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외전/ 칠주야의 만남 (3)
깨진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우물거리던 제갈경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미쳤습니까? 이런 자리 마련해놓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대답이나 하시게. 감당이 되는가, 안 되는가.”
단출하게 답하고는 손을 휘둘렀다.
흩어져 있던 술잔 조각들이 한 데 모였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제갈경이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리 묻지 마시고 조건부터 말씀하시지요.”
“7할.”
맞붙어서 곧바로 목숨을 거둘 확률을 말함이었다.
“나머지 3할은 뭡니까.”
“팔다리를 두엇쯤 가져갈 수도 있고, 최소한 삼 년은 정양해야 할 내상을 입힐 수도 있고. 여하간 몸 성히 보내지는 않을 거라네.”
“맹주님이 입을 손해는요.”
“소환단이랑 태청단 하나씩 얻어먹으면 그만이지.”
“어디 맡겨놓기라도 하셨습니까?”
“천하를 위해 필요하다는데 제놈들이 어쩔 텐가.”
백운상에게 쉬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히고 영단 몇 개라면 백 배는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제갈경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한데 그렇게나 차이가 납니까? 맹주님과 백운상 말입니다. 일전에는 죽자사자 싸우면 맹주님이 진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때야 그랬지만 별로 큰 차이도 아니었지. 지금은 달라. 명백히 내가 더 강하네.”
나는 확신을 담아 답했다.
진천군이라고 했나?
그 싸가지 없는 제자놈과 인사를 나누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백운상이라면 그놈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도록 진작에 가르침을 주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일면식도 없던 내가 알아챈 것을 사부인 백운상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
백운상이 발 딛고 선 경지를 내가 넘어섰다는 뜻이다.
반 갑자 가까운 세월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확실합니까?”
“군사는 지금껏 속고만 살았나? 이미 확인 끝났네. 싸우면 내가 이겨.”
지금이라면 백운상은 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내가 검을 휘두르면 놈은 제대로 받아낼 수 없다.
놈의 가장 강맹한 공격조차 나는 정면으로 받아쳐 깨부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쫓는다면, 백운상은 결코 나를 떨쳐내지 못할 터였다.
오래전 동정호에서 맞부딪친 이래로 우리 사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것은 처음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하는 제갈경을 향해 재차 일렀다.
“군사. 잘 생각하시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르네. 내일 당장이라도 백운상이가 대오각성할 수도 있고, 몇 년 후에는 반대로 내가 십만대산에 갔다가 모가지가 뎅강 잘릴 수도 있어.”
“백가놈이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나도 그놈 모르게 이 지랄을 떠는데 백운상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거야 맹주님이 워낙 되먹지 못한 인간이라-”
티잉!
손가락으로 지풍을 튕겼다.
코를 감싸쥐고 엄살을 떨던 제갈경이 통보처럼 말했다.
“아무튼 안 됩니다. 꿈 깨십시오.”
“이런 썅, 자네 간자인가?”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지 마시고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이유는?”
“확률이 너무 낮습니다. 7할로는 안 됩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9할. 백가놈이 마교로 내빼고 나서 벌어질 일 생각하면 그 이하는 수지가 안 맞습니다.”
“황제 때문에 그러나?”
찬장에서 멀쩡한 술잔을 하나 꺼낸 제갈경이 술을 한 잔 들이키고 답했다.
“네, 시기가 너무 안 좋습니다. 황제가 북방 놈들 무서워 눈 희번덕거리고 있는 판에 마교 씨몰살 시켰다고 상을 주겠습니까? 재수 없으면 그 다음은 우리입니다. 강호무림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제갈경이 오른손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방금 말씀드렸듯이 백운상이를 죽일 확률 9할. 그리고 맹에 들어온 나머지 놈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야 합니다. 일단 시작할 거면 아예 마교를 이 땅 위에서 지워버릴 각오로 임하십시오.”
“그것만 해도 골이 아프구만. 나머지 둘은 뭔가.”
“황제 놈이 안심할 수 있게 감투도 좀 쓰셔야 합니다. 적당히 무림왕 같은 거 주겠지요.”
“······마지막 하나는?”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얼굴을 제갈경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지은 것 중에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툭 내뱉었다.
“부마.”
“부마? 황제 사위 말하는 거 맞나?”
“네, 그거 말입니다.”
“내가?”
“맹주님이요.”
