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4화
하연이 키는 85cm. 몸무게는 10.5kg이었다.
‘진짜 작네.’
나는 하연이를 보고 아빠 웃음을 지었지만 하연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몸무게가 표시된 전자저울의 숫자를 가리려고 그랬다.
키와 몸무게를 잰 다음 몇 가지 추가적인 검사를 진행하였고, 이어서 진료를 보았다.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에 들어가자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 앉아계신다.
“안녕하세요.”
“안룡하떼요!”
“이야.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지금 하연이가 몇 살이죠?”
“만으로 2돌 지났습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응? 생일 지난 지 좀 된 것 같은데?”
“아 그게 말이죠.”
나는 그에게 내가 미혼부라는 것과 그래서 하연이 생일을 내가 임의로 지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성현 군에게 대충 이야기 듣긴 했습니다만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뭘요. 아이가 너무 잘 따라와 줘서 제가 고맙죠.”
내가 하연이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자 하연이 역시 나를 보고 미소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만 눈물을 훌쩍인다.
“어쩜. 이렇게나 부녀 사이가 좋을까.”
의사 선생님도 훈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일 하시는 겁니다. 요즘에는 자기 자식도 외면하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요.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그 자세. 정말 본받아 마땅합니다!”
“감사합니다.”
괜히 코끝이 간지럽다.
진료를 마친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다 좋은데 하연이 몸무게가 조금 적다고 하셨다.
“하연이 몸무게가 지금 또래에 비해 적게 나가는 상황이에요.”
“얼마나요?”
“지금쯤이면 11.5kg 정도 되어야 하는데 1kg 정도가 작죠.”
“1kg가 큰 차이가요?”
과식하거나, 속이 안 좋으면 1kg 정도는 금방 찌고 뺄 수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엄숙한 얼굴로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이들은 성인들과는 달라요. 지금 체중은 18개월 여아의 평균 체중입니다. 먹는 데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어요.”
어쩌면 하연이 체중이 또래보다 덜 나가는 건 모유 수유를 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없이 자랐으니.’
이유식은 나름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 열심히 먹였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 속상하다.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의사 선생님은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것 빼곤 모두 양호합니다. 머리둘레는 아주 작은 편인데, 요즘은 또 부모들이 작은 머리를 선호하는 세상이니까요. 허허.”
“그런가요?”
“네. 그리고 이제 24개월 된 친구치고는 언어능력이 정말 놀라운 수준으로 빠릅니다. 언어 신동이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아빠는 이렇게 뛰어난 친구를 어떻게 하면 더 잘 키울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살찌울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하면서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요. 예쁜 아기 잘 키우세요. 정말 간만에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봐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하하.”
진료를 마치고 수납하려 하자 간호사가 손을 내저었다.
“아네요. 이거 성현 쌤이 이미 다 계산해놓으셨어요.”
“성현이가요?”
영유아 건강검진은 기본적으로 무료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전액 부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기초적인 부분만을 검사하기에 나는 여기에 몇 가지 검사를 추가했다.
혈액, 소변, 안과, 고관절 검사 등.
'영유아 건강검진만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질환도 있다고 하니까.'
게다가 하연이는 지금까지 병원 한 번 오지 않았던 아이다.
이왕 할 거 확실히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비용이 발생하는 추가 검사를 진행했는데 모두 공짜라고?
“네.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미안하시면 성현 쌤한테 하연이 영상 자주 보내주세요.”
영상? 그게 무슨 말이지?
간호사는 웃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오른 하연이 공연 영상.
“이걸 어떻게?”
“인턴 쌤들이 대단하다고 병원 곳곳에 홍보하고 다니세요.”
“네?”
“저도 영상으로만 봤을 때는 애가 참 잘한다 정도였는데 실물을 보니까 너무 귀엽네요.”
도대체 성현이 이 녀석은 병원에다 무슨 짓을 한 걸까.
“지금 저희 병원에서는 하연이 팬클럽이 있을 정도예요. HiYeom하연 채널 저도 구독했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간호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소아청소년과를 떠났다.
나중에 보라매병원에서 하연이 위로공연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연이가 복도 벽 게시판에 붙여진 종이를 가리켰다.
