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6화
“그러니까 새로 완공한 1층 로비를 직원들에게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으시다고요?”
“네. 이미 관련 영상은 다 찍어뒀고요. 편집만 해주시면 됩니다.”
“영상만 있다고 해서 편집이 되는 건 아니라서요. 혹시 콘티라거나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을까요?”
“네. 오늘 그것 때문에 굳이 이곳으로 진형 씨를 부른 겁니다. 여길 보시죠.”
홍보팀 직원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천장에 매달린 빔프로젝터에서 빛이 쏘아져 나왔다.
“저희가 정확히 몇 분 몇 초에 어떤 장면이 들어가야 하고, 또 어떤 자막이 들어가야 하는지 적어뒀습니다. 트랜지션도 몇 가지 추천해뒀는데 그건 저희보다 편집자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 자유롭게 해주시면 되고요.”
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건 이미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화면에는 몇 분 몇 초에 어떤 영상들을 참고해서, 어떠한 각도와 어떤 느낌의 장면이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자막 위치와 색깔, 폰트는 물론이고 화면이 바뀔 때 어떤 효과를 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상세히 적혀있었다.
단계마다 영상에서 보여줘야 할 주요 포인트까지. 어디 하나 빠트릴 데가 없었다.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 영상 편집만 내게 맡긴 건가?’
상대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방긋 웃으며 말한다.
“박선종 대표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영상 편집의 달인이시라죠? 퀄리티 있는 영상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편집할 수 있다고요.”
“아 예. 뭐 어쩌다 보니.”
“사실 지금 저희한테 필요한 게 시간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거 내일모레까지 완성이 가능할까요?”
“내일모레요?”
아무리 그래도 10분짜리 영상을 이틀 만에 뚝딱 만들라니.
날을 새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퀄리티가 떨어질지 모른다.
상대는 그것까지 예측했다는 듯 씨익 웃는다.
“최종 완성본을 그때까지 요청드리는 건 아닙니다. 저희도 위에 보고를 드리고 컨펌을 받아야 하니까요. 아마 피드백 과정 거치면 일주일 정도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을 거예요.”
“아하.”
그러니까 일단 내일모레까지 1차 영상 편집본을 만들어 보내면 윗선의 피드백을 받아서 추가로 수정을 요청하겠단 의미다.
“그림이 필요하다는 말이로군요.”
“정확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림. 그러니까 영상은 다른 콘텐츠와 다르게 사전에 텍스트 보고로는 한계가 있었다.
직접 화면이 나와서 움직이고 자막이 딸리고 사운드가 나오는 가편집본이라도 봐야지 그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감각이 있거나 젊은 사람들이야 텍스트로 적힌 기획서나 시놉시스만 보더라도 대략적인 그림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나이 든 임원들은 일단 눈앞에서 직접 움직이는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디오쉐어에 다닐 때도 일단 영상을 보고 난 다음에야 피드백을 준 클라이언트가 다수였지. 그래서 최종 편집본은 마감일을 넘기기 일쑤였지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보통 촬영과 편집은 같은 업체에서 진행하는 게 관례일 텐데요. 왜 편집만 따로?”
내 말에 홍보팀 직원들끼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선임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저희가 추가로 자꾸 수정을 요청하니까 계약금을 뱉고 튀었습니다. 하하.”
“계약금을 뱉고 튀어요?”
“네. 그래서 긴급하게 영상 편집만 빠르게 가능한 분을 구하다 보니 김진형 씨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때요? 가능할까요?”
도대체 얼마나 수정 요청이 많았길래 미래 그룹의 수주를 포기하고 도망간 것일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이고 뭐고 일단 하고 봐야 했다. 혼자만의 몸도 아니고 하연이까지 키우려면 지금 제일 급한 건 돈이었으니까.
게다가 촬영본도 있고 자막은 물론 콘티도 미리 다 준비된 상황.
시간은 다소 촉박했지만 금액이 장난 아니다.
‘일주일 작업하고 2,000만 원이라니. 완전 꿀이네.’
영상 단가는 기준이라는 게 없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촬영하고 같은 촬영본을 편집하더라도 업체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신생 업체는 어떻게든 일을 따내야 하니 아주 낮은 금액이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을 했고, 인맥이 많거나 경험이 쌓인 곳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래도 광고나 유튜브 등 외부 노출 영상도 아니고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 편집에 2천만 원이라니. 이건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내일모레까지 무슨 수가 있더라도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박 대표님이 추천하신 분이니까 저희도 믿겠습니다.”
“네. 그럼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오신 김에 사인까지 하고 가시죠?”
그들이 내민 계약서를 천천히 읽었다.
어차피 표준계약서라 법적인 부분이랑 단가. 그리고 납기 마감일만 확인하면 된다.
‘미래 그룹같이 큰 곳에서 괜히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엉뚱한 계약서를 들이밀진 않을 테니까.’
내가 계약서를 확인하는 사이.
홍보팀 선임자가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난색을 표한다.
“네? 아니 이사님. 그건 좀. 아뇨. 네네. 알겠습니다. 한번 물어볼게요.”
그는 전화를 끊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기 진형 씨. 한 가지 더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어떤?”
“저희 로비 한쪽에 사내 어린이집이 있거든요. 그래서 로비 소개 영상에 사내 어린이집 아이들이 출연하는 장면이 잠깐 나왔으면 하는데, 이게 직원의 아이들이다 보니 다들 아이 얼굴 노출에 곤란해하셨거든요. 어린이가 등장해서 로비를 오가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정작 아이들의 부모가 허락을 해주지 않는 상황인지라.”
그러니까 필요한 장면이 있는데 초상권 등을 이유로 찍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경우는 이 바닥에서 생각보다 흔한 일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랬군요. 저도 아이가 있는 입장인지라 그 마음은 이해됩니다.”
