하하. 맛있기야 맛있지.”

하연이가 순대 모델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탈하달까 푸근한 인상도 줄 수 있을 것 같고.

뭣보다 하연이는 이하연 뺨치는 순대 덕후니까.

본인도 좋아하는 걸로 돈을 벌면 행복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나.

일단 해당 식품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먹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맛이 없는 걸 맛있다고 소개할 순 없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정성수 차장님 건은 어쩌면 좋을까나?’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아침 9시.

정확하게 문자를 보냈다.

집 주소를 알려달라면서.

받은 이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면서.

제발 자기 좀 살려달라면서 말이다.

하아.

도대체 남의 집 주소를 알려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나 많은 건지.

순대도 받기로 했는데 그냥 이것도 콜 할까?

아니다.

같은 호의라도 물건값의 차이가 컸다.

순대는 해봤자 얼마나 하겠나.

하지만 안마의자와 최고급 종합건강검진권이라니.

이제 겨우 서른.

그런 거 없어도 내 몸은 튼튼하다.

순대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하나 분식 순대가 먹고 싶어졌다.

“하연아. 오랜만에 하나 분식 가서 순대 먹을까?”

“쪼아요! 수운대에!!”

나는 하연이의 손을 잡고 하나 분식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어르신들이 많다.

평일에는 인근 학교의 아이들이.

주말에는 어른들이 많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르신들이 단체로 찾은 적은 처음이다.

‘뭔 일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알아 본 주인 할머니가 접시를 갖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