“하연아. 왜?”
“아빠아. 저거! 저거!”
“응?”
하연이가 가리킨 종이를 보니까 병원 홍보 영상 제작자를 찾습니다라는 공고가 붙어있다.
병원 홍보 영상 제작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다.
촬영은 짧으면 하루. 보통 이삼일이면 다 끝난다. 편집도 그다지 손이 많이 가는 영상은 아니다.
병원 홍보 영상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틀이랄까, 포맷이 있다.
대개는 병원 전경, 병원 내부 모습, 의료진들의 치료하는 장면 정도가 전부니까.
‘비디오쉐어에 있을 때 몇 번 촬영한 적이 있고.’
다만 단가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이 병원은 성현이가 근무하고 있기도 하고, 성현이를 날 위해 진료비까지 내주지 않았던가.
‘한번 지원해볼까나.’
그런데 잠시만.
나는 하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연아.”
“네에!”
“너 한글 읽을 줄 알아?”
하연이가 살짝 움찔거리는 것 같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어리니딥에서 배웠쪄요오!”
“그래?”
요즘 어린이집은 3살한테도 글씨를 가르치나?
아무튼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건 정말 잘한 결정 같다.
유주아. 고마워!
#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나는 집으로 돌아와 유튜브를 켰다.
HiYeom하연 채널 성장세를 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아이가 골고루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음식 재료들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하연이가 또래보다 체중이 덜 나가는 건 100% 내 잘못이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먹여야 되겠어.’
어제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들었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내내 맘에 걸려 속이 편치 않았다.
그동안 먹고사니즘에 천착하다 보니까 정작 하연이 식단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하연이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던 것도 있고, 사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 보니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영상마다 아이에게 꼭 먹여야 할 음식의 종류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으흠. 성장하는데 영양 성분이 대단히 중요하구나. 일단 우유를 주문시켜야겠고. 콩이랑 등푸른생선류도 좋네.”
몇 가지 영상을 살펴본 나는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샀다.
두 눈으로 직접 보니 그동안 너무 내가 내 멋대로 식단을 꾸린 것 같다.
‘두부, 고등어, 버섯, 시금치, 브로콜리, 당근, 미역. 소고기. 이런 건 잘 사 먹지 않았잖아. 반성해야겠다.’
장을 마친 나는 인근의 다이소에도 들렀다.
식기류를 사기 위함이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음식이 담길 그릇이 평범하다면 맛이 떨어지기 마련.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플레이팅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예쁜 식기류는 필수였다.
나는 하연이가 좋아할 만한 파스텔톤의 식판과 수저. 그리고 심플한 느낌의 컵과 쟁반 및 각종 조리 도구들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왜 캐릭터가 들어간 식기류는 구매하지 않냐고?
하연이는 신기하게도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캐릭터가 들어간 제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명백히 싫어했다.
유치하다나 뭐라나.
‘하연이 어린이집 친구들은 대부분 공주님 캐릭터 좋아하던데.’
반면 하연이는 파스텔톤이 들어간 제품을 좋아했다.
‘독특하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3살짜리 딸내미가 공주 캐릭터는 유치하다고 싫어하고, 20대 여성처럼 파스텔톤을 좋아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는데 양손이 무겁다.
한 손에는 마트에서 장본 식재료들.
반대쪽 손에는 다이소에 산 식기류들로 어깨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래도 이게 다 하연이에게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기 위한 밑거름 아니겠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한 다음 블로그와 유튜브를 뒤적이며 하연이에게 해줄 음식을 찾았다.
하연이는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편이지만 이제는 영양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요게 좋겠네.’
세 가지 색상이 선명하게 구현된 삼색소보로 덮밥이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갈색의 고기, 노란색의 계란, 연두색의 야채가 잘 조화되어 영양도 풍부해 보인다.
만드는 과정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볶은 소고기와 계란 스크램블. 그리고 볶은 애호박을 잘게 다진 뒤 밥 위에 올리면 끝.
‘만들기도 쉽고 보기에도 무척 예쁘네. 하연이가 좋아하겠다.’
나는 영상 레시피를 보며 요리를 따라 하다가 손을 씻고는 카메라를 가져왔다.
