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27화
앞에 2팀이 먼저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세 번째 차례였다.
나는 하연이와 무슨 노래를 부를지 상의했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캐럴이 좋지 않을까 싶다.
“하연아. 혹시 ‘미리 크리스마스’ 알아?”
“미리이 쿠리스마쓰요?”
“응. 이하연이 부른 유일한 캐럴 말이야.”
미리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연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곡이었다.
지금 시기에 부르기 딱 좋은 노래.
하연이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쪼아요!”
“그래. 그럼 아빠는 뒤에서 박수칠 테니까 네가 앞에서 노랠 불러.”
“으음. 아빠야도 가치 부르며언 안 돼요?”
“나도?”
“네에!”
노래방에서야 수도 없이 불러댔지만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는 불러 본 적이 없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빤 노래 별로 못 하는데?”
“울 아빠아 노래 잘해! 진차로!”
윽. 알았어. 하면 되잖아.
얼굴 팔리는 건 좀 부끄럽지만, 하연이가 함께 부르자는데 혼자만 내보낼 순 없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잘 들었습니다. 자! 다음은 귀여운 따님과 함께 오신 아빠와 딸의 순서입니다! 무슨 곡으로 부르실 건까요?”
“이하연의 미리 크리스마스로 하겠습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좋죠. 저도 참 좋아하는 곡입니다. 하하. 그럼 무대로 나가주세요.”
나는 하연이와 함께 식당 한쪽에 마련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전방을 보니 많은 이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왜 몇몇 가수들이 무대공포증을 가지는지 일견 알 것 같다.
끽해봤자 100명도 안 되는 자리인데 중압감이 장난 아니다.
‘되게 부담스러운 자리네.’
이윽고 스피커에서 반주가 흘러나왔다.
캐럴답게 상큼하고 발랄한 연주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하연이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한 소절씩 돌아가면서 부르자고 했는데 첫 소절은 하연이가 담당이었다.
“하느을에썬 하야안 누니 오오코~”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반짝인다.
내 차례다.
“모두가 즐거운 성탄절.”
다행히 초반부터 삑사리를 내진 않았다.
하연이는 방긋 웃으며 나를 리드했다.
“우리으는 두 소늘 자았코.”
“함께 이 길을 걸었지.”
헤헤. 원래 이 노래는 혼자 부르는 곡인데 듀엣 송으로 부르니까 감회가 남다르다.
“까야! 아기 이쁘다아!”
“잘 한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느낌.
그렇다면 나도 좀 더 진심을 담아서 불러볼까나.
“심장이 쿵쿵! 이 기분 너는 알까?”
고음 부분인데 나름 힘을 주어 불렀다.
하연이도 이에 맞춰 옥타브를 높인다.
“나의 마음으을! 너또오 아라주었으면언~”
언제부터였을까.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우리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른다.
‘이게 말로만 듣던 떼창이구나.’
가게 안은 온통 미리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하늘에선 하얀 눈이 오고!”
“하늘에선 하얀 눈이 오고!!”
“모두가 즐거운 성탄절.”
“모두가 즐거운 성탄저얼!!”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4분 여의 흥겨운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하연이도 살짝 흥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어쩜 이렇게 예쁜지.
나는 하연이를 꼬옥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앵콜! 앵콜! 앵콜!!”
“휘이유! 멋진 공연이었어요!”
“아빠도 멋지고, 딸도 잘 부른다!”
“너무 예쁜 부녀예요! 최고다!”
우리는 축하해주는 관객들에게 인사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직원이 10만 원 상품권을 건네더니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진짜 잘 부르시네요. 농담이 아니라 1등 하시겠는데요?”
1등이라.
그럼 좋고.
#
미리 크리스마스는 이하연의 미니 5집에 수록된 곡으로,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타이틀곡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다.
이제 막 썸을 타고 있는 커플이 성탄절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하연의 아비는 그 노래를 듣더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미친놈들. 외국 명절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는 매사에 부정적이었고 단 한 번도 자신의 곡에 좋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김진형은 부끄러워했지만, 일반인치고는 제법 노래를 잘 불렀다.
