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외전/ 칠주야의 만남 (6)
“하면 그대에 비한다면 어떠하오.”
······이 새끼가?
순간적으로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이놈 지금 자기가 한 말이 정치적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알고 말한 것일까?
아니지, 몰랐겠지.
몰랐으니까 저런 미친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 거지.
단순히 오만방자하다거나 겁이 없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무림맹 본단에서,
천마 백운상과 무림맹주 하무린이 나란히 자리한 가운데,
자기 자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들 두 사람의 고하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워낙 큰 소동이었던 탓에 아직도 듣는 귀가 많았고,
여기서 어떻게 답하더라도 외통수였다.
나 자신이 백운상보다 못하다며 겸양의 뜻을 보인다?
이건 애초에 논외다.
외줄타기처럼 맹주직 해 먹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맹주로 있을 수 있는 이유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만다.
백운상이 발뒤꿈치에는 가닿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것도 말이 안 된다.
간신히 좋은 분위기로 불러놓고 우리 집 앞마당에서 내가 더 강하다고 떠벌리는 일이 되는데.
맹의 돌대가리들은 ‘그렇다면 굳이 협상할 필요가 있냐’고 구시렁댈 테고, 마교 놈들 쪽에서도 대단히 좋지 않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대등하다고 말한다?
이건 앞의 두 가지 답변에서 단점만 절반씩 가져와 합치는 꼴밖에는 안 된다.
애초에 질문이 개차반이었는데 대가리 굴려서 답해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진천군이라고 했던가.
내가 여태껏 얼굴 맞대고 대화해 본 무인들을 모두 통틀어서도, 틀림없이 이놈이 가장 꼴통의 자질이 출중했다.
백운상이는 어떻게 이런 놈을 제자로 삼을 생각을 한 거지······?
그것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의문이었다.
백운상과 눈이 마주쳤다.
적잖이 곤란한 표정이었다.
<내가 수습할 테니 가만 있거라.>
시선으로 그리 뜻을 전한 백운상이 입을 뗐다.
“천군아. 지금 네가-”
그리고 나는, 손을 뻗었다.
휘두르는 손짓을 따라 강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공간을 찢어낼 것처럼 격렬하게 일렁이던 강기가 이내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얼굴에 미약하게 의문을 담은 백운상.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주목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귀를 쫑긋하던 맹의 무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얼빠진 놈들이 방금 뭐가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개중에 눈 감고 가부좌 틀기 시작한 놈들도 보이긴 하는데······.
쥐뿔, 뭐 느낀 게 있기는 하겠냐만 그래도 여기서 뭐라도 건져가는 놈은 몇 년 후에는 한가락 하겠지.
영호 가의 뺀질이는 어느새 표정이 심각해졌다.
애가 볼수록 제법 똘똘한 데가 있네.
우리 쪽 계집애들한테 정신이 팔렸나 했더니, 최소한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아는 놈이었다.
그리고 이 소요를 일으킨 장본인.
천둥벌거숭이 같은 진천군이는······.
“아······.”
거진 황홀경이라도 겪은 모습이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빛이 초롱초롱해지고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내가 흩뿌린 강기가 머물던 허공을 응시하며 연신 눈을 깜빡인다.
거 새끼 좋은 건 알아가지고.
슬쩍 웃음을 지으며 내가 말했다.
“이게 내 허리춤쯤 될 것이니, 언제쯤 닿을 수 있을지는 자네 스스로 생각해 보시게.”
여기서 가르침을 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맹의 늙은이들 사이에서 뒷말 나올 게 뻔했다.
그저 흥미본위로 가볍게 손을 떨친 느낌으로.
발뒤꿈치니 뭐니 동일 선상으로 비교하지 않고 기준을 올려서.
어차피 백운상만 제외하면 발뒤꿈치고 허리춤이고 그런 거 구분도 못 한다.
그냥 저거 한 방만 맞으면 나는 죽겠구나, 이런 생각만 들겠지.
그러니 저리 두루뭉술하게 말해놓으면 대충 묻어두고 갈 수가 있는 거다.
백운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실은 명치쯤 될 거다.>
<겸양이 심하구나. 그 정도는 아닐 터인데.>
호승심과 장난기를 담아 백운상이 답했다.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나 홀로 집무실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방금 내가 뻗어낸 손짓.
그것은 기실 백운상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이기도 했다.
명치니 허리춤이니, 그런 건 다 거짓이다.
지금의 내게는 무릎 정도에 불과하다.
이걸 백운상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닫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 목을 베어낼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닿을까.
그리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오늘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도 좋았다.
그로 인해 벌어질 풍파는 내가 감당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해가 질 때까지,
마교의 사절단에서는 어떠한 동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무렵 술을 홀짝이고 있는데 제갈경이 찾아왔다.
격무에 시달려 거무죽죽한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말을 건넸다.
“칠할에 삼할 더 채웠네.”
“무슨 수로?”
“백운상이가 생각보다 눈이 더 멀었더군. 내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지 뭔가.”
“천하의 불한당 같은 놈.”
“하루 이틀도 아닌데 무얼. 그래서, 군사 자네는 준비 좀 해두었나?”
“사흘쯤 더 기다려라. 육일째부터는 결단만 내리면 되도록 해둘 터이니.”
“······결단은 이미 내렸대도.”
내 정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다.
나를 가가라 부르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정인.
정파 무림의 숙적인 천마.
본디 내게는 전자가 비할 수 없을 만큼 막중했다.