이왕 만드는 거 요리 영상으로도 찍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의 레시피를 보고 만드는 건데 이걸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고, 무언가 다른 컨셉과 주제가 필요했다.
‘아빠가 직접 만드는 요리라는 부분을 강조하면 되려나? 아니다. 일반적인 레시피 영상 말고 조금 더 재미있고 신나는 방식으로 만들면 어떨까?’
전에 얼핏 유튜브를 보니 1분 요리라고 엄청나게 빠르게 핵심만을 편집해서 요리하는 영상들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요리 만드는 전체 과정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 짧게 편집된 요약 버전이잖아? 그래. 그게 좋겠어.’
여기에 재미있게 편집된 자막과 음성까지 추가되면 나만의 요리 레시피 영상이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이걸 HiYeom하연 채널에 올리는 건 조금 성격이 다를 것 같기도 하다.
하연이 채널에는 하연이와 관련된 영상만 올리고 이런 영상들은 별도의 채널에 따로 올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나만의 채널을 만들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나는 채널 제목을 뭐로 지을지 고민하다가 ‘하연아빠 TV’라는 신규 채널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카메라를 세팅한 다음 요리에 집중했다.
“우선은 전체 식재료를 한 컷에 담고 나서, 소고기부터 시작해볼까.”
나는 다져진 소고기의 핏물을 뺀 다음, 그릇에 넣어 간장과 설탕을 넣어 버무렸다.
향긋한 냄새가 벌써부터 훌륭하다.
이어서 애호박을 깍둑썰기로 잘게 다진 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켰다.
새로 산 프라이팬이라 그런지 코팅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어서 차례차례 재료를 조리했다.
소고기부터 볶아준 다음 애호박. 마지막으로 계란을 풀고는 긴 나무젓가락을 휘저어서 스크램블로 만들었다.
“어이쿠. 이만 불을 꺼야겠다.”
스크램블은 80%까지만 익혀야 부드럽다나 뭐라나.
예전에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정말 어떻게 요리했는지 모르겠다.
“이걸 여기에 이렇게 옮기고 나서. 잠깐. 크크크큭.”
스크램블 에그를 접시에 담던 나는 그만 카메라를 끄고는 참았던 웃음을 토해내야만 했다.
“하하. 이게 뭐야. 도대체.”
스스로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풍경이 낯설다.
지금까지 요리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저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 하는 일과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무척이나 즐거웠다.
‘하연아빠 TV가 아니라 요리사 하연아빠로 채널 이름을 바꾸는 게 좋으려나.’
농담이다.
세상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사막의 모래만큼이나 많고, 나는 요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다양한 영상 중 일부분이라면 괜찮겠지만, 요리 전문 채널은 내 장기도 아니거니와 나만의 특색을 살리기도 어려울 터.
나는 다시 카메라를 켜고는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어디 시식해볼까나.’
이건 내가 살아생전 만든 첫 요리였다.
그동안 인스턴트 제품을 만들어 먹은 적은 많았지만, 그것들을 요리라고 하긴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번 삼색소보로덮밥은 내 인생 첫 요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첫 요리인 만큼 하연이한테 바로 선보이고 싶지만 일단 맛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주는 게 예의.
게다가 하연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는 동안 다 식을 텐데, 식은 요리를 대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어디 독이 있나 없나 확인해 볼까?”
나는 숟가락으로 덮밥을 큼지막하게 파서 입 안으로 넣었다.
일단 향은 나쁘지 않다.
오물오물.
식감도.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크크크크.”
안돼! 내 안에 잠들어있던 흑룡이. 중2력이 부활하려고 하고 있어!
그래도 이건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맛있다! 참말로 맛있단 말이다!
‘이걸 내가 했다 이거지?’
고소한 소고기와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달콤한 애호박과 쫀득한 쌀밥이 입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춘다.
마치 요리왕 비룡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것 같다.
“훌륭해.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최고로군.”
나는 스스로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개선장군처럼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연이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딸아! 아빠가 오늘 네게 최고의 저녁을 선사해주마!!”
하연이와 유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후후 알 턱이 있나.
나의 이 필살 요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