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21화
한동안 미래 그룹 AI 프로젝트 홍보 영상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사?
돈을 받아야 가지.
미래 그룹은 착수금 10%.
그러니까 2천만 원만 먼저 지급한 상태였고, 나머지 금액은 영상이 최종 컨펌되어야 받을 수 있었다.
큰돈을 받고 제작하는 영상인 만큼 나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신경 써서 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밋밋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분짜리 샘플 영상에서는 이런 느낌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영상 길이가 길어지다 보니까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드네.’
그렇다고 처음부터 새로운 포맷의 영상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하연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빠아! 무슨 고민울 그러케 해요?”
“응? 아냐. 그냥 좀 심심한 것 같아서.”
“딤띰? 무어가? 영사앙이?”
“응. 10분짜리 영상이다 보니까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드네.”
“아하!”
하연이가 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을 하며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린다.
푸훗. 이러면 아빠가 네 앞에서 다시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잖니.
그런데 하연이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아빠아! 이로면 어때에요?”
“어떻게?”
“내카아 노래룰 부르면서어 소케하는 거에요!”
“노래?”
하연이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딱딱하게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면서 AI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하자고.
물론 말보다 노래를 하는 게 더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이기는 하다.
단, 잘 불렀을 때만.
다행히 하연이는 노래를 잘한다.
문제는 어떤 노래를 부르냐는 것이다.
유명한 곡을 끌어다 쓰면 저작권료가 만만치 않을 터.
무언가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딱 맞는 노래를 찾는 것도 일이었고.
그렇다고 생뚱맞은 걸 갖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동요는 너무 짧아서 가져다 쓰기도 뭣하고.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하연아. 아이디어는 진짜 좋은데 그건 좀 어렵겠다. 마땅한 노래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거든.”
“제에가 만둔 노오래 쓰면 돼요!”
“뭐? 네가 만든 노래?”
하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작곡을 만든다고? 3살짜리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하연이가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배에 올리더니 허밍을 부르기 시작한다.
“으으음. 으으으으음. 흐으음.”
응? 뭐지? 이 감미로운 음색은.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동요는 아니고 성인 가요 같은데, 무척이나 리듬감이 좋다.
나도 모르게 하연이의 멜로디에 맞춰 발을 구른다.
“잠깐! 잠깐만!”
“왜에요?”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네에!”
하연이가 참말이라는 듯 또랑또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하, 하연아.
너 진짜 전생에 이하연이었던 건 아니지?
노래에, 작곡에.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
조금 전 아빠. 아니 김진형에게 불러준 노래는 내가 죽기 전에 만든 자작곡 중 하나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댄스곡인데 다음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쓰려고 아껴뒀던 곡.
하지만 어차피 이하연으로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났으니 아무도 모르는 미발표곡이다.
중간중간 랩도 들어가 있으니까 AI 프로젝트를 요약해서 넣으면 귀에도 쏙쏙 잘 박히지 않을까.
덕분에 녹음을 다시 해야 했지만, 귀찮다기보다는 즐거웠다.
‘이 곡을 이렇게 또 부를 줄은 몰랐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이걸 개인 앨범이 아닌 홍보 영상에 넣어야 한다는 건 좀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내가 만든 곡을 이렇게 또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미래 그룹 홍보 영상이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봐줄 터.
‘그거면 충분해.’
사실 신나는 비트와는 다르게 이 곡의 가사는 무척이나 시니컬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작심하고 자신의 아빠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었으니까.
이 곡을 쓸 때만 하더라도 드디어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에 차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비는 더더욱 하나뿐인 딸에게 매달렸고, 결국 이하연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그 지옥 같은 나날들.
이하연. 아니 김하연은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반해 지금의 아빠는 어떻던가.
자신을 위해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자기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서주는 인물이었다.
전생에 이처럼 아빠랑 같이 노래를 부르고 협업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다시 태어나서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최근 순대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이 도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신림역 인근에 있는 조그마한 분식집이 그 주인공.
