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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11화 (11/135)

내 딸은 국힙원탑 11화

신상준은 하연이를 볼 때와는 180도 달라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쉽지 않은 길이 될 거란 사실을 먼저 밝힌다.”

“출생신고 말이야? 해결책 찾았다며?”

상준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015년에 제정된 사랑이법에 따라 미혼부의 출생 관련 재판 과정이 간소화된 건 사실이야.”

“재판이라고?”

“응. 현재 가족관계등록법상 미혼부는 아이가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직접 할 수 없거든. 재판까지 가야 해.”

재판이라니. 내 자식이고 직접 이렇게 양육하고 있는데 재판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상준이가 괜찮다며 다독인다.

“우선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고맙다, 상준아.”

“그리고 이건 그냥 제안인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어.”

녀석이 갑자기 뜸을 들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괜찮아, 말해봐.”

“현모의 도움을 함께 받는 건 어때?”

“현모? 걔는 왜?”

“현모가 KBC 기자잖아. 너에 대한 사연이 방송으로 나가면 재판에 더 유리할 수 있어. 요즘 판사들이 은근히 여론을 신경 쓰거든.”

하긴 그동안 국민 정서에 반하는 판결을 수도 없이 내리지 않았던가.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눈치를 봐야 정상이겠지.

“나아가 너처럼 출생 신고를 못 해서 힘들어하는 미혼부들을 위해 법 개정을 촉구할 수도 있겠지.”

“나 같은 미혼부들?”

그러고 보니 상준이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법조인이 된 거겠지만.’

사실 하연이를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미혼부라는 명칭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미혼모라는 단어는 많이 들었지만 미혼부라니.

정작 자신이 경험하고 나서야 그 처참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미혼부들을 도울 수 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한 가지가 걸렸다.

“다 좋은데 하연이가 마음에 걸리네.”

“얼굴 나갈까 봐 그러지?”

“응. 나는 괜찮은데, 하연이가 미혼부의 자식이라는 게 드러나면 주위에서 곤란을 겪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자녀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나가는 일이 많아. 주위에서 알아보긴 힘들 거야.”

“그래도. 만에 하나 주변에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 하연이가 받을 고통과 충격을 생각하면. 조금 꺼려지긴 하네.”

나는 무거운 얼굴로 상준이가 사다 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하연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하연이가 나랑 눈을 마주치더니 눈빛을 반짝였다.

“아빠아. 나 티브이에 얼쿨 나까도 괘차나요.”

“응? 하연아. 지금 뭐라고?”

“티브이에 얼쿨 나와도 괜찬타고오!”

그 말에 상준이가 감동이라도 한 듯 하연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으어어! 하연이 넌 정말 천사로구나! 천사! 어쩜 이렇게 마음씨가 넓은지!”

“까아아. 아파! 내려줘 어어!!”

“으으 사랑한다, 하연아! 사랑해!”

상준이가 턱수염 공격으로 하연이를 괴롭히자 나는 잽싸게 하연이를 그에게서 빼앗고는 정의의 로우킥으로 응징해주었다.

감히 어디서 내 딸을 괴롭혀.

“끄어억. 이 자식.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때려도 되는 거냐!”

“하연이 괴롭히면 누가 됐든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앙?”

내가 하연이를 꼬옥 안고 상준이를 노려보자 하연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아하하하. 아빠아 완져언 웃겨어!”

머쓱해진 얼굴로 하연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좌식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방송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일단 친생자 출생신고를 위한 확인 신청서를 작성해야 해. 내가 여기 가져왔다.”

녀석은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너의 경우에는 친모의 이름은 알지만,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는 경우니까 별지 제1-2호 서식에 적으면 돼.”

“사건본인이라고 쓰인 건 하연이 말인가?”

“맞아. 신청인은 너고, 사건본인은 하연이지.”

“여기 출생연월일에는 어떻게 적어야 해? 하연이가 태어난 날을 정확히 모르는데.”

“그건 대략적인 출생추정 연월일을 기재하면 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하연이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구나.

‘생일을 모르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준아.”

“어.”

“이거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지?”

“물론.”

“그럼 4월 5일로 해야겠다.”

“그날에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하연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수 이하연 알지?”

“가족 문제로 자살한 애? 당연히 알지. 대한민국에 이하연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

“하연이도 이하연 노래를 무척 잘 부르거든. 그리고 이하연이 세상을 떠난 날이 하연이가 내게 온 날이기도 하고.”

“진짜로?”

“응. 진짜로.”

“그런데 4월 5일은 뭔데? 이하연 생일이라도 돼?”

“맞아. 이하연 생일이 4월 5일이야.”

“헐. 너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노래방에서 맨날 이하연 노래 부를 때 짐작했어야 했는데.”

하연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준이가 사다 준 장난감도 마다한 채 멍한 얼굴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다.

“정했어. 오늘부터 하연이 생일은 4월 5일이야!”

“크크 그래라. 설마 하연이 이름도 이하연에서 따온 건 아니지?”

“맞아. 왜? 이상해?”

“...아니다. 계속 적어라.”

나는 신청 취지를 확인한 다음 그 아래에 적힌 신청이유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에는 뭐라고 적어야 하는 거야?”

“내가 온 게 그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게 은근히 적기 난감하거든. 상대를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은 왜 안 했는지. 왜 헤어졌는지. 왜 붙잡지 못했는지. 왜 지금은 연락이 안 되는지 등 자세하게 적어야 해.”

“그렇게까지 자세히?”

“응. 결혼하지 않은 아빠가 엄마를 대신해서 출생신고를 하는 이유에 대해 판사에게 문장으로 납득시켜야 하는 거니까.”

“복잡하구나 정말.”

남에게 사생활이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어쩌겠나.

