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6화
국민가수의 지위에 올랐던 이하연.
하지만 그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가수가 되고자 결심한 뒤 수도 없이 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PKT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서 여러 기획사에 노크. 30여 차례가 넘는 가수 오디션을 봤지만, 결과는 모두 낙방이었다.
한 번은 그 과정에서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다.
연예 기획사에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무슨 사기냐 싶겠지만 이런 일은 의외로 흔했다.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이 많은 걸 알고, 이들을 등쳐먹으려는 자들이 꼭 있지.’
한 연예 기획사는 이하연이 마음에 들었다면서 돈을 요구했다.
선불을 줘야 연습도 시켜주고 방송 출연도 시켜준다는 말에 이하연은 피 같은 돈을 건네줘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날 가보니 학원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경험.
그런 험난하고 치열한 과정을 거친 뒤 그녀는 결국 아주 작은 연예 기획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약 1년간 연습생으로 생활하며 솔로로 데뷔한 그녀는 연습생의 힘겨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PKT 엔터테인먼트. 물론 좋은 회사지. 하지만 연습생들이 너무 많아.’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그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또다시 데뷔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선배 가수들이 그랬다.
자기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으면 결코 가수 하지 못했을 거라고.
저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본인 역시 연습생 신분 단 1년 만에 데뷔할 수 있었던 건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데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이하연에게 프로듀서는 웃으며 말했다.
“넌 망해도 다시 시작할 기회가 많으니까 먼저 데뷔시켜줄게. 잘 되면 좋고, 안 돼도 너무 낙심하진 마. 시간은 네 편이야.”
속 편한 소리였다.
사방에 연습생 천지인데 왜 실패한 가수에 투자를 또 하겠는가.
모든 연습생은 자신만의 개성이 있고, 끼가 있고, 재능이 있다.
게다가 피나는 노력도 한다.
그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성공한다.
운칠기삼.
그녀 또한 거기에 동의했다.
‘이 바닥에서 자기 재능과 노력보다 중요한 건 운이야. 내가 PKT 엔터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시 성공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
무엇보다 지난했던 연습생 신분으로 또다시 돌아가긴 싫었다.
남자로 치자면 다시 군대에 가라는 이야기와 비슷하달까.
아무래도 다들 어리고 예민한 상태니까 연습생 간 갈등도 많고, 며칠 늦게 들어온 것만으로도 선후배 관계가 맺어지는 등 한국식 서열 문화도 싫었다.
아빠인 김진형의 영상 능력과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경험이라면.
꼭 연예 기획사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분명 유튜브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터.
이하연. 아니 김하연은 다시 한번 강하게 어필했다.
“아빠아! 난 아빠랑 유튜부우로 자알 하코 시퍼요!”
“하연아.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한국에선 대부분 연예 기획사를 통해 가수 데뷔하거든. 요즘 유튜브 인기가 좋다지만 이걸로 가수 데뷔는 쉽지 않을 거야.”
김진형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차근차근 말한다.
전생의 아빠에 비하면 정말 스윗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고집을 꺾으려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으려나.’
김하연은 복어처럼 양 볼을 뿌하고 부풀리고는 고민했다.
최근 김진형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오버를 한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한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는다거나, 너무 의젓한 행동을 한다거나 등.
한두 번은 괜찮겠지만 이런 일이 이어지면 김진형이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표현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였다.
“아빠아.”
“응. 우리 딸 말해봐.”
“나안 아빠랑 떨어지기 시로요.”
“그, 그래?”
“네에! 아빠랑만 가치 영상 만둘래요. 그러어면 안 돼요?”
“커억.”
갑자기 김진형이 자기 심장을 부여잡고는 뒷걸음질 친다.
애도 아니고 정말.
김하연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
김진형. 자신의 아버지였다.
#
“정수 씨. 이번에 승진한다며? 한턱 쏴야지?”
“정 과장님! 아니 정 차장님! 한신 그룹 최초로 최연소 차장 다시는 거라면서요? 소문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정 과장. 승진 축하하네. 자넨 정말 우리 회사의 보배야, 보배! 하하.”
정성수는 최근 회사에 출근한 이후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이러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인트라넷 게시판에는 승진과 관련한 인사발령공고가 올라오지도 않았지만,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차장 승진을 축하해주는 통에 인사한다고 고개가 아플 정도였다.
‘고맙긴 한데 차장이 무슨 대수라고.’
자신의 목표는 이 회사의 사장이었다. 차장은 그곳에 가기 위한 아주 작은 순간에 불과할 뿐.
한신 그룹은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으로, 정성수는 그중에서도 ‘한신의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미래전략실 소속이었다.
실 전체가 그룹에서도 내로라하는 에이스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니까 서로 간의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좋아했다.
뛰어난 업무 능력은 기본.
거기에 평소 인화를 강조하는 그의 성격과 인품에 많은 이들이 그를 따르고 좋아했다.
한마디로 적이 없는 남자.
정성수는 술 한잔하자는 주위의 권유를 모두 뿌리치고는 빠르게 귀가했다.
최근 연이은 밤샘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요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쳤기에 요즘은 좀 여유가 있었다.
위에서는 그간 고생했다며 휴가를 주겠다고 했지만,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휴가 다녀오면 다음 정기인사평가에서 점수 떨어뜨리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업무 능력, 인품. 물론 다 중요하지만, 직장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성실성이다.