먹어본 사람들은 평범한 분식집 순대가 아니라며 칭송이 자자했다.
└ 어떻게 이런 곳이 그동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진짜 렬루 순대 맛집임!
└ 하나분식은 킹정이지!!! 신림동에 이런 숨겨진 맛집이 있었을 줄이야
└ ㅅㅂ. 원래 아무도 모르는 맛집이었는데 요즘 사람 늘어서 짜증 남. 순대 하나 먹겠다고 30분을 줄 서야 한다니
└ ㅋㅋㅋㅋㅋㅋㅋㅋ 위에 이기심 쩌는 거 보소
└ 그런데 여기 어쩌다가 유명해진 거임? TV에선 못 봤던 거 같은데?
└ 어린 꼬마가 나오는 유튜브에서 소개해서 유명해진 거로 앎. 채널 이름이 뭐였더라? HiYeom하연이었던가? 노래 엄청 잘해. 한번 봐봐. 죽은 이하연 저리 가라임
덕분에 HiYeom하연 채널도 구독자가 소폭 늘었다.
하나분식 사장님도 당분간은 가게를 더 운영하신다고 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외주 영상 제작이랑 하연이 유튜브 채널 운영과는 별개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하연 아빠 TV’를 운영하는 것.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요리하는 영상이나 주변을 산책, 또는 영상물 제작 팁 등 여러 가지 내용이 올라가는 잡식성 채널.
그래도 하연이 아빠라는 게 알려져서 그런지 여기도 조금씩 구독자가 늘고 있었다.
“이제 300명이네. 열심히 해야지.”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하연이 하원 하러 움직이려고 하는데 카톡 알람이 울린다.
누군가하고 봤더니 김 대리다.
비디오쉐어 다닐 때 나를 괴롭히던 사수 김 대리 말이다.
[김 대리님] : 진형 씨. 잘 지내고 있어?
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에 손을 올렸다.
> 안녕하세요. 김 대리님. 저번에 미래 그룹 본사에서 보고 처음이네요.
[김 대리님] : 그러게. ^0^ 미래 그룹 건은 진형 씨가 땄다고 들었어. 축하해
> 별말씀을요. 그때 만나서 반가웠어요
원래 사회생활이란 마음에 없는 이야기라도 그럴 듯하게 뱉어내야 하는 게 아니던가.
지금은 남남이지만 영상 제작 업계는 좁으니 또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김 대리님] : 이번 계약 건이 억 단위일 텐데 진짜 잘됐다. 하연이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겠어
> 하하. 열심히 해야죠 뭐
[김 대리님] : 그런데 진형 씨는 회사 차릴 생각은 없어? 혼자서 그렇게 큰 계약 건 진행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회사?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 중요한 건 하연이를 잘 키우는 거지 회사를 차려서 대박을 내자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김 대리 말처럼 언젠가는 회사를 차려야 할 날이 오긴 할 거야. 프리랜서로 작업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미래 그룹과 같은 대기업에서 일을 줬지만, 언제까지나 미래 그룹의 일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확고한 단골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것도 미래 그룹과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서 나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일.
그래도 그들이 언제까지나 내게 일거리를 준다는 보장은 없다.
다양한 일거리를 잡으려면 규모를 키울 필요는 있었다.
>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김 대리님] : 아. 별건 아니고, 이쪽 업계는 원래 시작은 프리랜서로 했다가 직원 뽑아서 회사 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잖아. 진형 씨도 그런가 해서
> 아직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언젠가는 하나 차리긴 해야겠죠
[김 대리님] : 그렇지? 그럼 나 꼭 불러주기야! 알지? ㅋㅋ 나 일 잘하는 거? 나 같은 일잘알 구하기 쉽지 않을걸? ㅎㅎ
이거 농담이 아닌데?
하긴 김 대리 정도면 업계 돌아가는 사정도 잘 알고, 잔머리도 있어서 일 처리가 느리진 않다.
다만 아랫사람보다는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일까.