하연이가 국적과 주민등록번호를 받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

“이거 쓰고 나면 끝이야?”

“아니. 법원에서 보정명령을 내릴 거야. 유전자 검사도 받아야 하고.”

“나 유전자 검사 받은 거 있는데? 아. 공공기관 제출용으로 받은 건 아니구나. 젠장.”

“또 받으면 되지. 아무튼 빨리 진행해봤자 최소 3개월은 걸릴 거야. 길면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고.”

“1년? 진짜 너무하네. 내 자식이 분명하고 상황이 이런데 출생신고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법이 그런 걸 어쩌겠냐. 그나마 사랑이법이 제정돼 줄어든 거야. 고마운 줄 알라고.”

“이러다 기다리다 지쳐서 양육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많지. 그러니까 현모 불러다 기사화해보자 이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대의나 정의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알겠어. 현모한테 연락해볼게.”

“그래. 짜샤. 좋은 일 한번 같이 해보자.”

상준이가 뭐가 그리 좋은지 자기 손을 내 어깨에 걸치고는 씨익 웃었다.

하여간 의협심이 넘치는 녀석이다.

“아무튼 이 건은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그리고 너 혹시 아동수당이나 보육료는 지원받고 있냐?”

“아동수당? 출생신고가 안됐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

“어휴. 바보. 이러니까 미리 말해줬으면 좀 좋아!”

상준이는 빛의 속도로 내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왜? 받을 수 있는 거야?”

“어! 법이 바뀌어서 이제 출생신고 전이라도 아동수당이랑 보육료랑 가정양육수당 다 받을 수 있다고!”

“그랬어? 나야 몰랐지. 나 같은 일반인이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어휴. 답답하다 답답해. 앞으로 또 연락 끊기만 해봐라. 유전자 검사 결과 받고, 출생신고를 위한 법원 확인 절차 진행 중임을 확인하는 증명 서류 떼줄 테니까 당장 주민센터에 신청해.”

“그래그래. 그럼 유주한테도 덜 미안하게 되겠네.”

“맞다. 너 돈도 안 내고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고 그랬지? 빨리 신청해. 유주 씨도 참 대단하다, 정말.”

“그래야지. 와 진짜 친구가 변호사인 게 좋긴 좋구나.”

“알면 좀 써라 써!”

상준이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 온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고맙다. 상준아.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친구 잘 둬서 뿌듯하다 참.

#

상준이의 도움으로 하연이 출생신고를 위한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미혼부 자녀 복지서비스와 건강보험까지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하연이는 매스컴을 탔다.

그것도 전 국민이 보는 KBC 9시 뉴스에 말이다.

나는 하연이와 함께 TV에 앉아 언제 우리 차례가 나오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하연이가 TV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아빠아!! 우리 나왔쪄요!!”

“오오! 진짜다, 진짜!”

화면 아래에 <홀로 아이 키우는 미혼부들 “아빠라는 이유로 출생신고 너무 어려워요”> 자막이 선명하다.

그런데 아직 앵커가 말도 하기 전인데 하연이는 어떻게 이걸 알았을까? 설마 저 자막을 읽었다고?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남자 앵커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미혼부의 출생신고를 어렵게 하는 가족관계법. 사랑이법이 제정되고 8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출생신고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미혼부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23개월이 되었지만, 그동안 건강보험은커녕 출생신고조차 되어있지 않던 한 부녀의 사연을 취재하였습니다. 구현모 기자의 단독보도입니다.”

화면이 바뀌더니 우리 집이 나온다.

뉴스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다.

하연이를 깨워 아침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보내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어서 내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이씨. 여드름 구멍까지 다 보이네.’

TV에 나온 내 모습을 보니까 되게 부끄럽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자의 질문에 내가 답을 한다.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하려면 무척이나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해요. 주변에 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면 단독으로 재판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죠.”

“아직도 딸은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이번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친생자 출생신고를 위한 재판을 신청한 상황인데요. 언제 결과가 나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카메라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하연이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이어서 상준이가 등장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는데 재판을 통해 국적과 기본권을 취득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짜식. 변호사라고 말 잘하는 것 봐라.

이후로는 하연이가 어린이집에서 노는 장면과 내가 하연이의 손을 잡고 하원 하는 장면, 함께 식사하는 장면 등이 나왔다.

그러한 장면 위로 현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차례 법 개정을 거치며 미혼부 출생 신고의 길이 조금씩 열렸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법적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고통받는 미혼부. 이들이 하루빨리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KBC 구현모입니다.”

- 뚝

현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

그동안 하연이 키운다고 고생했던 일도 생각나고, 하연이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까 울컥한 것 같다.

아이 앞에서 이 무슨 진상인지.

멈춰야 하는데 멈출 기미가 없다.

옆에서 하연이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위로를 건네주었다.

“아빠아. 우지마라요. 웅? 우리 아빠 정마알 고생 마나쪄요! 내카 아라요. 웅?”

아. 진짜. 현모도 그러더니 너까지 왜 그러니.

나는 그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고, 다시금 다짐했다.

하연이를 잘 키우겠다고. 누구에게도 부족하지 않은 아이로 키우겠다고.

#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상준이와 현모를 비롯해서 성현이까지 우리 집을 방문했다.

녀석들은 오늘 마시고 죽자고 다짐했는지 두 손 가득 소주와 맥주. 그리고 안주로 가득하다.

상준이가 방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상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그런데 하연이는? 아직 하원 안 했어? 나 너 보러 온 게 아니라 우리 하연이 보러 온 건데?”

저 정도면 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주가 잠시 맡아주기로 했어.”

“유주 씨가?”

“대신 조건이 있지.”

“조건? 그게 뭔데?”

세 얼간이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내 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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