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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17화 (17/135)

내 딸은 국힙원탑 17화

상대는 최근 진행하는 그룹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가 있는데, 해당 프로젝트를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저야 뭐 일거리 주신다면야 좋죠.”

“아 그런데, 이번 영상의 금액은 좀 커서요. 공개 입찰에 참여해주시는 조건입니다.”

공개 입찰이라고?

일반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일반 사기업의 경우 금액이 적으면 수의계약. 그러니까 발주처가 임의로 업체를 선택하여 계약을 체결한다.

금액이 클 경우 제안서를 받아 견적을 내지만 이는 요식 행위에 가깝다.

‘보통은 미리 1곳을 선점해두고 나머지 업체는 형식적으로 기재하는 정도지.’

경쟁 입찰할 경우 아무래도 시간이나 절차적으로 부담이 갔기 때문이다.

자기 본업도 바쁜데, 이것까지 준비하려면 피곤해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기존에 해당 발주처와 일을 해봤던 업체가 유리했다.

아무래도 내부에 대한 이해도가 있고, 한번 작업을 해봐서 손발이 잘 맞는 업체를 선호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그런데 공개 입찰이라니.

공개 입찰은 비디오쉐어에 다닐 때도 그리 자주 경험해보지 못한 케이스.

“금액이 얼마나 큰데요?”

“그건 다음주에 직접 오시면 알려드릴 겁니다. 적은 금액은 아니랍니다. 하하.”

“그럼 다음주에 있는 건 OT(사전 설명회)인가요?”

“네, 맞습니다. 대략적인 금액 및 어떤 영상을 찍어야 하고, 어떤 메시지가 들어갔으면 하는 것들이랑, 저희가 찾아놓은 레퍼런스 영상들 보여드리는 자리예요.”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들러리로 참석하는 그런 일은 아니죠?”

“설마요! 회장님 눈에도 드신 진형 씨에게 저희가 왜 그러겠어요. 하하. 99% 진형 씨가 맡는 걸로 진행되겠지만 일단 형식적인 요건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다음 주에 본사 한번 방문해주세요.”

후아. 99%라니.

국내 최고의 대기업인 미래 그룹에서 나를 이렇게 높게 평가해주고 있다니 왠지 기분이 좋다.

나는 기분 좋게 승낙한 뒤 그가 보내준 메일을 살펴보았다.

미래 그룹에서 그룹 차원으로 힘을 주고 있는 AI 프로젝트에 대해 알리는 일이었다.

‘AI가 4차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하더니 미래 그룹에서도 AI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미래 그룹 본사를 찾았다.

저번에 영상을 촬영을 해서인지 그들의 로비가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바로 비디오쉐어의 사장인 심태열과 예전 사수였던 김 대리였다.

김 대리가 나를 보더니 아는 척을 한다.

“응? 진형 씨잖아? 진형 씨. 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설마 오늘 있을 AI 홍보 영상 제작 OT에 비디오쉐어도 참석하는 것일까?

사람 일 모른다더니. 나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둘을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김진형 아니야? 그래. 요즘 잘 지내고?”

“네. 저야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별일 없으시죠?”

그 말에 김 대리가 조금 어두운 얼굴을 보였고, 심태열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뭐 우리야 잘나가고 있지. 그런데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오늘 미래 그룹 AI 프로젝트 홍보 영상 관련하여 OT가 있다고 해서요.”

“뭐? 네가 거길 왜?”

심태열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여기서 괜히 이전에 미래 그룹과 영상 일을 해봤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미래 그룹 홈페이지에 공개 입찰 공고가 떴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그거 보고 와봤어요.”

심태열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푸훗. 뭐야? 그걸 보고 여기까지 왔다고?”

“네. 기업이든 프리랜서든 규모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요?”

“아냐 아냐. 그냥 잠시 다른 일이 떠올라서. 그래. 애 키운다고 바쁘지? 아무튼 좋은 일 있으면 좋겠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김 대리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안 오고 뭐 해!’라는 심태열의 말에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꽤 재미있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OT 장소로 이동했다.

