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24화
발표 당일.
미래 그룹 본사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맞이한다.
그는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진형 씨. 미래 그룹 홍보팀 전주현 이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사님. 김진형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그는 직원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뒤쪽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버튼을 눌렀다.
“여긴?”
“임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입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VIP 전용 엘리베이터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 띵
문이 열리자 화려한 내부가 눈에 띈다.
마치 순금으로 도금된 듯한.
내가 벽을 만지고 있는데 전주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실제로 18K 골드입니다.”
“네? 이게 진짜 금이라고요?”
미래 그룹이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승강기를 금으로 도배했을 줄이야.
- 퉁퉁퉁!
어디선가 못 박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더니 승강기 오른쪽에 있는 모니터에서 나는 소리였다.
회사 차원에서 주말을 이용해 집짓기 봉사활동을 다녀온 모양인데 그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
‘내부에 자체 영상을 만들고 있는 팀이 있는가 보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해당 영상을 다 보기도 전에 이동을 멈췄다.
- 땡
엘리베이터는 정확히 43층에서 멈췄다.
전주현을 따라 내리자 그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황 회장님은 처음 뵈시죠?”
“아뇨. 이전에 로비 영상 찍을 때 잠깐 보았습니다.”
“그러셨군요. 회장님은 사족이 많은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황태진 회장에 대해 설명했다.
괜한 말을 늘어놓으면 말꼬리를 잡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며 말이다.
“그러니 발표하실 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는 게 좋을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전주현이 ‘CEO 황태진’이라는 명패가 걸린 방을 스쳐 지나가더니 그 옆에 있는 빈 회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서 잠깐 대기하고 계시면 곧 회장님이 오실 겁니다.”
“네.”
“혹시 영상 만들 때 어려움 같은 건 없으셨습니까? 듣자 하니 모션그래픽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
“만들면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AI라는 게 정말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가요? 일을 즐기는 타입이신 것 같군요.”
“이왕 하는 거 즐기면서 하면 좋은 거죠.”
“하하. 그렇네요. 그럼 잠시만 대기해주세요.”
잠시 뒤.
예쁜 여성분이 들어오더니 우리가 들어온 문이 아니라 바로 황태진 회장의 방으로 연결된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전주현 이사와 김진형씨가 왔습니다.”
“알겠네.”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황태진 회장이었다.
로비에서 봤을 때도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보니 더 위풍당당해 보였다.
그는 나를 슬쩍 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영상 잘 봤네. 아이가 노래를 부르더군? 직접 만든 노래라지?”
“네. 그래서 말인데 저도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그게 뭔가.”
황태진과 전주현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영상에 들어간 곡은 제 딸이 만든 자작곡입니다. 그래서 영상과는 별개로 해당 곡의 저작권은 제 딸에게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계약서를 살펴보니 내가 이번 홍보 영상을 제작하면서 만든 모든 요소의 저작권은 미래 그룹에 귀속된다는 문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영상에 사용된 음원의 수익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면서 음악을 만든 원저작권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수익 일부를 음악 저작권자에게 공유하는 방식.
하지만 이번에 영상에 삽입한 음원은 아직 저작권을 등록한 게 아니라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황태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물론 음원을 만든 사람이 따로 있다면 저작권은 그에게 있겠지. 문제없네.”
“감사합니다.”
이게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괜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계약서대로 최종 납품한 영상의 모든 저작권이 미래 그룹에 귀속된다면 하연이가 만든 자작곡 역시 그에 해당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까.
내가 더 이상 말이 없자 전주현이 가지고 온 노트북에 빔프로젝터 단자를 연결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리모컨을 누르자 빔프로젝터가 켜짐과 동시에 통유리로 된 창이 어둡게 변했다.
마치 SF 영화에서 보듯 말이다.
“그럼 진형 씨. 발표를 시작해주세요.”
전주현의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상을 보며 설명했다.
“제일 첫 부분은 영상에 대해 말하는 화자(話者)에 대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이유가 있나?”
“하연이. 그러니까 영상을 설명하는 사람은 유명 인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누군지 소개할 필요가 있었죠.”
“그럼 유명 인사를 섭외해서 진행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저는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어려운 개념을 쉽게 소개하는 게 더 많은 이들이 이 영상을 보고 미래 그룹에서 진행하는 AI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이후로도 나는 이 부분에 이런 자막을 넣은 이유라거나 특정 효과를 넣은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황태진은 잠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에 답했다.
무슨 청문회의 당사자가 된 기분이다.
이윽고 영상이 끝이 났고, 황태진은 고개를 숙이더니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보기에 우리 그룹이 준비하고 있는 이번 프로젝트가 대중들에게 먹힐 것 같은가?”
“네. 충분히 먹힐 것 같습니다.”
“근거는?”
“저도 이번 영상을 제작하면서 미래 그룹에서 제공한 수많은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편의성도 뛰어났습니다. 분명 시장에 먹힐 거란 확신이 들더군요.”
“후후. 그런가. 알겠네. 전 이사.”
“네, 회장님.”
“홍보팀 내부 검토는 끝났지?”
“네. 회장님 컨펌만 남아있습니다.”
“그럼 이거 당장 올리지. 예산 넉넉하게 잡아서 광고도 돌리고.”
“알겠습니다.”
