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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30화 (130/130)

130. 외전/ 칠주야의 만남 (8)

“추문이라고?”

황당하기 짝이 없어 내가 던진 질문.

제갈경이 씹어뱉듯이 답했다.

“그래. 누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하룻밤 사이 맹 전체가 떠들썩해졌어.”

“마교 놈들도 말이냐?”

“우리 쪽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백운상이 맹에 들어온 지 엿새째. 오늘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조반을 들고, 내가 직접 처리해야만 하는 업무를 몇 가지 보았다.

점심이나 저녁 중 한 끼는 백운상과 자리를 같이해야 하니 언제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제갈경이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하가야, 일 났다.’

‘백운상이 알았느냐?’

옆에 놓여 있던 검을 쥐며 물었더랬다. 현시점에서 다급히 나를 찾을 일로 가장 먼저 생각났기에.

다행히 백운상이 내 계획을 눈치챈 것은 아니었지만······.

비록 사안이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되, 적잖이 곤란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맹 내에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경천신마의 둘째 제자와 구파의 여협이 치정에 빠졌다고 말이야.”

그 말에 얼핏 떠오르는 바가 있어 제갈경에게 물었다.

“둘째 제자라면 네놈과 이름이 같은 그 얼굴 뺀질한 놈을 말하는 것일 테고, 구파의 여협은······ 화산파 매화검수 유은설이더냐?”

“신화神化에 발을 들였다더니 불가에서 말하는 타심통 비슷한 공능이라도 얻은 게냐. 어찌 듣지 않고도 알지?”

“그 천둥벌거숭이들 짓는 표정을 보니 감이 오더구나. 그리고 내가 바보천치도 아닌데 겨우 그 정도 짐작 못 하려고.”

이틀째 낮에 벌어진 난투극. 그때부터 서로 묘한 기운이 오고 가는 걸 느꼈다. 게다가 그날 밤엔 뱃놀이를 즐기고 그 후로도 계속 긴밀하게 어울려 지냈다니 구파 쪽에서 추문이 날 아해를 꼽으라면 유은설밖에 없겠지.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한데 유은설뿐이더냐? 남궁호 그놈 딸자식, 남궁서연도 그 무리에 끼어있잖나.”

제갈정명, 우철, 유은설, 남궁서연, 영호경. 내 알기론 그렇게 다섯이 이틀째부터 교분을 텄다던데.

남궁서연 역시 유은설과 마찬가지로 영호경과 주고받는 눈빛이 심상찮았고, 추문이 나려면 그 셋이 함께 엮이는 게 이치에 맞으리라.

그러나 제갈경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직접적으로 거론되진 않고 빠져 있었다. 가능성은 셋이겠지. 우선 첫째로, 남궁서연은 무관하다. 가능성은 1할 이하. 둘째로, 약삭빠른 부맹주가 제 딸 이름만은 오르내리지 않게 조처했다. 이건 2할가량 되겠군. 그리고 셋째-”

“어쩌면 애초에 남궁호 그 새끼가 꾸민 일일지도 모르고. 그게 남은 7할인가?”

“그렇지. 뭔가 꺼림칙하길래 어제 그놈에게 허튼짓일랑 할 생각도 말라고 을러두었는데······ 이따위 치졸한 수를 쓸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남궁의 가주씩이나 되는 놈이 어찌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으려는 건지······.”

제갈경은 화가 치밀고 어이가 없는 걸 넘어 숫제 불쾌해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맞수.

좋지 않은 관계.

그런 걸 떠나서 어쨌든 같은 오가의 일원일 진데 남궁호가 회담을 방해하려 꺼내든 수가 너무 유치해서 못마땅한 거겠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대세가로서 지나치게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명문 태생이 아닌 나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감각.

아무리 친하고 속을 터놓는 사이라 해도 우리는 가끔 서로의 이런 차이를 실감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다만 서로를 각별히 여기는 마음을 해칠 정도는 아니고, 나는 시급히 해나가야 할 일부터 물었다.

“무작정 잡아다가 족칠 수는 없겠지?”

“그래, 증거를 남기진 않았을 거다. 구파까지 엮어낸 마당에 아주 철저히 했겠지.”

“구파의 퇴물들이야 나보다는 남궁호 그놈을 훨씬 좋아하니 내가 알려준다 한들 믿지 않을 테고.”

“잘 아는구나. 그러기에 살 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들 좀 살갑게 대해주라고 내 입이 닳도록 말했거늘.”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 사술邪術에 가깝니 뭐니 멋대로 지껄이는데 열이 안 받겠느냐? 심령금제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말이야.”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미는 걸 달래며 나는 상념을 이어나갔다.

남궁호 그놈이 천마신교와의 회담을 망치고자 의도적으로 추문을 퍼트린 거라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이 정도에서 그치진 않을 터였다.