“부마 같은 건 할 생각도 없거니와 황제가 나보다 두어 살 어린데?”
얼떨떨하게 물으니 제갈경이 태연하게 답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있지! 시집 안 간 공주래봐야 누가 있는데. 다 코흘리개들 아닌가.”
“천화공주 있잖습니까. 이제 스무 살도 넘겼으니 맹주님과 잘 어울리겠군요.”
“그 기집애는 아직도 시집 안 갔나?”
“풍문에 의하면 십 년 전에 황궁 다녀간 누구 때문이랍디다.”
“나보고 어쩌라고.”
“······개새끼.”
퍼억!
이번에는 명치 부근을 타격했다.
켁, 하고 숨을 내뱉은 제갈경이 말을 이었다.
“강호무림의 맹주. 천하제일인 협검무제 하무린. 황실의 책봉을 받은 무림왕이자 황제의 부마. 백운상이 삼도천 보내는 대가로 맹주님이 짊어지셔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개 좆같은······.”
말로 하면 거창하지만 기실 족쇄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그 다음은 뭔가. 북방에 원정 가서 사람도 좀 썰고, 황도에서 황제 눈밖에 나는 놈들 목도 잘라주고 그런 건가?”
“잘 아시는군요.”
“안 해!”
외치고는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병 안의 술을 거의 다 비워낸 후에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닐세.”
“뭐가 아닙니까.”
“생각 좀 해보겠다는 말이야.”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리길래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거 나 보고 하는 말인가?”
“그러면 여기에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는데.”
“반말하네?”
“지금 존대해주게 생겼냐!”
제갈경이 벌떡 일어서며 삿대질을 해댔다.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아등바등 맹주직 붙들고 있는 것도 다 나중에 백가놈이랑 살림 차리고 오순도순 살고 싶어서 하는 짓거리면서. 그런데 뭐? 백가놈은 죽이고, 무림왕에 부마에, 황제 칼잡이 노릇이나 하겠다고? 네놈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게 뻔한데 말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나보고 두 눈 뜨고 그걸 보고 있으라고?”
“하, 이 새끼 선 넘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대답해 봐라.”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타까움과 걱정, 울분에 찬 제갈경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썅, 그건 내 사정이고.”
“뭐?”
“내가 백가놈과 무엇을 하고 싶건간에 그건 내 사정이라는 말일세. 다른 놈들한테 그게 중요한가?”
“······.”
“내가 내린 명 때문에 죽고, 나한테 죽고,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살리겠다고 죽은 사람들한테 그게 중요하겠냔 말이다.”
제갈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 입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으나 이 빌어먹을 새끼를 납득시키려면 말해야만 했다.
“여기에 백운상이를 죽이고 마교를 절멸시킬 기회가 있다. 맹의 무인들이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었다. 한데 내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그 기회를 날려야 하나? 그건 사람으로서 너무 염치가 없는 짓 아닌가? 군사. 답해보게.”
묵묵부답이던 제갈경이 결국에 뇌까린 말이란 겨우 이런 것이었다.
“하면 하가 네놈은? 그걸로 만족하나?”
“그래. 최선을 다했으니 충분히 만족한다네.”
“······입에 침이나 바르고 지껄여라.”
제갈경이 몸을 돌렸다.
문을 여는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9할이라고 했지? 방도를 생각해 볼 테니 며칠만 기다려주시게. 군사 자네도 얼추 준비는 해두고.”
“천하의 꼴통 같은 새끼······.”
귓전에 흘러들어온 악담을 안주 삼아 마지막 한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
해가 중천에 걸친 정오 무렵.
진천군은 마루에 걸터앉아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자연스레 눈가가 찌푸려졌다.
오 장 정도 떨어진 바로 곁의 객당.
마찬가지로 한가하게 앉은 사제 영호경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만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음이나.
“하하, 그래서 말이오.”
“정말이신가요?”
영호경과 담소를 나누는 이.
대화의 내용이 문제였다.
반 시진 전에 차와 식사를 가져온 시비.
가지고 온 것만 들여보내고 자리를 뜨려던 시비를 영호경이 불러세운 것이다.
‘소저. 이것이 무슨 음식이오? 신교에서는 보지 못한 것인데 설명을 해주시겠소이까.’
‘아, 그것은······.’
악명 높은 천마의 제자를 대함에 처음에는 공손히 설명을 이어나가던 시비와의 대화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졌고, 급기야는 함께 마루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연인 사이라고 착각할 만큼 다정한 모습이었다.
