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8화
전생에 유명 셰프들의 음식을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또 처음이다.
처음에 고집부렸던 걸 잊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쩝쩝.”
“후후. 맛있었나 보네. 하나 더 해줄까?”
“아, 아네요! 배 부어러요!”
김하연은 식탁에서 팔을 내리고는 자신을 향해 싱긋 웃고 있는 신유주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런 곳에서 어린이집 선생님만 하고 있기에는 아까운 얼굴이었다.
‘몸매도 좋고.’
그녀는 묘한 캐릭터였다.
피곤하기만 한 아이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친자식처럼 아끼는지 모르겠다. 그런다고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본인이 한가할 때는 다른 반 선생님을 도와주는 등 일처리도 빠르고 사교성도 좋다.
자신처럼 연예인을 했더라도 잘나갔을 것 같은 사람.
김하연은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니임.”
“응? 한 그릇 더 줘?”
“아뇨오! 왜 선생니임 티비이에 안 놔와어요?”
“티비? 내가?”
신유주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김하연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하하. 뭐야. 선생님이 그리 예뻐? 얘도 참.”
하지만 김하연은 신유주에게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힘이 세! 아프잖아!’
좋게 이야기하고 싶어도 자신과 신유주의 관계는 딱히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친절할 때는 천사가 따로 없지만 때때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더 쓴소리를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하긴 나 같아도 전남친이 갑자기 모르는 애를 데리고 나타나서는 맡아달라고 하면. 열 받겠지.’
여자로서 충분히 이해는 간다.
게다가 자신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뾰족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아. 진짜 여기 싫어.’
어린이집 생활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1세부터 7세까지.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있었지만 제법 사람같이 말을 할 줄 아는 건 최소 4살 무렵이었다.
물론 그보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스럽냐고 하면 전혀 아니었다.
어찌나 시끄럽고 유치한 지 어울릴 생각은커녕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껍데기만 3살이지 속 내용물은 20대 후반의 성인이 아닌가.
어쩌다가 아이의 몸으로 환생하게 된 것일까.
‘그저 너무 억울하고 분할 뿐이었는데.’
자살 직전.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얼핏 하긴 했지만 이렇게 동시대의. 그것도 자기가 죽기 전에 태어난. 그러니까 이미 자아를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의 몸으로 환생하게 될 줄이야.
이런 건 자신이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친모는 태어난 지 2개월밖에 안 된 갓난아이를 버렸고, 대신 자신을 맡게 된 친부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거기에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자는 척 침대에 누워있다가 실눈을 뜨고 보면 김진형이 새벽 늦은 시각까지 작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일을 하는 게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1살 때는 도저히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트렸지만 그래도 지금은 울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았고, 가만히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잠들곤 했다.
‘김진형. 왜 안 오는 거야.’
아빠인 김진형을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익숙한 전주가 귀에 들려왔다.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유주가 핸드폰으로 노래를 튼 것이었다.
그것도 전생에 내가 불렀던 발라드 곡 <슬픈 연인>.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던 1집. 그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수록되어있는 곡인데 이걸 꺼낼 줄이야.
김하연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신유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곡을 많이 좋아하는지 혼자 흥얼거리며 남은 밥을 먹는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너는 정말로 나를 잊은 거니. 아. 나는 또..”
그녀가 너무도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흐으으음.”
“응?”
순간 신유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 너희 아빠 요즘도 이하연 노래 들으면서 질질 짜니?”
“네에?”
“예전엔 장난 아니었어. 노래방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하연 곡만 튼다니까. 바보같이.”
그랬었나? 그를 만난 뒤로 자신의 노래는 딱 한 번 들어보았다. 그것도 원곡이 아니라 MR이었고, 청취가 아닌 작업을 위한 목적으로.
조금 따라 불렀다고 엄청나게 의심받던 바로 그때 말이다.
“아무튼 이 노래도 자주 트나 보네. 3살인 네가 알 정도면.”
“우...그게..”
“설마?”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째려본다.
그러더니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연이, 네 이름도 이하연에게서 따온 건 아니겠지? 스토커도 아니고 그럼 진짜 대박인데!”
“모, 모라요. 그러언 건.”
“됐다. 나도 참. 어린애 상대로 뭘 물어보는 건지. 다 먹었으면 다시 전화해보자.”
그녀는 노래를 끄고 김진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몇 번을 연락해도 신유주의 휴대폰 너머에서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신유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1시간만 더 기다렸다가 그때도 안 받으면 가자.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려 자기도 어서 퇴근하고 싶을 텐데.
여기서 또 기다리자니. 그녀는 김진형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왜 헤어진 거지?’
아무튼 덕분에 오래간만에 자신의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
이하연이 아닌 김하연으로 듣는 이하연의 곡은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멜랑콜리해진다.
김하연은 왠지. 신유주와의 거리가 조금 좁혀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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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진형! 진형아! 일어나!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방바닥에 쓰러져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유주였다.
“유주?”
“어이쿠. 이제 정신이 드셔? 네 딸도 안 챙겨가고, 전화도 안 받고. 아주 천하태평이네?”
이런. 하연이를 데리고 와야 했는데 그만 깜빡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주변을 살폈다.
“하연이는? 내 딸은?”
“화장실에 있어. 꼴에 자식부터 챙기기는. 그럼 나 간다.”
유주가 시크하게 손을 흔들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 잠깐만!”
“왜?”
“지금 몇 시지? 밥이라도 먹고 가.”
유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시계를 가리켰다.
‘뭐? 벌써 9시 33분이라고?’
