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5화
이제 세 살이 된 아기가 이렇게나 제대로 성인가요를 부를 수 있다고? 심지어 목소리나 가사도 없이 MR만 듣고도?
나의 채근에 하연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 마트에쪄 들었쪄요.”
“그래? 마트에서는 맨날 트로트만 틀지 이런 곡은 튼 적이 없는걸?”
“찌, 찐짜로오! 찐짜에염!”
“괜찮아, 하연아. 어디서 들었어?”
“아니이야! 내 마리 마자!!”
하연이는 뒷걸음치다가 바닥에 놓인 ‘재벌가의 환생’에 걸려 넘어졌다.
- 쿵!
“하연아 괜찮아?”
책을 치워뒀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다.
내가 스스로를 탓하는 사이.
하연이가 갑자기 책을 들더니 아니라고 생떼를 쓴다.
“아니이이야! 아니라고오!”
“그래. 하연아. 알았어. 아빠가 네 말 믿어. 그러니까 책 내려놔. 위험해.”
하지만 하연이는 책이 마치 방패라도 된 듯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다.
‘평소에는 얌전하던 애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나오지?’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방어적이다.
무거운 책은 아니지만, 상대는 아기다.
실수로 떨어뜨렸다간 발을 다칠 수도 있었다.
나는 서둘러 하연이의 손에서 책을 뺏으려다가 그만 하연이 손가락을 종이로 깊이 베어 버렸다.
- 스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의 손에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더니.
- 뚜욱
아래로 떨어져 방바닥에 시뻘건 흔적을 남긴다.
그와 동시에 내 눈도 뒤집힌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을 발로 차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는 빛의 속도로 하연이를 안았다.
“하연아!! 괜찮아?”
하연이는 많이 놀랐는지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저 두 눈만 껌뻑인다.
서둘러 하연이의 상처 난 손가락을 잡고는 냅다 입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사정없이 빨았다.
“쪼오오옥쪽! 하욘아. 쫌 갠차나아?”
어릴 때 외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방법이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외할머니 말에 따르면 이렇게 해야 상처가 빨리 낫는다고 그랬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입안에선 묵직한 쇠맛이 났다.
그런데 하연이 표정이 좀 이상하다.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얼굴이 새빨갛고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후끈거린다.
큰일이네. 설마 상처 부위에 안 좋은 균이라도 감염된 걸까.
서둘러 약상자를 찾았다.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을 때까지 충분히 하연이의 상처 부위를 빤 다음 거기에 빨간약과 함께 밴드를 붙여주었다.
어른용 밴드라 하연이의 손가락에 몇 번이나 감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작고 고운 손. 이렇게 작은 손에 상처를 입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하연이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매만지며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하연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유난히 두 볼이 빨개져 있었다.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안고서는 침대에 눕혔다.
“하연아. 좀 누워있을래? 너 열나는 것 같아. 쉬다가 아프면 아빠한테 이야기해. 당장 응급실로 갈 테니까. 알았지?”
하연이가 작은 몸을 웅크리며 가늘게 떤다. 가여워라.
피가 묻은 책은 얼른 주워서 하연이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은 선반 위로 올려두었다.
‘오래된 책에 베이면 몸에 안 좋으려나. 애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노트북을 켠 나는 책장(冊張)에 베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찾아보았다.
다행히 하루에서 이틀 정도만 지나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휴. 다행이다.
혹시라도 책이 너무 오래되어서 안 좋은 균이 묻어있으면 어쩔까 싶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찌 되었건 하연이는 다쳤고, 아이가 있는 방에 물건을 아무렇게나 둔 내 잘못이 크다.
이렇게 무심한 아빠라니. 아빠 실격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
하연이가 아무리 의젓해 보여도 겨우 3살이다.
나는 하연이를 다치게 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언제까지나 집에서 하연이를 돌볼 순 없다.’
이번에 다친 일 때문만은 아니다.
영상 촬영이 아닌 편집이었기에 기본적으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가끔은 대면 미팅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들이 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면 충분히 전화나 메일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걸 왜 오고 가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남의 돈을 번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집을 비워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연이를 데려가거나 혹은 하연이 혼자 집에 놔두고 갈 순 없었다.
하연이가 손가락을 다친 다음 날.
하연이를 데리고 집 근처 어린이집을 찾았다.
봐줄 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집을 비워야 할 일이 있으면 믿고 맡길 만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네? 아이사랑 포털에 접속해서 입소대기 신청을 해야 한다고요?”
“네. 지금은 원아가 꽉 찬 상태라서 더는 받을 수 없거든요.”
“그런데 아이사랑 포털이라는 건 또 뭔가요?”
“영유아보육정보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사이트예요. 입소 신청은 반드시 그곳을 통해 하셔야 해요.”
아이사랑 포털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이다.
하연이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린이집에서 알려준 아이사랑 포털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회원가입은 어찌어찌했는데 뭐 이렇게 메뉴가 많고 복잡한지.
게다가 아이를 등록하려면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했다.
‘하연이는 아직 출생신고도 못 했는데.’
“휴우.”
깊은 한숨과 함께 노트북을 닫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
“그래서. 지금 나보고 네 애를 봐달라고?”
단발머리를 한 장신의 여성이 눈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럴 만했다.
그녀는 나의 전 여자 친구였으니까.
신유주.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과는 서로 달랐지만, 술집에서 옆자리 테이블에 앉았던 게 인연이 되어 연인으로 발전.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나는 영상디자인학과 출신이고 그녀는 유아교육과.