그러니까 부하직원으로서는 뛰어나지만, 상사로는 별로인 타입.
‘김 대리랑 같이 일한다고 하면 그녀가 내 부하가 되는 거잖아.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뭐 당장 회사를 차릴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 좋아요 ㅎㅎㅎㅎ 그런데 비디오쉐어는 요즘 어때요?
[김 대리님] : 어휴 말도 마. 진짜 충격과 공포의 그지깽깽이라니깐!!!
> 왜요? 나름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김 대리님] : 됐어. 진형 씨 떠나고 같이 일하는 분들 몇몇 그만뒀거든. 죄다 신입만 뽑는데 제대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 그 정도예요?
[김 대리님] : 응!!!!!! 게다가 매출은 줄고 있는데 사장은 회사 명의로 외제차를 뽑고! 아주 망하기 일보 직전 좃소기업의 대표적인 모습이야. 어휴. 진짜 날로 한숨이 는다 ㅜㅜ
심태열 사장이 허세가 좀 있긴 했지만 나름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비디오쉐어를 그만큼 키웠던 거기도 하고.
‘내가 회사를 떠난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진 모양이구나.’
그래도 인생 첫 직장이고 친정이라면 친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인데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니 아쉬움이 크다.
> 김 대리님이 잘 서포트해주세요. 심 사장님이 김 대리님 되게 챙기잖아요
[김 대리님] : 으힠!!! 그딴 소리 다시는 하지 마! 방금 온몸에 닭살 돋았으니까! 챙기긴 누가 챙겨! 맨날 구박만 하는데 ㅠㅠ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열심히 버티고 계시면 제가 언젠가 스카웃 제안하겠습니다. 그날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김 대리님] : 헤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요 미래의 사장님~♥
푸훗. 현웃이 터졌다.
한 번도 나한테 하트 같은 거 보낸 적이 없던 양반인데.
‘심태열한테는 자주 이런 문자를 보내며 애교를 떨었겠지.’
아무튼 하연이 기다릴라.
회사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
“야! 박민규!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엄마. 나 유치원 가기 싫어! 연기만 할래!”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야. 남들 기본적으로 하는 건 다 해야지! 그리고 방금 엄마한테 말대꾸한 거야?”
박민규는 아침부터 짜증이 났다.
다니고 있는 유치원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자기가 먼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자신도 그걸 갖고 놀고 싶다면서 떼를 부리길래 가볍게 밀었다.
그런데 하필 뒤에 있던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크게 다친 것.
엄마는 다친 아이와 다친 아이의 부모에게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지만, 박민규는 화가 났다.
‘내가 먼저 갖고 놀던 걸 걔가 뺏으려고 한 건데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엄마도 웃기다.
지금 자기한테 제일 중요한 게 연기라고 말한 건 바로 엄마가 아니던가.
첫째도 연기, 둘째도 연기.
그렇다면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언제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더니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다른 아역배우들처럼 박민규도 처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잘생겼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란 아이.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이 끝내 펼치지 못했던 연기에 대한 욕심을 자기 아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그 결과 박민규는 신동 소리를 듣는 연기 유망주가 되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그는 다니던 유치원을 쫓기듯이 그만두어야만 했다.
벌써 이런 일이 세 번째가 되자 박민규의 엄마는 앙칼진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박민규! 너 자꾸 이러면 천만 배우는커녕 성인 배우조차 못 될 수도 있어. 그건 알아?”
“내가 왜! 내가 잘못한 게 뭔데?”
“요즘은 연기 못지않게 사람들이 인성도 중요하게 본단 말이야! 어린 시절을 이따위로 보내다가 찍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 싫다.
그냥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남들 하는 건 다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결국 박민규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옆 동네 어린이집을 찾아야만 했다.
유치원은 이제 소문이 돌아서 어린이집으로 가야만 한다나?
그런데 그곳에서 박민규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얼마 전 영상에서 보았던 아이.
자신에게 긴장감을 주었던 아이.
김하연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