“하는 수 없군. 유은설, 남궁서연. 둘 다 밤에 싸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군사 자네가 신경 좀 써주게. 정명이랑 우철이에겐 내가 말해놓을 테고, 백운상 쪽에도 언질을 둬놓겠네. 하루만 무사히 넘기면 그만이야.”

“내일부턴 추문이고 뭐고 그따위 사안은 별로 대수도 아니란 말이냐?”

“······그럴 거다.”

확인하듯 던진 제갈경의 질문에 묵묵히 답했다.

내일이 마지막 칠일째다.

회담을 마친 천마신교는 십만대산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나는 백운상과 미리 약조해둔 바가 있었다.

칠주야의 마지막 날.

천마신교를 배웅하기 위해 차려질 연회 자리에서 그녀와 내가 어울려 검무를 추기로 했다.

백운상은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들떠 있을 약속.

나는 그 자리에서 백운상을 기습하리라 마음먹었다.

가능하다면 단칼에 목숨을 끊는 편이 가장 좋다.

차선이라면 치명상을 입히는 정도. 물론 그다음에는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줘야겠지.

그녀뿐만이 아니다. 천마신교에서 온 사절단 모두 내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오늘을 넘기고, 내일 연회 직전까지 백운상이 경계를 풀게 만들면······ 그러면 필시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선 내가 당금 강호의 독보적인 천하제일인이라고 자신 있게 천명할 수 있으니까.

백운상은 나를 이길 수 없다.

교주를 잃은 마교의 핵심 전력은 정파 무림맹 본단에서 몰살당하겠지.

그리고 경천신마驚天神魔 백운상을 죽여 막강해진 입지를 내세워 나는 정파 무인들을 총동원해 십만대산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시천마始天魔 일월령日月令 이래로 5대를 이어져 내려온 천마신교는 드디어 내 손에 멸망할 거다.

그리고······.

절대로 위선을 떨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정인을 죽이는 일. 그 많은 목숨을 거둬내는 일.

나는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래야 하니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여태껏 죽은 이들이 무척이나 억울해할 테니까.

나는 도저히 그들의 원망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그러하기에 내 책무를 다할 거고,

다만 백운상을 내 손으로 죽이고 난 뒤엔 더 살고 싶지도 않기에-

“내일 정오까지 생각할 여유를 주마. 연회 시작 전까지는 그래도 되돌릴 수 있어. 신중하게, 정말로 신중하게 생각해봐라.”

“난 처음부터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입 아프게 뭘 자꾸 묻는 것이야.”

심경을 드러내지 않으며 시큰둥하게 답하자 제갈경이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며 말한다.

“하나만 약조하거라.”

“무얼 말이냐.”

“백운상을 죽인 다음 맹주를 그만두지 않기로.”

“······.”

“십 년이 더 걸리든 이십 년이 더 걸리든, 네놈이 맡은 일을 죄다 끝마친다고 이 자리에서 내게 약조해라.”

“거 해주려고 해도 그리 부려먹으려는 티가 팍팍 나면 해주고 싶겠냐?”

기실 놈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대수롭잖게 되받으려 했고······.

제갈경이 기어이 내심을 드러내 일렀다.

“그때까지는 꼭 살아있어야 한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맹의 군사로서가 아니라 하가 네놈을 지우라 여기는 자로서 하는 말이다. 이 제갈경이 남은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가지 않게 해다오. ······부탁하마.”

퍼억!

내가 튕겨낸 지풍이 제갈경의 이마를 강타했다.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놈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버럭 외쳤다.

“이, 이 미친놈이! 나부터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냐!”

“시답잖은 소리를 하길래 정신 차리라고 때렸다. 내가 죽긴 왜 죽냐. 그럴 바에는 백가 데리고 지금 바로 은거하겠지.”

“네놈 하는 짓이 하도 꼴통 같아 불안해서 타이른 것인데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쉬익!

이번 지풍은 제갈경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객쩍은 소릴랑 그만하고 나가서 일이나 보아라. 나도 백운상이 만나러 가봐야겠으니.”

“그래. 만나서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의 안정된 상황도 천하 무림에 나쁘지는 않아. 네놈과 백운상이 살아있다면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거다. 그쪽이 훨씬 피가 덜 흐르는 길이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잘 생각해봐라.”

“오붓하긴, 오늘도 진천군 그놈이 졸래졸래 따라나서면 그게 되겠느냐.”

“동행한다더냐?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래. 오늘도 올 게다.”

“하가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느냐. 그래도 제 사부랑 있을 땐 얌전하게 굴 테고, 아직 어린애이니.”