조금만 연습하면 동네 노래방은 충분히 씹어먹을 실력.
김하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는 김진형과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뺨에 차가운 느낌이 스치더니 눈앞에 하얀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와! 눈이 온다! 눈이 와!”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보며 즐거워한다.
김진형도 신이 났는지 허공에 대고 마구 손을 흔들었다.
“하연아. 이거 봐봐. 눈이다, 눈. 올해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그러게.
얼마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인지.
아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이게 내일까지 계속 와야 진정한 의미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겠지.
두 부녀는 손을 꽉 잡고 멈췄던 발걸음을 움직여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알까?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음을.
#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는데 베개 옆에 기다란 크리스마스 양말 주머니가 놓여있다.
‘응?’
김하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니.
물론 전생에서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수없이 많이 받았다.
기획사 관계자에게. 팬에게. 지인 및 동료 가수로부터.
하지만 아빠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더랬다.
그런 건 상술에 넘어간 멍청한 놈들이나 챙기는 거래나.
김하연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양말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하나 들어있다.
‘이게 뭘까?’
기대하면 안 되는데 빨간색 리본으로 묶인 금색 포장지가 무척 탐스럽게 생겼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뜯어 상자 안을 확인했다.
‘이건?’
A사에서 나온 어린이 무선 헤드폰이다.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린다.
‘이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언제였더라.
몇 달 전 하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리에 헤드폰을 쓴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있었더랬다.
전생에 자신이 광고모델로 활약한 A사의 고가 제품.
단순히 모델로만 활약한 게 아니라 실제로 실생활에서 자주 쓰던 제품이었다.
노래 부르는 것 못지않게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이하연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으니까.
그러자 김진형이 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연아. 저 남자는 왜?”
“머리이 위에 커다라안 게 이써써요.”
“커다란 거? 아. 무선 헤드폰? 저거 갖고 싶어?”
갖고 싶냐는 말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던 자신이었다.
김진형의 주머니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였으니까.
그걸 염두에 두고 있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줄이야.
‘센스 있네.’
절로 웃음이 나왔다.
헤드폰을 선물로 받은 것도 기분 좋았지만, 뭣보다 아빠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준 최초의 선물이었으니까.
김하연은 헤드폰을 꺼내 꼬옥 안았다.
어린이용으로 나와서인지 크기가 무척 작다.
그런데 그 아래 무언가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크리스마스카드였다.
그녀는 헤드폰을 아래로 내려놓고는 카드를 집어 올렸다.
삐뚤빼뚤 악필이었지만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손편지.
<사랑하는 내 딸 하연이에게.
하연아 안녕? 하연이가 아빠한테 오고 벌써 3번째 크리스마스구나.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예쁜 하연이 주라고 이걸 아빠한테 주고 가셨단다. 원래는 직접 건네주시는데 우리가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산타 할아버지가 바쁘셨는지 아빠한테 주지 뭐야. 그래서 아빠가 카드랑 같이 선물을 양말 안에 넣었어. 부디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이었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사랑해, 우리 딸.
하연이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아빠가
P.S : 뭐라고 쓴지 잘 모를 테지만 나중에 하연이가 커서 이걸 보면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써 봐 ^^; 미안해>
하하. 뭐야 이게.
산타 할아버지는 뭐고, 이사한다고 바빠서 아빠한테 주고 갔다는 건 또 뭐람.
- 또옥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흐르더니 아빠가 쓴 카드에 뚝 하고 떨어졌다.
언제나 사랑해라는 글자 가운데에 떨어진 눈물은 빠른 속도로 번지며 주변으로 잉크가 퍼져나간다.
그녀는 서둘러 카드를 닦고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이참. 겉은 3살 아이라지만 속은 스무 살 넘은 어른인데.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김하연은 이불 속에서 작은 몸을 들썩이며 흐느끼다가 한참 뒤에야 방 밖으로 나왔다.
#
어제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계속해서 내렸다.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눈사람 두 개를 만들고는 사진을 찍었다.