100평 정도 되는 넓은 회의실에는 많은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미래 그룹에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보니 날고 긴다는 영상 제작업체들이 많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프리랜서는 거의 안 보이고 대부분 업체로구나. 심태열이 웃은 것도 이 때문이겠지.’

OT는 30분 정도로 짧았다.

미래 그룹 관계자들은 핵심만 요약한 내용으로 짧게 발표를 마쳤고, 이후에는 Q&A 시간이 이어졌다.

심태열이 나를 의식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도 참여할 수 있는 겁니까?”

“네. 1인 프리랜서이든 대형 업체든 제시한 견적과 이번 영상에 대한 아이디어가 일차적인 평가 항목입니다. 업체 규모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이런 대형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도 참여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안 그래요 방 사장?”

“하하. 뭐 그렇긴 하군요.”

“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긴 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웃음을 보인다.

“조용히 해주세요. 그럼 질문은 더 이상 없나요? 없으면 OT는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다다음주 금요일까지 여기 메일로 제안서를 보내주시면 내부에서 평가 후 선정된 업체에 개별 연락드리겠습니다.”

“PT는 따로 없나요?”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신 곳에 한해 샘플 영상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샘플 영상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가요?”

“1분짜리로 간단히 이러한 방식으로 영상을 제작한다는 걸 보여주시는 겁니다.”

“제안서는 각자 알아서 내면 되나요? 그러니까 정해진 포맷은 따로 없고요?”

“돌아가실 때 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담당자가 제안서 포맷을 전달드릴 겁니다. 거기 맞춰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참석한 이들이 바쁘게 손을 놀려 담당자의 말을 노트북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1시간 여에 걸친 OT가 끝났다.

집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대부분 조금 전 있었던 OT에 참석한 사람들이다.

이전까지는 싱글벙글 웃고 있던 이들이 아니꼬운 표정을 하고는 투덜거린다.

“망할 놈들. 아이디어만 쏙 빼먹으려고 제안서만 받겠다 이거지.”

“대기업 횡포가 어디 한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그런데 미래는 무슨 생각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도 받는 거야?”

“외부에 보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곳에도 기회를 준다고 어필하려는 거 아니겠어? 설마 프리랜서가 선정되려고.”

“크크. 그러네. 하여간 다들 준비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로비로 빠져나간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저들의 말이 맞아.’

담당자는 내게 99%라는 말을 했지만, 아마 입에 발린 소리였을 것이다.

결국은 아이디어 승부라는 이야기.

‘나를 선정한다고 따로 각서를 써준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어.’

나는 무슨 내용을 준비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미래 그룹 본사 회장실.

넓은 방 안에 두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통유리로 된 창을 내다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맞은편에 긴장된 얼굴로 서 있었다.

황태진은 상대를 돌아보지 않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로비 영상 제작한 친구도 왔나?”

“네, 회장님. OT에 참석하고 방금 돌아갔습니다.”

“그래. 그 친구가 보낸 제안서는 나한테도 따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질문 한 가지만 드려도 괜찮을까요?”

황태진은 그제야 의자를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뭔가?”

상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굳이 그 어린 친구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을 잘하더군.”

“일이요?”

“그래. 내가 영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업무를 처리하는 센스가 뛰어나.”

업무를 처리하는 센스가 뛰어나다니.

황태진의 앞에 선 남자. 미래 그룹 홍보팀의 전주현 이사는 황태진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전주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자 황태진이 피식 웃었다.

“자네 올해로 우리 회사에서 몇 년 차지?”

“4년 되었습니다.”

“그래. KBC에서 기자 생활하다가 이사로 와서 아직도 이사지?”

“네, 네엡. 그렇습니다.”

전주현은 외부에서 스카우트된 인재였다.

그 스스로도 이제는 상무에 올라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승진 소식은 없었다.