자신이 이토록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그 성실성이 있었던 것.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마친 그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디 보자. 오늘은 우리 하연이 무슨 영상이 올라왔으려나.”
퇴근할 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채널 알림이 뜬 걸 봤지만, 작은 액정이 아닌 큰 화면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지 애써 참고 있었던 자신이 대견스럽다.
그는 즐겨찾기 버튼을 누르고는 순식간에 ‘HiYeom하연’ 채널로 들어왔다.
“얏호! 이번에는 아빠랑 책 읽는 영상이구나. 어쩐지. 3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언어를 잘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빠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던 거였어.”
영상에는 아빠가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아빠.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빠가 읽어주는 책에 집중하는 아이.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다정한 모습인지.
절로 치유가 되는 기분이다.
그는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즉시 커뮤니티에 댓글을 남겼다.
영상에 곧바로 댓글을 남기고 싶었지만 유튜브에서 어린이 채널에는 댓글 기능을 정지시킨 탓이다.
[내꿈은한신사장 : 오늘도 영상 잘 봤습니다!!!! 아버님 목소리가 나긋나긋한 게 잠잘 때 ASMR로 들어도 좋을 것 같네요 ㅎㅎㅎㅎ 하연아 삼촌이 사랑하고 항상 건강해야 해~♥♥♥]
마음 같아서는 후원금이라도 쏘고 싶었지만, ‘HiYeom하연’ 채널은 슈퍼챗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구독자 1천 명 이상이란 조건은 충족했지만, 만 18세 이상이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서 활성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네. 후원금 팍팍 쏘고 싶은데.’
하연이를 보는 건 하루 중 유일한 낙이었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애교 많고.
하연이는 정말 어디 내놓아도 빛을 발할 아이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은 3천여 명 정도다.
‘HiYeom하연’ 채널의 구독자 수는 이제 막 3천 82명을 돌파하고 있었으니까.
정성수는 순간적으로 이질적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 하연이가 더 유명해져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마음.
한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물을 자기만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잘 몰랐으면 하는 그런 마음.
아무튼 그는 오늘도 하연이 영상과 함께 행복한 덕질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하연아. 힘든 거 있으면 삼촌한테 다 말만 해. 삼촌이 뭐든지 들어줄게. 알았지?
#
나는 보라매병원 구내에 있는 식당에서 성현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밥은 먹을 만하냐?”
“어. 이 정도면 가격 대비 훌륭한데?”
“나가서 좋은 것 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내가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아무튼 맛있다니 다행이네.”
“됐어. 식겠다. 밥이나 먹자.”
내가 이곳에 온 건 병원 홍보 영상 촬영을 위해서였다.
저번에 하연이 영유아 검진 때 보았던 홍보 영상 제작자 공고에 지원해서 해당 발주를 따냈던 것.
“단가도 얼마 안 한다며. 이런 거 해도 괜찮은 거야?”
성현이 녀석은 자기네 병원 홍보 영상 제작인데도 시니컬하게 묻는다.
“너랑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더니 홍보팀장님이 생각보다 많이 챙겨주셨어. 할만해.”
“그렇다면 다행이고. 혹시 다른 일거리가 없어서 여기 오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일거리는 지금도 많다.
다만 여긴 의리 상 하는 일.
‘집이랑도 가깝고, 공수도 많이 들어가지 않고.’
성현이와 헤어진 나는 카메라를 짐벌에 끼운 후 병원 곳곳을 촬영했다.
그러다 3층에 위치한 소아청소년과에 들렀다.
저번에 한 번 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간호사들이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는 손님들이 대기하는 모습을 찍었다.
어차피 영상에서는 직접 활용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들한테 촬영 동의를 받은 건 아니니까 말야.’
요즘에는 초상권 개념이 예전보다 강해져서, 영상을 보고 자기 얼굴을 내려달라거나 보상을 요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촬영 동의를 받기에는 사람도 많고, 일이 복잡했다.
대기업에서야 홍보팀에서 미리 촬영 동의를 받아주는 편이었지만, 병원은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 보는 장면까지 찍은 나는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소아청소년과를 떠났다.
“3층까지 다 찍었네. 잠시 쉬었다가 갈까.”
복도 벽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금까지 촬영한 영상을 살펴본다.
그런데 마지막에 촬영한 소아청소년과에서의 촬영 장면에 유독 눈이 갔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온 아이들.
물론 아파서 왔으니까 그들의 표정이 딱히 행복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 같은 걸 느꼈다.
‘하연이한테도 엄마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무리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챙겨준다고 해도 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하다.
결혼?
꿈도 못 꿀 일이다.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인데다가 애까지 딸려있는데 누가 자기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현재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유주가 잠깐 스쳐 지나갔으나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유주 인생 망칠 일 있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병원 곳곳을 빠르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오늘 하루에 다 촬영을 마치고 싶었으니까.
촬영이 길어질수록 편집은 늦어지는 법이다.
열심히 돌아다니며 촬영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확인해봤더니 전에 연락했었던 미래 그룹 홍보팀 직원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진형 씨.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아 네. 저야 뭐 똑같죠. 그런데 무슨 일로?”
“영상 제작 건이 하나 있어서요. 혹시 다음 주에 본사 건물로 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영상 제작이요? 어떤 건인데요?”
일거리라면 언제나 대환영이다.
그것도 국내 최고의 대기업인 미래 그룹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