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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32화 (32/135)

내 딸은 국힙원탑 32화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민규 엄마랑은 초면도 아니고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학부모니까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서른입니다.”

“아하. 저랑 동갑이네요.”

“그런가요?”

“네. 둘 다 올해로 삼십대 진입이네요.”

삼십대.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는데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별거 없다.

그나저나 민규 엄마가 서른이라는 이야기는 민규를 24살에 낳았다는 소리인데.

부모님 세대도 아니고 확실히 그녀도 일찍 아이를 낳은 편이다.

“결혼을 빨리하셨나 보네요?”

“아 네 뭐.”

그녀를 별로 대답하기 싫은지 말끝을 흐리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하연이가 유튜브 한다고 하셨죠?”

“네.”

“그건 잘 되나요?”

“그럭저럭이요.”

“하연이가 예쁘니까 뭘 하든 잘할 거예요.”

“그래야죠. 그런데 민규는 어쩌다가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우리 민규요?”

확실히 민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의 목소리에 생기가 더 돌았다.

“솔직히 우리 민규가 좀 잘 생겼잖아요?”

내가 딸바보인 건 맞지만 민규 엄마도 아들바보가 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민규가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하하. 네. 인정합니다.”

“이런 데서 내숭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하연이 아버님이 옆에 계셔서 드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히 하연이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요?”

“민규 이외에 이렇게 빛이 나는 아이는 처음 보았으니까요.”

우리 하연이가 좀 예쁜 건 맞지.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민규가 잘생겨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것도 있고. 사실 제 꿈이 배우였어요.”

“그러셨군요.”

실제로 그녀는 꽤나 미인이었다.

길을 지나가다가 한 번쯤 뒤돌아볼 만한 얼굴과 몸매의 소유자.

그런데 자기 꿈이 배우였다고 해서 그걸 자식에게 시키는 건 일종의 강요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는 최근 유명한 한 TV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왜 유명한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아이들 상담해주는 TV 프로그램 있잖아요?”

“하연이 아버님도 그거 보시는구나? 잘 알죠. 요즘은 바빠서 잘 못 봤는데. 왜요? 거기서 무슨 재미있는 사연이라도 나왔나요?”

“재밌다기보다는. 이런 말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왜요?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인데요?”

그녀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별 건 아니고, 방송을 보다가 불현듯 민규가 떠올랐어요.”

“우리 민규를요?”

“네. 등원할 때 보면 민규가 멍하니 서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나온 애도 딱 그런 표정을 짓더라고요. 의욕이 없달까. 세상 다 산 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서는.”

“아!”

그녀는 그게 무슨 표정인지 잘 안다는 듯 짧은 탄식을 뱉고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물론 그게 민규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닌데, 거기서는 부모가 아이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 아이가 일종의 번아웃을 겪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번아웃이요? 애가요?”

“네. 부모의 기대는 높은데 자기는 그다지 마음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아이가 조금씩 마음을 닫고 수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어요.”

“..그랬구나.”

다시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손을 저으며 부연했다.

“민규랑 민규 어머니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냥 때때로 민규가 짓는 표정을 보면 걱정이 돼서 그만.”

“뭘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 것 같아요. 말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네요. 제가 주제넘게 참견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뇨, 절대요. 사실 제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많이 부족해요. 민규한테 너무 많은 부담감을 주는 건 아닌지. 늘 반성하면서도 그게 제 뜻대로 잘 안되네요.”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고?

이혼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물어볼 만한 이슈는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이쪽을 쳐다보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어휴.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내가 모른척하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감사해요. 사실 민규가 말썽을 자주 부려서 이렇게 학부모끼리 툭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습니다. 저도 사실 민규 어머님 말고는 이렇게 이야기 나눈 다른 학부모는 없거든요.”

“정말요? 여기로 오게 돼서 정말 다행이네요.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어서 올까 말까 고민 많이 했거든요.”

이후 우리는 육아를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는 가치관이나 교육관 등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육아라는 공통의 주제가 있으니 공감도 잘 되고, 금방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스키장에 도착해 있었다.

#

6, 7세 반은 스키를 타러.

5세 이하 반은 썰매를 타러 이동했다.

반이 달랐던 관계로 이후 민규 엄마랑은 헤어졌고, 나는 눈썰매장에서 하연이가 썰매를 타는 걸 구경했다.

혼자서 사진기를 들고 하연이의 모습을 찍던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며 이쪽으로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꺄아아아! 비키세요! 비켜어!!”

대다수 사람들이 아직 위에서 대기 중에 있는데 웬 젊은 여성이 나를 향해 다이렉트로 돌진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탈 정도의 완만한 경사였기에 속도가 빠른 건 아니었지만, 상대는 당황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안전띠를 뚫고 나갈 기세.

나는 카메라를 냅다 바닥에 던지고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상대를.

- 쿠웅!

나는 여성과 부딪힌 직후 뒤로 넘어졌고 여성 역시 옆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나와 부딪친 덕분에 안전띠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나 역시 두꺼운 겨울 패딩을 입고 있었던 게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보다는 충격이 강하지 않다.

눈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아야야. 쏘리. 아임 쏘 쏘리.”

어디서 외국물을 먹었는지 상대는 쏘리라는 말만 반복해서 할 뿐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어디 다치셨어요?”

“다리가 좀..”

나는 그녀를 바닥에서 일으켜주었다.

그러는 사이.

썰매장 안전요원이 나타났다.

그들은 신속하게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가 카메라가 생각났다.

푹신한 눈에 떨어져서 그런지 다행히 카메라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유주가 다가오더니 괜찮냐고 묻는다.

“괜찮아?”

“응. 멀쩡해.”

“저 여자는 위험하게 혼자서 왜 저런 거래? 자기보다 훨씬 어린애들도 사고 한번 없이 잘 타는데.”