회장한테 이메일을 보낸 게 오후 3시 무렵이었으니까.
무려 6시간 넘게 뻗어있었던 건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락을 안 받길래 내가 어쩔 수 없이 하연이 데리고 온 거야. 저녁은 먹였으니까 잘 좀 돌봐. 그리고.”
“그리고?”
유주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몸 좀 신경 쓰면서 일해라. 그게 뭐니? 입 돌아가려고 찬 바닥에서 자고. 우리도 이제 20대 끝이야. 내년이면 서른이라고. 조심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집을 떠났다.
혹시 날 챙겨준 건가.
아무튼 진짜 조심해야지. 한 가지 일에 몰입하면 다른 데 신경 쓰지 못하는 건 나의 단점 중 하나였다.
‘이젠 혼자도 아니고 애 아빤데. 정신 좀 차려야지.’
손바닥으로 두 뺨을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화장실에 있다던 하연이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걸까.
“하연아. 아직 화장실이야?”
“흐으으음.”
“?!”
울음 한 번 보이지 않던 애가 화장실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다.
‘설마 내가 데리러 가지 않아서 놀란 건가?’
황급히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하연아!”
“응?”
“대체 뭐 하는 거야?”
“노래 부르고 이쩌쩌요. 왜요?”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하연이는 왜 갑자기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해를 하냐는 얼굴이었다.
‘우는 게 아니라 노랠 부르고 있던 거였나?’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 불렀으면 적당히 하고 나와라.”
“아빠아!”
“응?”
“서언새앵니믄?”
“유주? 선생님은 방금 가셨어. 왜?”
“아냐. 문 꽈악 다앗고 나가조오!”
“그, 그래.”
갑자기 쟤가 왜 유주를 찾고 그러지. 얼굴만 봐도 학을 떼더니.
아무튼 혼자 울고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런데 연기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아무래도 내 딸은 예능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노래 실력도 제법이고.’
유튜브를 계속 운영했으면 팔로워가 많이 늘었을 텐데.
아쉽게도 하연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명백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직도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연이를 촬영하려고 하던 그때.
하연이가 단호하게 외쳤다.
“노오!”
“노오?”
“시러어요!”
“응? 뭐가?”
“카메라아. 촤려엉! 찌키는 거 시러!”
놀라 자빠질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육아영상은 더 이상 찍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계정에 업로드가 되지 않으니 기존에 모았던 팔로워조차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는 상황.
아무튼 하연이에게 엔터테이너로서의 소질이 있다면 가능한 이른 시기에 능력을 개발시켜주는 게 아빠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
‘다음에 시간 나면 이 문제에 대해 유주랑 상담을 좀 해봐야겠어.’
오래지 않아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이에게 잠옷을 갈아입힌 뒤 침대에 눕혔다.
하연이가 참 신기한 게 눕히면 10분도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한 시간 이상은 잠투정을 한다던데 우리 딸은 참 대단해.’
하연이가 자고 있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동안 놓친 메시지가 없는지 체크했다.
다행히 중요한 메시지는 없었다.
이어서 이메일.
응?
황태진에게서 답신이 와 있었다.
그것도 내가 그에게 메일을 보낸 지 정확히 1시간 뒤.
깜짝 놀란 나는 휴대폰을 놔두고 노트북을 켰다.
‘아니 미래 그룹 회장 정도면 아랫사람 시켜서 연락하면 되잖아.’
실무자도 아니고 회장에게서 직접 받아보는 답 메일이었다. 중소업체도 아닌 대한민국 최고 재벌인 미래 그룹 회장 황태진에게서 말이다.
노트북을 켠 나는 얼굴을 모니터에 처박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보내준. 영상은. 잘 보았네. 무척 깔끔한 솜씨더군.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던데. 내일까지. 수정 가능하겠나? 아쉬운 부분이라 함은..”
메일에는 황태진이 직접 작성한 피드백 요청사항이 3가지 있었다.
첫째는 자막 폰트가 조금 컸으면 좋겠다는 것.
오케이. 이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폰트 크기만 키우면 되니까.
둘째는 로비에 들어오기 직전에 드론으로 촬영된 회사 전경샷에 이어 빠르게 아래로 내려와 로비로 들어가는 식으로 영상을 구성해 달라는 것.
그는 이를 위해 이전에 찍은 드론 촬영본을 추가로 첨부해놓았다.
“아니 회사 회장님이라며. 뭐가 이렇게 디테일해?”
뭐 이것도 그가 추가 영상을 주었으니 그리 어렵진 않다.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하강하여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식의 연출은 좀 진부하긴 하지만 많은 곳에서 쓰이는 기법이었다.
셋째는 하연이가 출연하는 분량을 지금보다 훨씬 더 늘려달라는 것.
외부인 대상이 아닌 내부 직원 대상인 영상이다 보니 직원들의 아이가 행복해하는 장면이 많이 들어갔으면 한다는 거였다.
“나는.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이번 영상을. 만들라고 지시한 거네. 그러니. 여자아이가. 출연하는 장면을. 더 많이. 집어넣어 줬으면 좋겠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 임원이란 존재는 색감이 어둡다, 밝다. 노래가 별로다, 시끄럽다, 자막에 들어간 메시지가 이상하다, 조금 더 많은 내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피드백만 하는 거 아니었나.
‘역시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회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나저나 내일까지 수정해서 달라니. 마감이 코앞이다.
서둘러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띄우고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프리랜서에게 올빼미 생활이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족쇄다.
그래도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황태진에게서 직접 답 메일을 받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있겠나. 무언가 아주 중요한 미션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