큰 눈사람은 아빠, 작은 눈사람은 하연이다.
그걸 하연이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댓글을 달아주었다.
└ 눈사람 너무 귀여워요!!!!!
└ 으힠!! 지금까지 최강 눈사람은 올라프였는데, 방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최고 눈사람으로 재등극!!
└ 왼쪽이 아빠고, 오른쪽이 하연이 눈사람인가요?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 눈사람을 보니 하연이가 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네요
└ 밤새 눈이 엄청 왔던데 하연이 아버님도 참 부지런하시네요. 이른 새벽부터 예쁜 눈사람을 다 만드시고 :)
└ 와 이건 와...말이 안 나온다 진짜 왕커엽 ㅎㄷㄷㄷ
└ 두 분 모두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눈사람 사진이네요♥♥♥
댓글 덕분에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진다.
따뜻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어제 하연이와 불렀던 영상은 혹시 지금쯤 올라가 있을까?
나는 어제 갔던 패밀리레스토랑 이름을 검색창에 쳤다.
그러자 최상단에 해당 레스토랑 채널이 뜬다.
클릭해서 봤더니 메인화면의 대표 동영상에 나와 하연이의 얼굴이 커다랗게 있는 게 아닌가.
‘헉. 이거 뭐야.’
올린 시각을 보자 어제 날짜다.
놀라운 것은 조회수가 벌써 5만 뷰를 돌파하고 있었다.
‘어제 올렸으면 빨라 봤자 저녁에 올렸단 건데. 이게 벌써 5만 뷰라고?’
댓글 반응도 뜨겁다.
└ 아빠랑 딸이 노래 너무 잘하는데? 둘 다 가수야?
└ 이하연이 부른 원곡보다 더 좋네. 뭔가 따뜻함이 느껴지고
└ 기부니가 좋아집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듣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 오늘 화이트 크리스마슨데, 노래지대로네.
└ 딸이 완전 잘 부르는데, 아빠도 나쁘진 않음. 둘 다 실력자 가문이네
└ 내가 지금 이걸 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 당신은 유튜브 알고리즘의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제 벗어날 수 없어요
└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이제 음반 사업까지 하는 건가 ㅋㅋㅋㅋㅋㅋㅋ 이벤트 컨셉 좋네
그 아래 내꿈은한신사장님의 영업댓글도 눈에 띈다.
[내꿈은한신사장 : 영상에 나온 아이의 이름은 김하연입니다. 유튜브 채널도 따로 있으니 더 많은 노래를 듣고 싶으신 분들은 이쪽으로 와서 감상하세요. 아! 아빠분도 유튜브 채널이 따로 있는데 그분 주소도 함께 올려드립니다]
해당 댓글에는 나와 하연이 채널 주소가 달려있다.
고마운 양반이다.
다른 영상들을 살펴봤더니 죄다 조회수가 1만 미만이었다.
특히 이번 이벤트 영상 중에서 좋아요 1천을 넘은 건 나와 하연이가 부른 노래가 유일했다.
‘잘하면 1년 내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미래 그룹 유튜브 계정을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든 AI 홍보 영상이 대표 동영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조회수는 무려 500만 회를 넘겼다.
댓글 반응은 대부분 하연이가 부른 노래가 좋다는 것.
확실히 하연이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반응이 좋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선종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종이 형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오. 진형이 아니냐.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무슨 전화야?”
“메리 크리스마스~”
“크크.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선종이 형. 저번에 말했던 거 아직 유효하죠?”
“뭐?”
“하연이 뮤직비디오 만들어준다는 말.”
“뮤비? 물론이지. 왜? 하나 제대로 만들어볼까?”
그래. 한번 해보자.
하연이가 자기 꿈은 가수라는 말과 함께 유튜브로 성공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자주 했으니 말이다.
‘HiYeom하연’ 채널의 구독자 수는 어느덧 1만 여 명.
이 정도면 이제 킬러 콘텐츠를 올려도 무방할 때다.
PKT 엔터? 기다려봐. 너희 도움 없이도 하연이가 잘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