백운상과 같은 자리에서 마주 보기 위해서 지금껏 노력해 왔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내 정인으로서의 백운상과 천마 백운상의 비중이 정확히 같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마주한 상황은 후자를 우선시하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칠주야의 회담이 끝나기 전에 내 속내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백운상은 내 손에 죽는다.
물론 그리된 후에는, 나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으니까.
무책임하다고 욕을 먹을 정도는 아닐 거다.
***
무림맹 본단의 부맹주 집무실.
그곳의 주인이자 대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호는,
이십여 년 전 비명에 간 누이 남궁영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이의 죽음과,
그 죽음에 간접적이나마 원인을 제공한 불구대천의 원수 마교와,
그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무린을 생각했다.
누이가 목숨을 바쳐 살려낸 그 위선자를.
회담이니 평화니 화합이니, 모두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것을 주도하겠답시고 제 팔다리를 한 짝씩 떼어준 하무린 역시도 가당치도 않은 놈이었다.
“그런 광대 놈도 다시 없을 것이야.”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남궁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남궁호는 하무린이라는 작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공과 고금제일이라 할 만한 무재.
혈혈단신으로 맹주 위까지 올라선 정치적인 감각.
만인을 휘어잡아 이끄는 위세.
자신에게 그만한 자질들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 나라의 성씨를 남궁으로 바꾸었을 텐데.
하무린이 권력욕의 화신이라고?
결단코 그럴 리가 없었다.
그놈에게 권력욕 따위는 있지도 않다.
남궁호가 보는 하무린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겁쟁이였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그것을 제풀에 두려워하여 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곳에는 털끝 하나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같은 강호의 유수한 명문대파는 겁을 내지 않으니 이 또한 실소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하무린을 존경할 테지만 남궁호가 보기에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리고 그 멍청한 놈이 강호를 안정시켜보겠답시고 마교 놈들을 맹으로 불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는 일이었으며,
결단코 하무린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집무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남궁호가 말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남궁세가 직계 남궁서연.
정파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여인 다섯 중 하나로 이름 높은 강호의 여협이었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남궁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림을 그려본 뒤, 남궁호가 답했다.
“네가 수고를 좀 해주어야겠구나.”
***
툇마루에 앉은 채로 진천군은 휘영청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채를 한 입 씹었다.
아그작 소리가 났다.
본디 알싸한 맛이 나야 할 텐데 어쩐지 혀끝으로 단맛이 스몄다.
고개를 갸웃한 진천군이 소채를 한 입 더 씹었다.
여전히 은은한 단맛이 났다.
단맛이 돌자 기분도 달큰한 듯했다.
어쩌면 기분이 달큰한 탓에 소채가 달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선후의 분간을 하기가 힘들었다.
‘한데 그렇다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지?’
진천군은 그런 의문을 품었다.
마치 하늘 위를 노니는 듯 몸이 붕 뜨는 감각이었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아 쌀쌀한 바람도 어쩐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구나.’
고개를 한번 흔들어 고민을 떨쳐낸 진천군은 다시 달을 바라봤다.
별이 많이 떠 있어 강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별 무리와, 낮에 보았던 하무린의 손짓이 겹쳐졌다.
진천군은 속으로 되뇌었다.
천하의 허풍선이가 따로 없었다고.
측량하기 힘든 무리가 담겨 있던 그 손짓이,
평생을 고련해도 가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진천군이 자연스레 생각하고 말았던 그 손짓이,
그것이 고작 제 허리춤 남짓이라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던 하무린의 모습이 환한 보름달 위로 떠올랐다.
수려하기 그지없어 빛이 번쩍이는 듯했던 상판대기와,
천하에서 독보적으로 두 번째임이 틀림없을 고강한 무공과,
쭉 뻗어 보기 좋은 팔다리와 어깨의 선,
드넓은 가슴팍과, 웃을 때 호선을 그리던 입매와,
귓가에 녹는 것처럼 들려오던 목소리와,
그리고 천하제일의 허풍선이였다.
생각을 이어가던 진천군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낮에 하무린을 만난 일을 떠올리다 보니 처소에 돌아와서 사부인 백운상에게 꾸중을 들은 것도 함께 생각이 났다.
백운상은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저 ‘맹은 신교와 같지 아니하며, 하무린은 정파의 허섭스레기들 모두를 아우르는 맹주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진천군이라고 머리가 아둔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질책이었는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호승심에 눈이 멀어 곤란한 말을 했구나, 라고 반성한 것은 물론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결례를 사과하는 것이 좋겠지.’
아제 칠주야 중에서 이틀이 지났을 뿐이니까.
아직 닷새나 남아 있었고, 하무린과 얼굴을 마주할 일도 몇 번은 더 있을 터였다.
진천군은 그리 생각하며 소채를 마저 씹었다.
어쩐지 조금 전보다도 더 달큰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달구경도 얼추 했고 잠이나 자야겠구나.’
개운한 기분으로 진천군이 침상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오장쯤 떨어진 옆의 객당에서 영호경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영호경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곳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선이 아닙니다.”
“······.”
평소 같았다면 말렸을 일이지만 낮의 참사를 일으킨 진천군으로서는 아무래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일렀다.
“강호 공적이 되기 싫거들랑 적당히 산보나 하다 돌아오거라.”
“심려치 마시고 푹 주무시지요.”
기대에 찬 호기로운 웃음과 함께 영호경이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