“자네가 그러니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시정 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자네 팀이 고생하던 로비 영상을 그 친구는 순식간에 해결하지 않았던가? 능력이 있는 친구야. 유심히 관찰해보게나.”

“네, 회장님. 그러면 이번 프로젝트는 그에게 주는 걸로 알고 진행하면 될까요?”

“쯧. 사람 참.”

황태진이 혀를 차자 전주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그럼?”

“일단 제안서를 받아서 보자고. 아이디어가 형편없으면 그에게 일을 맡길 이유가 없지 않나?”

“무,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우. 아직도 기자 물이 덜 빠져가지고는. 사람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를 좀 가져보게나. 그럼 나가봐.”

“네, 회장님!”

전주현은 90도로 허리를 숙인 뒤 황태진의 방을 나왔다.

쥐었던 손을 펴니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땀이 흥건하다.

‘조직 생활은 여전히 쉽지 않군.’

KBC에서 15년간 기자 생활만 하던 그가 미래 그룹 홍보팀으로 온 건 돈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KBC는 물론 큰 조직이었지만, 기자란 샐러리맨이라기보다는 자영업자에 가까운 직업.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주변의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기자상도 여러 번 받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조직 생활은 그게 아니었다.

사내 정치는 기본이었고, 회장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도대체 무엇이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자신보다는 그 어린 청년이 더 황태진의 마음에 든 것임은 틀림없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이고, 김진형에게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전주현은 다짐했다.

#

나는 간만에 여러 사람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중 가장 바쁜 성현이가 오프인 날을 골라 멤버들이 모였다.

고등학교 동창 세 놈과 유주까지 불렀더니 좁은 집 안에 앉을 곳이 없을 정도다.

내 이야기를 들은 현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AI 프로젝트라. 지금 모든 기업에서 AI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보고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지.”

“맞아. 그래서 너희들 도움 좀 받으려고 불렀다. 바쁜데 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뭘. 하연이를 위해서 이 정도는 껌이지.”

현모가 하연이를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상준이는 바닥에 있는 과자를 몇 조각 집어먹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일단 이번 입찰의 핵심은 아이디어인 것 같거든. 그래서 너희들 머리 좀 빌리려고.”

“아이디어라. 나는 영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데 도움이 될까?”

“영상을 같이 만들자는 건 아니고 기획을 같이해보자는 이야기야. 수주에 성공하면 너희들 몫으로도 조금 떼줄 테니까 좋은 의견들 좀 부탁해.”

상준이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야야. 금액이 2억 넘는다고 그랬지?”

“응. 맞아.”

“그건 됐으니까 일단 수주부터 따자. 잘 되면 하연이한테나 잘해.”

“맞아.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이 집이나 좀 옮겨라. 둘이 살기에는 너무 좁지 않아?”

그런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가끔 옆집에서 좀 조용히 해달라는 포스트잇을 대문에 붙인 경우를 빼면 이웃과 불화를 겪은 적도 딱히 없고.

하지만 유주도 상준이의 의견에 동감을 표했다.

“여긴 애랑 둘이 살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너 아직도 하연이랑 저 작은 침대에서 같이 자니?”

그녀는 나의 싱글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그게 왜?”

“으이구. 하연이도 이제 곧 4살이야. 어엿한 숙녀인데 따로 방을 내주지는 못하더라도 아빠랑 같이 자는 건 좀 아니지.”

“그런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연이도 유주의 말이 맞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컥. 이건 배신이다.

아빠는 하연이랑 같이 잘 때가 가장 행복하단 말이야!

내가 하연이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미는 사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성현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말했다.

“저번에 하연이가 출연한 부분을 황 회장이 좋아했다 그랬지?”

“응. 그건 왜?”

“그래서 말인데 다큐멘터리식으로 만들면서 하연이가 내레이션을 하면 어떨까?”

하연이가?

어라. 그것 좀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기도 하고.

모두의 시선이 성현이의 입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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