“하하. 눈썰매 처음 타 보는가 보지.”

나는 유주를 다독이고는 다시 카메라를 꺼내 하연이를 찍기 시작했다.

하연이가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나까지 덩달아 즐거웠다.

#

“하아. 아가씨. 그래서 제가 조심하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갑자기 그렇게 혼자서 막 내려가시면 어떡합니까!”

한신 그룹의 에이스. 정성수는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는 젊은 여성을 나무라며 혀를 찼다.

이 일을 맡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하필 사고가 나다니.

차장으로 승진한 이후 정성수는 새로운 업무를 맡아야 했다.

바로 미국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한신 그룹의 막내딸. 이세미를 보좌하는 일이었다.

원래 총수 일가의 케어는 비서실의 업무였지만, 위에서 꼭 짚어서 그에게 이세미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일도 잘하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높으니 말썽꾸러기 이세미를 케어하는 데 제격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정성수는 그녀의 보좌관이 된 지 며칠 만에 당장이라도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아무리 조심하라고 조언해도 씨알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도 그렇게나 조심해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는데 혼자서 내려가다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나.

이세미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핫도그를 사러 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안전요원의 말로는 밑에서 누군가가 붙잡아준 덕분에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은 거라고 한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군.’

슬하에 있는 3남 2녀 중 이창돌 회장이 가장 아낀다는 이세미가 큰 부상을 입었더라면.

자신의 꿈인 한신 사장은커녕 당장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간단한 찰과상에 불과하다고 하니 한시름 놓인다.

정성수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 이세미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아가씨. 저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좀 자제해주세요. 네? 아가씨가 다치면 저는 시말서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혼자서 중얼거리기 바빴다.

“나를 구해준 그분. 어디 다치진 않으셨는지 모르겠네.”

어이구. 진짜 철부지도 저런 철부지가 없다.

이세미는 올해 스물다섯.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았던 그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막내에 제멋대로의 성격이긴 했지만 자식 중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 보니 이창돌 회장의 기대가 컸다.

이 회장이 다른 재벌가 회장들에게 너희 자식 중엔 하버드 출신 없지? 라고 자랑한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회사의 에이스인 정성수에게 그녀의 관리를 맡긴 것이다.

하지만 정성수는 어서 일찍 퇴근해서 김하연의 동영상을 보며 고단했던 마음을 치유하고 싶을 뿐이었다.

온종일 이세미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수명이 반쯤은 깎여나가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세미가 갑자기 엉뚱한 지시를 내렸다.

“정 차장님.”

“네?”

“조금 전에 저랑 부딪쳤던 남성분. 찾을 수 있죠?”

“아가씨랑 부딪힌 남성이요? 혹시 이름이나 신원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계십니까?”

이세미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찾으라고.

정성수는 그래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애써 물었다.

“그럼 그분의 옷차림이라든가 특이 사항이 있을까요?”

“흰색 패딩을 입고 계셨고요. 음. 맞다! 저랑 부딪히기 전에 카메라를 밑으로 던지셨어요! 어쩜! 저를 붙잡기 위해 카메라를 버리기까지 했던 거예요! 대박!”

그럴 리가 있겠나. 놀래서 손에서 놓은 거겠지.

요즘 같은 시국엔 모두가 골치 아픈 일과 엮이는 걸 꺼린다.

좋은 일 했다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아까 같은 상황도 남을 구하려다가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일 아니었던가.

“한번 찾아는 보겠습니다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안 돼요! 꼭 찾아내야만 해요!”

어휴. 저 철부지.

정성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고생을 시키고도 승진이 제 뜻대로 안 되면. 그땐 회사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하겠노라고.

#

스키장에서 돌아올 때는 다행히 아이들이 타는 버스를 빌려 탈 수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부모의 차를 타고 곧장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나는 유주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하연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하연이도 오랜만의 외부 활동에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나도 오늘은 빨리 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눕는데 모르는 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누구지?

070 번호는 아니고 031로 시작되는 번호라 별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웬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오늘 흰색 패딩을 입고 ㅇㅇ 스키장 방문하셨나요?”

“네? 방문한 건 맞는데. 그건 왜요?”

“거기서 썰매장 이용하셨고요?”

“네. 맞습니다. 제가 타진 않고 구경만 했어요.”

“혹시 한 여성분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구해줬다기보다는 뭐. 그랬죠.”

구해줬다는 말도 우습지만 구해주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좀 그랬다.

내가 그때를 떠올리는 사이.

상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이제야 찾았네. 감사합니다.”

“뭐가요?”

“위에서 손님을 찾는 분이 계셔서요. 얼마나 전화로 쪼는지. 어휴.”

위에서? 이건 무슨 의미일까.

그는 이제야 속이 시원해졌다는 듯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그분에게 손님 연락처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네? 제발요.”

얼마나 시달렸는지 다 큰 남자가 애원을 다 한다.

졸리기도 하고 상황도 잘 모르겠다.

“네. 뭐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그와 전화를 끊고 10분 정도나 지났을까?

또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

받고 보니 살짝 어눌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오늘 썰매장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나보고 생명의 은인이라며 꼭 한번 얼굴을 뵙고 만났으면 좋겠단다.

내가 사는 동네로 갈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면서.

우리 동네로 와준다면야 뭐.

그런데 그녀의 적극성이 예상 밖이다.

“그럼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이요?”

아니 스키장 측에 연락처 알려준 지 10분 만에 전화하는 것도 그렇고, 내일 바로 보자니.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이게 그 정도로 다급한 일이었나?

당황스럽긴 했지만 딱히 내일 할 일이 없던 나는 그러자고 답했다.

다음 날 오후.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낯익은 인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연이의 골수팬인, 내꿈은한신사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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