“그야 많이 참고 있는데······ 그놈을 보고 있으면 자꾸 성질이 나는 게 참 희한하단 말이지. 내 앞에서 뭘 할 때마다 자꾸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예사롭지가 않아.”

그렇다고 ‘밉다’라는 건 아니다. 그것과는 무언가 좀 다른 느낌. 이상하게 막대하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놈이라고 해야 하나.

닷새 전 진천군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들었던, 난생처음 겪은 이 기묘한 감정을 내가 면밀히 살펴보려 하는 차에 제갈경이 집무실을 나서며 일렀다.

“남궁서연과 유은설은 내가 동향을 파악하고 거동을 제한해둘 거고, 우철이랑 정명이도 내 선에서 언질을 둬놓을 테니 너는 백운상 쪽에 집중하거라.”

“군사의 배려심에 내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살펴 가시게.”

그리고 문을 넘기 직전.

제갈경이 나를 흘끗 보면서 일렀다.

“맹주, 우리 오래오래 해먹읍시다. 위엣놈들이야 십 년도 전에 다 제꼈잖소.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들도 찍어누르고, 오래오래 해먹다 편히 물러나서 여생을 즐기는 게 이 군사의 소원 중 하나외다.”

“둘이 해야 욕을 반절만 먹을 거라는 심산이고?”

“잘 아시는구려. 알면 제대로 좀 하시오. 나 이만 갑니다.”

문도 닫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제갈경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좋은 놈이다. 저런 놈을 친구로 둔 것만 해도 인간 하무린의 삶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나는 놈에게 미안했고, 내일 이후로는 더 미안해지겠지.

십만대산의 마교까지 정리되고 새로 맹주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죽을 때까지 나를 욕하면서도 제갈경이라면 잘 해낼 거다.

협검무제 사후 혼란스러운 강호를 이끌어갈 다음 대의 맹주로서.

잔에 남은 차를 다 마신 나는 사람을 시켜 백운상에게 전언을 보냈다. 미시(13시~15시) 초에 만나 점심을 같이 들자 하니 흔쾌히 그러겠단 답이 돌아왔다.

진천군은 역시나 동행한다 했고, 내 예상과 달리 영호경은 거처에 머무르도록 일러둘 것이라 했다.

놈을 당사자로 추문이 돌고 있으니 식사 자리에 동석시켜 어디로 새지 않게 하는 편이 나을 터인데.

조금 의아했으나 채비를 마친 나는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점심.

그리고 내일의 연회.

고작 두 번이다.

백운상과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

그 모든 순간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나는 약속한 장소로 걸어 나갔다.

쿵, 쿵.

심장이 뛴다.

오래전 동정호에서 백희령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녀를 떠올리며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다.

***

“해가 질 때까지 여기서 단 한 발이라도 나갔다간 신교로 편히 돌아가게 될 것이야.”

“······사저, 그건 또 무슨 영문 모를 소립니까.”

서슬 퍼런 진천군의 으름장에 영호경은 주춤하면서도 물었다.

그러자 진천군이 무척 태연하게 답했다.

“내 손수 네 팔다리를 몽땅 분질러 놓을 테니 수레에 실려서 돌아갈 게 아니더냐. 제 발로 걷지 않고 편히 가고 싶으면 또 나가서 유은설인가 뭔가 하는 정파 계집과 정을 속삭여보라 이 말이다. 경아······ 네가 대체, 그 똑똑한 머리통으로 생각이란 걸 하고 다니는 게냐? 어디 꼬드길 여인이 없어서 화산파의 제자를······.”

“······.”

영호경은 한 가지 억울한 점과, 한 가지 다행이라 여기는 점과, 한 가지 몹시 억울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억울한 점 하나.

‘유 소저와는 그 정도는 아닌데······.’

친해지긴 했다.

아름답고 재지가 뛰어난 기재라 생각도 했고, 굳이 따지자면 여인으로 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와는 관계가 크게 진전된 게 아닌데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영호경 자신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인 점.

‘남궁 소저가 거론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행이야.’

오히려 이쪽이 진짜인데.

나흘쯤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미 반했다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생전 처음 느끼는 격렬한 감정이었고, 그가 보기엔 남궁서연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신교의 제자라는 신분까지 망각하며 관계를 진전시키진 않았다. 가문과 교도들을 생각하면 실로 천부당만부당한 망발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몹시 억울한 점 하나.

“사부님, 허락해주신다면 경이 이놈 다리를 미리 분질러두고 나가겠습니다. 제 머리가 조금 좋다고 매번 저를 책하더니 이번에 저지른 짓을 보십시오. 정말로 사리 분별을 못 하고 철이 없는 게 누구였는지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억울하지만 마냥 떳떳하지도 않았던 영호경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살다 살다 사저에게 저런 말까지 듣게 되는구나······.’

(130화 끝.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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