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외전/ 칠주야의 만남 (5)
맹주를 찾는 어조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해 예삿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백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무린이 바깥에다 대고 말했다.
“들어오시게.”
문이 열리고 중년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이어서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뗐다.
“공무 중 대단히 송구스러우나-”
“되었네. 본론만 말하시게.”
하무린이 손을 내젓자 사내가 빠르게 답했다.
“비무 중 소요가 있어 맹주께 아뢰고자 왔습니다.”
그 말에 하무린이 곧장 눈살을 찌푸렸고, 곁에 앉은 백운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정파라 스스로를 칭하지만 무림맹은 엄연히 칼을 쓰는 무인들이 모인 곳이다.
비무를 빙자한 시비가 일기도 했으며, 피를 보고 의약당을 찾는 일도 있었다.
한데 그런 것으로 맹주 집무실까지 찾아오다니.
신교의 무인들이 방문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하무린이 물었다.
“어떤 새끼들이야?”
고개를 푹 숙인 사내가 이름들을 나열했다.
제갈정명, 모용원중, 남궁서연, 유은설. 그 외 다수.
그리고 천마신교에서 방문한 진천군과 영호경까지.
백운상이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다소간의 말썽은 부려도 괜찮다 일러두긴 했으나 제법 큰일이 난 듯싶었다.
하무린은 어느새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백 교주께서도 함께 가십시다.”
“알겠소이다.”
딱딱한 어투에 애정을 숨긴 두 사람이 소요가 일어났다는 비무장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이런 미친······.”
“으음······.”
예상을 뛰어넘는 참사에 천하제일을 다투는 두 무인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방금 마교라고 지껄인 새끼부터 튀어나와라.’
그렇게 말한 진천군이 좌중을 한번 둘러봤다.
모용 뭐시기라던 버러지는 나가떨어져 의식이 없었고 나머지 다섯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사내가 셋에 여인이 둘.
그들을 향해 걸으며 진천군이 말을 이었다.
“분명 사내놈의 목소리였거늘 나올 생각이 없나 보구나.”
“······.”
“흥, 상관없지.”
모조리 족쳐서 비명소리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우선은 사내놈들부터.
진천군이 발을 한번 굴렀다.
쿠웅-
가벼운 발걸음이었음에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팔성에 이른 천마군림보.
고작 일류 남짓의 후기지수들이 지근거리에서 쉬이 버텨낼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겨우 자세를 정돈했을 때 진천군은 이미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주먹을 쥐어 한 놈의 복부에다 내질렀다.
퍼억!
“끄으으······.”
묵직한 충격에 무인이 무릎을 꿇으며 침음했다.
“네놈은 아니었군.”
목소리를 확인한 진천군이 중얼거렸고, 그 순간 양쪽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왼쪽은 제법 기운이 날카로운 검격. 오른쪽은 온 내공을 다 실은 장력.
남은 두 무인이 협공을 한 것이었다.
“버러지들.”
코웃음을 친 진천군이 포권을 하듯이 양손바닥을 모았다.
그리고 손바닥이 떨어졌을 때 왼손과 오른손에는 각각 푸르고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신교 십대절공 건곤강기.
극음의 기운을 담은 진천군의 왼손이 검을 잡아채갔다.
장식이 아름다운 보검이 얼어붙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고, 파편이 암기라도 된 듯이 사내를 향했다.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진천군이 발출한 극양의 장력이 사내의 공격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사내의 몸에서 불길이 되어 타오르기까지 했다.
비명을 내지르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진천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 놈의 소리를 다 들어보았는데도 분간이 힘들구나.”
하긴 구분을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리라.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개새끼들이 짖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진천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인 둘.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고,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먹었나 보군. 뻔히 사내의 목소리였는데 누이들까지 찾으려는 걸 보니.”
진천군이 고개를 돌렸다.
검을 뽑아 겨눈 제갈정명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빛에서 정파의 위선자다운 정의감과 호승심이 절반씩 비쳤다.
진천군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사내가 한 사람 더 있었던가.”
“······내가 말한 것이라면 어쩌실 텐가.”
“사람이 개 짖는 소리 흉내를 제법 잘 낸다 칭찬을 해 주려 했지.”
“하하!”
하늘을 올려보며 크게 웃은 제갈정명이 선언하듯 외쳤다.
“안하무인인 장제자 덕에 마교 놈들이 오늘 창피 한번 제대로 당하겠구나!”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가 맞았군.”
부러 내뱉은 것이 틀림없는 도발에 진천군은 기꺼이 걸려들기로 했다.
이미 여인들은 안중에도 없어진 진천군이 제갈정명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원중 형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후기지수 연배로 보이는 정파 무인들 십여 명이 다툼을 눈치채고 몰려온 것이다.
얼추 상황을 파악한 후기지수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점입가경으로 치달은 사태에 제갈정명과 진천군이 잠시 침묵했고, 이내 후기지수들이 진천군을 포위했다.
그리고 진천군의 등 뒤에 선 무인들이 암습을 하려고 발을 떼는 순간.
파아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이어서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아온 것은 자그마한 술잔이었고, 거기에 얻어맞은 무인 하나가 대번에 혼절해 버렸다.
진천군, 처음 이곳에 당도했던 두 여인, 제갈정명, 뒤이어 몰려온 무인들까지.
좌중의 시선이 모두 술잔이 날아온 곳으로 쏠렸다.
얼굴이 수려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사교적인 미소와 함께 사내, 영호경이 말했다.
“거기까지들 하시는 게 어떻겠소이까.”
“경아.”
진천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빈틈을 노린 후기지수 두 명이 검격을 날린 것과, 반격인지 선공인지 알 수 없는 진천군의 주먹이 그들의 코뼈를 부러뜨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천군이 이어 말했다.