“네? 진형 씨 20대 아니에요?”
“아. 20대는 맞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가 있네요. 하하.”
그 말이 끝나자 홍보팀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돌연 선임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잘됐네요! 혹시 아이가 몇 살이죠?”
“3, 3살이요. 그건 왜요?”
“3살! 3살이면 충분하네요. 혹시 진형 씨 촬영도 가능하세요?”
“간단한 촬영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그건 왜요?”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쫘악 펼치며 말했다.
“영상 추가 촬영비로 500만 원을 더 드리겠습니다. 진형 씨 자녀분이 로비를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촬영에 시간이 필요하니 편집 마감일은 이번 주 금요일까지 보내주셔도 됩니다. 어떠세요?”
뭐? 단순히 아이를 촬영하기만 해도 500만 원이 추가된다고?
물론 말처럼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겨우 3살인 하연이를 데리고 여기에 와서 촬영을 해야 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라고 해봤자 고가의 카메라가 아니라 입문용 수준.
홍보팀이 보여준 촬영본과는 영상 때깔이 너무 달랐다.
‘게다가 나한테는 짐벌도 없는 걸.’
짐벌은 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전문 기기로 영상 촬영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홍보팀 직원은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카메라랑 짐벌, 조명 등 웬만한 촬영 장비는 저희 쪽에서 모두 준비할 수 있습니다. CF 찍을 수준은 아니지만 사내 홍보 영상용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그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카메라와 장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역시 미래 그룹. 나도 구경조차 못 해본 전문가급 장비의 이름이 쏟아진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이를 승낙했다.
어려운 촬영도 아니었고 단지 하연이가 로비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몇 컷 찍으면 된다. 아마 실제 영상에 등장하는 장면은 5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은?”
“내일 당장 찍으시죠. 그래야 편집하기 수월하실 테니까요.”
“네. 다만 아이가 몸이 아프다거나 혹은 찍기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것까지는 저희가 강요할 수 없죠. 어차피 못 찍을 거 각오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혹시 아이의 성별이?”
“딸아이입니다.”
“잘됐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정말 진형 씨가 저희 생명의 은인입니다. 위에서 어찌나 그 장면을 요구하던지 참나.”
그는 한참 동안 직장 생활의 서러움에 대해 내게 토로했다.
위에서는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린다는 등 중간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내부 직원들은 자신들을 귀찮은 일만 부탁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등 하소연이 이어졌다.
고생이 많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어디 프리랜서보다 더할까.
때로는 큰돈을 만질 때도 있었지만 월급쟁이처럼 따박따박 돈이 입금되는 게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든. 개인 사업을 하든.
남의 돈을 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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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오기 전.
어린이집에 들러 하연이를 찾았다.
유주가 아이를 데리고 현관으로 나온다.
원래는 어린이집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코로나가 정말 많은 것을 바꿨다.
“하연아. 오늘 재미있게 놀았어?”
“아뇨. 나 빠리 지베 갈래요.”
“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유주가 버럭 성을 냈다.
“야! 김하연! 하루 종일 선생님 말도 안 듣고 친구들하고도 안 어울리고!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너 진짜 이럴 거야!”
이런. 하연이가 어린이집에 적응을 못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걸 어쩐다.
조심스럽게 유주에게 물었다.
“유주야. 하연이 괜찮은 거야?”
“몰라! 벌써 등원한 지 한 달이나 지났잖아! 나도 이런 애는 처음이야.”
“처음?”
“그래. 보통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낯 가리는 걸 풀고 즐겁게 노는데. 아주 혼자서 고고한 학이다 학! 친구들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하연이를 꼬옥 안아 주고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하연아. 어린이집 재미없어?”
“응. 나 지베 있고 시포요.”
“그래도 안 돼. 아빠 없으면 혼자서 어떻게 집에 있으려고.”
“나아 혼다 지베 있을 수 있어염! 괜차나요. 딘따로!”
휴. 예상치 못한 변수다.
이렇게까지 어린이집을 싫어할 줄이야.
유주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유주는 하연이를 노려보더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얘 때문에 나도 여간 골치가 아니야. 이모한테 사정사정해서 애를 받았는데 애가 자꾸 이렇게 혼자서 겉돌면 내 입장은 뭐가 돼. 오늘 집에 가면 네가 하연이를 잘 타일러봐.”
“응 알았어. 네가 고생이 많다.”
“고생은. 진짜 어린이집 교사 4년 만에 이런 애는 처음이다. 무슨 고집이 이렇게 세?”
“메에롱!”
“뭐! 메롱! 이 녀석이!”
하연이가 유주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이럴 아이가 아닌데 어지간히도 유주가 싫은 모양이다.
유주 역시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아주 견원지간이 따로 없다.
“일단 내일은 내가 일이 있어서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고 데리고 있을게.”
“뭐? 그래도 애는 보내야지. 너 일을 어떻게 하려고?”
“일에 필요해서 그래.”
“일에 필요하다고?”
그녀에게 조금 전 미래 그룹 홍보팀과의 미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고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쁜 조건은 아니네. 그래도 당사자는 하연인데, 하연이 의견도 물어봐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연이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더니 이제는 또 자신의 제자라고 챙긴다.
이런 게 선생님의 모습인 걸까.
하연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연아. 아빠가 내일..응?”
“아빠! 나 그거 할래여! 촤령 할 게요!”
하연이가 일식집 고양이 인형인 마네키네코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하연이도 동의했고, 이만하면 내일 촬영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다음 날.
하연이와 함께 미래 그룹 본사 로비를 찾았다.
촬영 장비를 챙긴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홍보팀 직원들이 하연이를 보고는 두 눈이 올빼미처럼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