뭐? 이걸 지금 바로 유튜브에 올리겠다고?
가편집 영상인데 한 번의 수정도 없이 바로?
내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하자 황태진이 웃으며 말했다.
“잘 만들어 주었네. 음원 저작권 말고 또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황태진에게 하고 싶은 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 영상과 관련된 건 아닌데,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여기 오면서 엘리베이터에서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게 뭐지?”
황태진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허리를 내 쪽으로 당겼다.
“내부 소식 같던데, 엘리베이터가 너무 빨라서 이동 중에 보기에는 영상의 러닝타임이 너무 긴 것 같더군요.”
“그래? 하긴 나도 제대로 다 본 영상이 없긴 하지.”
“내부 영상이니까 핵심만 간추려서 뉴스 속보처럼 여러 개의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뉴스 속보처럼?”
그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주현에게 지시했다.
“전 이사 생각은?”
“저도 그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봐.”
“네, 회장님.”
일 처리 속도 보소.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행정 처리가 가장 빠르다던데 동사무소에서 일을 봐도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새삼 그룹 최종 의사결정자의 힘은 대단하구나 싶다.
“그럼 PT는 이걸로 마치고. 혼자서 딸아이를 키운다지?”
“아 네.”
내가 조심스럽게 답하자 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뒷조사를 한 건 아니니까 안심하게. 뉴스에 나온 걸 봤으니까. 엄마도 없이 혼자서 키우려면 많이 힘들겠어?”
“아뇨. 하연이가 잘 해줘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후후. 그런가. 알겠네. 이만 가봐도 좋아.”
나는 전주현의 배웅을 받으며 로비로 내려왔다.
“돈은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입금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PT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나 역시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인사를 받으니 뭔가 부담스럽다.
아무튼 이걸로 2억을 벌었다.
비디오쉐어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금액.
하연아. 오늘 저녁은 소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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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진의 방.
황태진은 눈앞의 전주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뭔가 깨달은 게 있나?”
“눈썰미가 좋더군요. 회장님 앞에서 당황하지도 않고요.”
“그렇지.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에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영상에 대해 지적할 줄은 몰랐어.”
“관찰력이 좋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야. 관찰력이 좋은 사람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전 이사. 혁신이란 별 게 아냐.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걸 더 좋게 개선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말씀 새기겠습니다.”
혁신이란 단어는 최근 미래 그룹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키워드였다.
그룹의 대표인 황태진이 시도 때도 없이 혁신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미래 그룹이 지금은 대한민국 넘버원이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신입사원부터 고위 임원까지. 모두가 혁신에 힘을 쏟아야 하네.”
“동감합니다.”
“알겠으면 자네도 잘 좀 해봐. 남이 하는 걸 따라 하지만 말고.”
전주현이 고개를 숙이고 황태진의 방을 떠나기 직전.
황태진은 전주현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홍보 영상 만들 일 있으면 저 친구한테 자주 연락해. 마음 같아서는 내부에 데려오고 싶지만 크리에이터는 조직에 속할 때보다 밖에 있을 때 그 창의성이 더 크겠지.”
“네, 회장님.”
전주현은 황태진의 방을 떠나 자신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조금 전 김진형과 함께 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그는 오른쪽에 설치된 모니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뉴스 속보처럼 짧고 간단하게 회사 소식을 전하자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실제로 본인은 방송국에서 기자를 하던 사람이지 않던가.
혁신은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
전주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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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유튜브를 켜니 정말로 내가 만든 영상이 미래 그룹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 광고비를 얼마나 태웠는지 트는 영상마다 해당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 내레이션 한 아이 누구냐? 목소리 졸라 귀엽네. 깨물어 주고 싶다!!!!!
└ 인터넷 다음은 AI가 세상을 바꾼다더니. 미래 그룹 대단하다
└ 대한민국에 미래 그룹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황태진 회장님! 언제나 응원합니다!!!
└ 영상 잘 만들었네. 아이가 설명해줘서 그런지 보고 단박에 이해됐다. 나 중학교 자퇴임
└ 영상도 좋은데 사운드가 대박임! 이거 중독성 쩔지 않아? 수능 금지곡으로 지정해야 할 수준
└ ㅇㅇ 노래 좋더라. 입에서 계속 흥얼거리게 됌
└ 이거 보니까 영화 HER의 사만다가 생각나던데 나만 그런 건 아니지?
└ 22222 나도 그럼! 이제 AI 비서랑 연애도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거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쉐이들 현실에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슬프다, 슬퍼!
└ 영상에 등장한 친구는 김하연이라고 유튜브 채널도 따로 있어요!
└ 오! 이하연의 환생이라 불리는 김하연이 목소리의 주인공이었음? 어쩐지 목소리가 낯이 익더라! 캐릭터도 졸귀탱!
덕분에 HiYeom하연 채널 구독자도 죽죽 늘어나고 있다.
황태진에게 PT를 한 다음 날.
계좌에 거액의 금액이 입금되어 있었다.
“일십백천만...와. 이거 실화냐?”
계좌에는 2억을 조금 웃도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이번에 영상을 만들고 받은 돈에 기존에 모았던 돈까지 합쳐지니 제법 많은 액수가 모인 것.
나는 하연이를 등원시키고 나서 근처 공인중개사사무소에 들렀다.
하연이와 둘이 살 집을 고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