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외전/ 칠주야의 만남 (4)
차가운 술을 홀짝이며 영호경이 생각했다.
‘사저께서 오래 참으시는구나.’
널찍한 연무장과 맞닿아 있는 이곳 간이 주루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줄 알았다.
그의 사저가 되는 진천군이 꽤나 손이 심심한 기색이었던 데다 제갈정명이라고 이름을 밝힌 청년도 호전적인 기세를 아낌없이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상을 들인지 반 시진이 지났음에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간소하게 차린 상 위로 묵묵히 술잔만 오갔다.
“한 잔 받으시오.”
“그대도.”
‘제갈 뭐시기라는 저자를 제법 인정하고 계시는군.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보시는 것인가.’
기실 어쭙잖은 놈이 시비를 걸어왔다면 가만히 두고 볼 진천군이 아니었다.
일권에 코뼈를 부러뜨려 혼쭐을 내주었을 터.
하지만 제갈정명의 검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진천군도, 영호경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니 지금의 침묵은 말하자면 흥취를 더욱 돋우기 위한 과정일 터였다.
무림맹에서 신교의 무학을 보여줄 첫 순간으로서.
허나 영호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마음속으로나마 반론했다.
‘평가가 너무 과해.’
괜찮은 칼솜씨를 지닌 것은 알겠으나 능히 무의 화신이라 할 만한 사저가 이리 뜸을 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진천군까지 갈 것도 없이 자신에 비해서도-
상념을 이어나가려던 영호경의 귓가에 진천군의 말이 흘러들어왔다.
“그대가 협검무제의 제자인가?”
술잔을 내리며 제갈정명이 눈짓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진천군이 설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협검무제는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고 들었으나 그 기도, 정파의 쭉정이들이 그대 정도의 무인을 키울 수는 없어 보이는데. 어떤가. 내 말이 맞는가?”
“하하! 칭찬으로 알겠소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제갈정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철아. 잠시 이리 와 보거라.”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소년이 느리게 걸어왔다.
어깨를 잡아 소년을 앞으로 내민 제갈정명이 말했다.
“맹주께 제자는 없으나 굳이 한 명을 꼽자면 이놈이겠지. 들으셨겠지만 우철이라는 아이외다. 우철아, 한 잔 받을 테냐.”
“······일 없습니다.”
조곤조곤한 어조였지만 확실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한 소년이 몸을 휙 돌려 본래 있던 자리로 향했다.
제갈정명이 아주 재미난 이야기라도 꺼내듯이 말했다.
“저놈이 원래는 이름이 달랐다 하지. 허나 맹주께서 ‘쇳덩어리처럼 아둔한 놈이로구나!’라고 감탄하신 그날로 이름을 우철이라 바꾸었다지 않겠소? 나야 맹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안 됐으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화제가 되었다 들었소이다.”
“그러니 그대가 협검무제의 제자는 아니다?”
“제자라······.”
잠시 침음하던 제갈정명이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말이군. 구주천하에 그분의 무를 이어가겠다 자신할 간 큰 놈이 어디 있을까. 그래, 제자는 아니지.”
“말은 겸손하나 속에 담긴 뜻은 다른 것 같군.”
진천군의 말에 제갈정명이 피식 웃었다.
“바로 봤소. 내 비록 맹주님의 무를 잇지는 못하나 그분의 뜻만은 이어갈 생각이지.”
“뜻?”
“협!”
제갈정명이 낭랑히 외쳤다.
“맹주께서 걸으신 협로를 마음에 새겨 나 역시도 그와 같은 길을 밟아나갈 생각이라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천명임을 맹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알았소이다.”
포부 가득한 선언.
하지만 진천군이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대저 협이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않은가?”
“무어라?”
“칼을 앞세워 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행하고, 그것을 협이라는 한 글자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부랑아로 거리를 떠돌던 시절 진천군은 협객을 자처하는 자들을 많이도 보았다.
그 모두가 쓰레기들이었다.
술을 가득 따라 찰랑거리는 잔을 비워낸 제갈정명이 경고처럼 말했다.
“맹주의 협은 인의와 닿아있으니 그런 개뼉다귀 같은 놈들과 함께 입에 올리지 마시오.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
“인의와 맞닿은 협이라······. 그대는 오래 살기는 글렀군.”
“그거야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고. 한데 방금 한 질문들, 어째 나를 향한 것은 아닌 듯하군.”
제갈정명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맹주께 관심이 많은 듯한데-”
“적당히 취기도 돌았으니 이제 시작하는 것이 어떤가.”
말을 가로막듯이 진천군이 제안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제갈정명이 이내 답했다.
“······그거 좋지.”
술잔을 털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혼자 남아 술을 마시던 영호경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저가 이리 뜸을 들이며 대화를 나눈 이유.
제갈정명을 높게 평가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협검무제에게 흥미가 생기셨나?’
어제의 도발적인 언행까지 고려한다면 충분히 그럴 듯한 결론이었다.
영호경이 그런 추측을 하고 비무를 위해 나선 두 사람이 기수식을 취한 그때였다.
“오호라.”
그리 듣기 좋지는 않은 목소리.