“나는 그러기 싫다.”
“······이곳에 온 것부터가 내 실수였구나.”
작게 뇌까린 영호경이 남은 술잔 둘을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이어서 차례로 술잔을 던졌고, 이번에도 얻어맞은 무인 둘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비무장으로 걸으며 영호경이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사저께서는 하시던 일 계속 하시지요. 다른 분들은 제가 알아서 대접하리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영호경의 기파가 거세져 갔다.
이 자리에서는 단 두 사람.
진천군과 제갈정명만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맞서기 힘든 기세였다.
“한데······.”
문득 영호경의 시선이 먼저 왔던 여인 둘 쪽으로 향했다.
“소저 두 분과는 손을 섞으면 이 영호 모의 마음이 몹시 아플 것 같은데 부디 해량해 주시겠습니까.”
남궁세가 직계 남궁서연.
화산파 매화검수 유은설.
강호에 이름난 두 여협이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영호경의 수려한 얼굴로 슬픈 기색이 비쳤고, 더는 충돌을 지체할 수 없는 때가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무린과 백운상이 비무장에 당도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 대가리 박아.”
한숨을 푹 내쉰 하무린이 말했다.
***
“후우······.”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혼절한 몇 놈은 이미 의약당으로 실려갔고, 개중에 유일하게 관련이 없던 우철이는 거처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명이를 비롯한 우리 쪽 애새끼들은······.
“땅에 발 닿는 새끼부터 조질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머리만 땅에 박은 채 물구나무를 시키는 도중이었다.
이따금 손을 휘저어서 바람을 일으켰다.
꼴에 무인이라고 휘청거리다가도 힘겹게 다시 중심을 잡았다.
한 놈씩 시선을 주면서 내가 말했다.
“여럿이서 합공이나 하고, 했으면 잘 패기나 할 것이지 도리어 제놈들이 뒤지게 처맞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안 그러냐?”
“아닙니다!”
거꾸로 선 채로도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픽 내뱉은 다음 짧게 일렀다.
“제갈정명 일어나라.”
“네, 맹주님!”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정명이 놈이 벌떡 일어섰다.
이 새끼는 뭘 시켜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부담스럽단 말이지.
일단 머리통을 한 대 쥐어팼다.
“제일 먼저 찾아간 게 너냐?”
“그렇습니다, 맹주님!”
“왜 갔냐.”
“어제 맹주님께 불손했기 때문입니다! 맹주님!”
“한 대 더 맞아라.”
퍼억!
꽤 아플 텐데도 정명이 놈은 미동 하나 없었다.
다시 땅에 머리를 박게 시킨 다음 다른 놈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이유가 뭐냐.”
떳떳하지 못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대강 종합해 보니 쌈박질 소리가 들리길래 와봤다는 말이었다.
아는 얼굴 몇 명이 마교 애들한테 얻어맞고 있길래 참을 수가 없었다고.
“사실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리를 박고 있던 남궁서연과 유은설을 일으켜 세워 물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누구 잘잘못을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우리 애들이 약해서 처맞은 거였다.
한숨을 쉬고 내가 말했다.
“다 일어나.”
대가리 박는 것보다 일어서는 동작이 훨씬 빨랐다.
길게 말하기도 싫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네 맹이 좆으로 보이냐?”
“······.”
“너희 집안 좋고 나이치고 무공 괜찮은 것도 알겠는데 집구석에서나 날뛸 일이지 맹이 장난으로 보이냔 말이다.”
“아닙니다!”
“됐다. 다친 놈들은 알아서 의약당 가고 몸 성한 놈들은 근신하고 있어라. 내일 안에 징계 내려올 거다.”
“네, 맹주님!”
손을 휘적거려 애새끼들을 흩어냈다.
그리고 백운상 쪽을 바라보니 무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안 좋기로는 저쪽이 더 했다.
진천군이라고 하던 천둥벌거숭이는 땅만 쳐다보고 있고 얼굴 뺀질한 놈은 후회가 막급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얼굴 뺀질한 놈이 시선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남궁서연과 유은설, 두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게 보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느 쪽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씨구? 저 새끼들 지금 뭐하냐.
이미 경험하고, 지금도 계속 경험 중인 자로서의 직감이 불길하게 속삭였다. 분명 뭔가 있다고.
하지만 이성이 반박했다. 방금까지 패싸움하던 놈들이라고.
그리고 만약 뭔가 있다손 치더라도······.
딱히 좋은 꼴 보긴 힘들 텐데 말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백운상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훈계를 마친 백운상이 나를 보며 말했다.
“맹주께 결례가 되었구려.”
“우리도 마찬가지외다.”
서로 떳떳할 것 없으니 적당히 덮어두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운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천군아.”
“네, 사부님.”
얼굴이 새빨개진 진천군이 내게로 다가왔다.
뻣뻣한 고개가 아주 조금 숙여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이 흘러나왔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천군아.”
지켜보던 백운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부르자 그제서야 다음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사과드립니다.”
“알았으면 됐네.”
진천군이 고개를 들었다.
침묵한 채로 내 얼굴을 응시한다.
다시 봐도 틀림없네.
이 싸가지 없는 새끼는 아무리 봐도 오래 살 팔자가 아니었다.
내가 약간의 가르침을 준다면 수명을 늘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대신에 격려를 건넸다.
“밥 잘 먹고 팔다리 부지런히 움직이시게. 일 갑자를 고련한다면 얼추 자네 사부의 발 뒤꿈치까지는 따라갈 터이니.”
물론 살아있다는 가정하에서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진천군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하면 그대에 비한다면 어떠하오.”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