우리는 많은 것들이 잘 맞았다. 취향도 비슷하고 내가 좀 세심한 스타일이라면 그녀는 털털한 스타일이라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사는 동네도 비슷해서 우리는 금방 서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깊숙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나보다 먼저 대학을 졸업한 그녀가 자신의 이모가 운영하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 것과 다르게 나는 백수를 전전.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결국 이별했다.
그런데 헤어진 뒤로 연락 한번 없다가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내 애를 부탁한다고 하니.
누구라도 화가 날 법하다.
“진짜 미안하다, 유주야. 그래도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
“하아. 너 진짜 지금 이 상황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거 스스로도 알고는 있지?”
“..어.”
유주가 한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더니 하연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꼴에 자식이라고 아빠 얼굴이 있기는 하네.”
“뭐 그렇지.”
이게 뭐라고 괜히 뿌듯해진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김하연이요.”
“몇 살인데?”
“새짤이요.”
“뭐? 3살 꼬맹이가 이렇게 말을 잘한다고?”
유주가 화들짝 놀라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하연이의 어깨를 잡았다.
“꼬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아줌..아니다. 언니가 여기 선생님이야. 아이들에 대해서는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어!”
“딘따에요!”
“유주야. 진짜야. 얘 진짜 3살이야.”
“너한테 안 물어봤거든? 그래도 나랑 헤어지고 나서 낳은 거면 3살보다 많을 순 없겠네.”
유주의 말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이혜미는 유주와 헤어진 다음 비디오쉐어에 들어가서 만났던 여자니까.
난처해하는 유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애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두고 종적을 감췄던 일. 그리고 그 뒤로 회사까지 그만두며 힘겹게 하연이를 키운 일에 대해서 말이다.
유주의 표정이 갈수록 유해지더니 종국에는 눈물까지 글썽인다.
‘그러고 보니 유주가 참 애를 좋아했었지. 그러니까 그 힘들다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는 거겠지만.’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진짜. 너도 고생이 많구나. 바보 같은 녀석.”
“고생은. 하연이가 나 같은 아빠를 둬서 고생이지.”
“멍청아! 그걸 왜 혼자 다 뒤집어써서 사서 고생을 해! 고생은! 진짜 멍청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어쩌겠어. 내 애인걸.”
“으이구.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저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유주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욕이랄까.
“알겠어. 그러니까 아직 출생신고도 안 했고 아이의 존재를 증명할 서류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응.”
“일단 하연이는 우리 어린이집에서 봐줄게. 이모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고맙다! 유주야! 그런데 어린이집 비용은..”
“그건 됐어. 어차피 아이사랑 포털에 등록하지도 못하는 친구니까 정부에서 돈이 나오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고 네 사정 뻔히 아는데 받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는..”
“아 진짜! 됐다니까 그러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9시 전까지 하연이 데리고 여기로 와. 아직 예전에 살던 집 그대로지?”
“응. 거기 맞아.”
“잘됐네. 가까우니까 뭔 일 있으면 바로 올 수도 있고. 그런데 너 돈은 제대로 벌고 있는 거 맞지?”
“어. 많이는 아니지만 먹고살 만큼은 벌고 있다.”
“다행이네. 애 키우려면 돈 장난 아니게 많이 들어. 하연이를 위해서라도 분발해야겠네, 김진형.”
유주가 애잔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연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평소에는 작은 불만 한번 말하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나와 떨어진다고 하니 불안해진 것일까.
“아빠아. 나 어린이딥 안 가묜 안 돼요?”
“왜? 아빠 없을 때 다치면 어떡하려고!”
“아프론 됴심할께요! 네?”
하연이가 평소와 다르게 두 눈을 글썽이며 애원한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번엔 다행히 책이었고 나도 옆에 있었지만 다음엔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를 일이다.
‘집에 아이 혼자 있다가 불이 나거나 도둑이 들어서 큰일이 났다는 기사도 있잖아.’
뭣보다 나는 영상제작자지 아이 교육에는 아무런 지식도 재능도 없었다.
육아야 부모의 몫이라곤 해도 교육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그러니 낮 시간 동안에라도 아이를 키우는 건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게 좋았다.
그 상대가 유주라면 더더욱 믿고 맡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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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제작자에게 있어 코로나는 병이자 약이었다.
코로나 초기만 하더라도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았다.
많은 기업에서 당장 만들고 있던 영상도 중지하는 등 영상에 돈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만남을 경계하는 와중에 좁은 장소에 모여 영상을 찍는 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줄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변했다.
오프라인 행사가 취소되고 대면접촉이 어려워지자 내부 구성원이든 외부 고객이든 기업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영상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거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너도나도 영상 제작에 열을 올렸고, 코로나 초기와는 다르게 가격에 따라 클라이언트를 가려 받을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영상편집일도 단가가 많이 올랐다.
그중에서도 오늘 만날 클라이언트는 압도적으로 높은 금액을 제시하며 나의 구미를 당겼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수많은 업체 중에서도 가장 네임 밸류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게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미래 그룹’ 홍보팀과의 미팅이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니. 이런 게 대기업의 배짱인가.’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뒤 미래 그룹 본사가 있는 강남역으로 향했다.
‘무지하게 높네.’
한동안 미래 그룹 본사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이걸 잘 해내야 하연이 먹여 살리지. 할 수 있어. 김진형. 파이팅!’
각오를 굳히고 본사 로비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