제갈정명이 곧장 이맛살을 찌푸렸고 진천군과 영호경은 시선을 돌려 인기척을 확인했다.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사내 넷에 여인이 둘.
가장 나이가 많은 자도 서른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중 선두에 있던 얼굴이 거무튀튀한 사내가 거침없이 걸어와 연무장을 밟았다. 제갈정명을 슬쩍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진천군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고, 사내가 포권하며 말했다.
“모용원중이라고 하오. 경천신마의 제자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소이다.”
“아는 자인가?”
사내를 향한 질문은 아니었다.
제갈정명이 툭 내뱉었다.
“그냥 오다가다.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지.”
진천군은 모용원중과 그 일행을 스윽 훑어봤다.
여인 두 명은 조금 나은 듯했으나 나머지는 모조리 못 써먹을 작자들.
심지어 자신에게 인사를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각기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을 무시한 진천군이 제갈정명에게 말했다.
“들으면 귀가 아플 것 같군. 한 번에 소개해주겠나?”
“흐음······, 그대가 이야기한 협객의 예시에 더없이 걸맞은 선배들이외다.”
잠시 말을 고르다 나온 대답.
진천군이 짧게 요약했다.
“버러지?”
“저기 누님들은 빼고.”
졸지에 욕을 얻어먹은 모용원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렵게나마 표정을 수습한 뒤 진천군에게 말했다.
“비무를 하려면 나와 하는 게 어떻겠소. 방계의 자식 따위보다는 내가 나을 터인데.”
파리라도 쫓듯이 손짓하며 진천군이 일렀다.
“흥이 식기 전에 꺼져라. 두 번 말하지는 않을 것이야.”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니오? 이곳이 무림맹임을 기억하- 커억!”
진천군이 가볍게 손을 뻗고, 모용원중이 얼굴을 감싸쥐며 나동그라진 것은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이어서 진천군이 발을 굴렀다.
쓰러진 모용원중에게 다가가 발길질을 했다.
퍼엉!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모용원중이 저 멀리 벽에 처박혔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성난 기색으로 외쳤다.
“마교의 무인들은 예의라는 것이 없는가?”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앙!
온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은 기파가 장내에 휘몰아쳤다.
세찬 바람에 술이 얼마 남지 않아 가벼운 술병이 탁자 아래로 떨어졌다.
홀로 앉아 있던 영호경은 빈 술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교라는 표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교인들도 많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그쪽이 다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저는 그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고, 이제 곧 대참사가 일어날 모양이었다.
지금도 저릿저릿한 기세를 뿜어내며 진천군이 말했다.
“방금 마교라고 지껄인 새끼부터 튀어나와라.”
***
백운상은 잠시 들었던 선잠에서 깨어났다.
혼절하기 전까지 땀을 잔뜩 흘려서 입고 있는 의복이 축축했다.
맹주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침상.
함께 누워서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하무린이 그녀에게 말했다.
“좀 더 자도 되는데.”
백운상은 대답을 하는 대신 조금 더 하무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며 그제서야 답했다.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
“깨어서 얼굴을 볼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을.”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하무린이 곧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양팔로 백운상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잠시간 행복하고 편안한 정적이 흘러갔다.
백운상은 문득 속엣말을 꺼냈다.
일부러 꺼냈다기보다는 저절로 새어나온 말이었다.
“하가야.”
“응?”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그냥, 전부 다.”
백운상은 스스로의 죄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심지어 하무린 본인조차도 아니다.
신교의 천마 백운상이, 하무린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본디 어디까지나 자유롭게 살아갔을 그의 인생을 백운상 본인의 의도대로 이끌었다.
그것은 천하를 위한 길이기도 하였으나, 가장 깊숙한 근원을 따지자면 그녀 자신의 욕망의 발로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백운상은 마음속에 켜켜이 자리한 두려움을 떨쳐내듯이 말했다.
“하가야.”
“왜, 백가야.”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엇을?”
“사실은······, 맹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지?”
“······.”
돌연한 침묵.
백운상은 급격히 몸집을 키워가는 두려움에 하무린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하무린은 웃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네놈 같으면 하기 싫은 일을 십 년 넘게 해 먹고 있겠냐?”
하무린이 얼굴을 살짝 기울여 백운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푹 쉬다 가거라.”
“네, 가가······.”
사실은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다.
무림맹주 따위 억만금을 주어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백운상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질문을 한 이유는······, 역시나 이기심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물으면 하무린이 있는 힘껏 부정해 줄 것을 알았으니까.
처음부터 그랬지만 백운상은 해가 갈수록,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하무린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마치 화인을 새기듯이 일렀다.
“함께 선계에 가자.”
“······.”
“선계에 가서, 인세의 번잡스러운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너와 내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야.”
하무린 역시도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리라.
백운상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약속만큼은 단 한톨의 의심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무린이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입이 쉬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힘이 남은 모양이구나.”
어느새 하무린이 백운상의 몸 위로 올라와 있었다.
“······가가?”
이미 이어질 일을 예감한 백운상은 그리 물으면서도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하무린의 손이 백운상의 옷깃에 닿은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집무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일으키고 복장을 정돈한 백운상과 하무린이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맹주님! 안에 계십니까? 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