진천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보고 처신을 바로 하라더니 제놈이 더 문제가 아닌가.’
기실 진천군은 사제 영호경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무공이야 자신이 뛰어나다지만 그 외의 모든 면에서는 사제가 자신을 압도했다.
거기에다 신분으로 따진다 해도 자신은 배경 없는 부랑아 출신인데 비해 영호경은 신교 팔대 가문 중 하나인 영호가의 적자.
때문에 장제자도 아닌데다 남자여서 신녀직을 맡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차기 교주로 영호경을 지지하는 자가 교내에 적지 않았다.
‘경이가 교주가 되어도 나는 크게 불만이 없으나······, 저 꼬락서니만은 도저히 눈뜨고 봐주지를 못하겠구나.’
용모가 괜찮고 꼬드길 수 있겠다 싶으면 거침없이 손을 뻗어대는 버릇이 무림맹에 와서도 건재했던 것이다.
은근슬쩍 서로의 옷깃을 스치는 영호경과 시비의 손길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진천군이 일렀다.
“경아.”
“해서 신교에서는 말입니다.”
“경아!”
“······왜 부르십니까?”
불퉁하게 답하는 영호경을 향해 진천군이 미약하게 기세를 올렸다.
“적당히 하거라. 자네는 바쁠 텐데 이만 가보시게.”
흠칫 몸을 굳힌 시비가 일어나 인사를 하더니 쪼르르 달려갔다.
영호경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방해를 하고 그러십니까. 한창 잘 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잘 되어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부탁이니 철 좀 들거라. 네 나이가 곧 약관이다.”
“이 나이니 이러는 것이지요. 그리고 굳이 무엇을 한다기보다 적적한 차에 담소라도 나누면 좋지 않습니까.”
“쉰소리 그만하고. 이제 정오 아니더냐.”
“시간이 벌써 그리 됐습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는 영호경을 향해 진천군이 중얼거렸다.
“한심한 놈······.”
중얼거림과 함께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계시오?”
어제 들은 바가 있는 음성.
진천군이 내공을 실어 손가락을 튕겼다.
콰앙!
지풍에 얻어맞은 문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목소리를 낸 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부서진 문이 그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서 검광이 번뜩였고, 나무 문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내렸다.
진천군이 짧게 평했다.
“제법이구나.”
“······그렇군요.”
그리고 시야가 트인 곳에는 푸른 무복을 입고, 한눈에 보기에도 절세의 명검임을 알 수 있는 검을 허리춤에 찬 청년이 서 있었다.
“간밤에 잘 주무셨소?”
“덕분에.”
짧게 답하는 진천군을 향해 청년이 패기만만하게 말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소. 천검대 소속 제갈정명이라 하오.”
제갈정명의 시선이 깨끗이 비워진 식기로 가닿았다.
“점심 식사도 하신 듯하니 나랑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나쁘지 않지. 한데 어디서?”
“근처에 간이 주루가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시겠소?”
씨익 웃으며 제갈정명이 말을 이었다.
“바로 옆에 연무장도 하나 마련되어 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진천군이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차가운 술인가?”
“데운 것도 있고, 차가운 것도 있는데 그런 것은 왜 물으시오.”
답한 것은 영호경이었다.
“입 안이 다 터질 텐데 데운 술은 따갑지 않겠나. 사저께서 그대의 걱정을 해주는 것이라네.”
잠깐 멈칫하던 제갈정명이 이내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 참 기대되는군.”
제갈정명이 걸어나갔고, 진천군과 영호경이 그 뒤를 따랐다.
***
“하가야.”
“······.”
“하가야?”
백운상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방금까지는 하무린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들으랍시고 좋은 술을 한 병 숨겨놓았다는 하무린의 말에 따라 함께 맹주 집무실로 들어온 것이 일각 전.
술이 몇 순배 돌고나자 갑자기 하무린이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운상은 약이 올라 재차 불렀다.
“하 가가?”
그제서야 하무린이 시선을 주었다.
백운상이 핀잔처럼 말했다.
“아주 넋이 나가 있구나. 공무 중에 무얼 하는 게냐.”
이 또한 농담이었다.
공무라 구색을 맞추긴 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으니까.
한데도 하무린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 조금은 서운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그간 신경을 쓸 곳이 많았겠지······.’
신교 내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하무린은 그야말로 칼날 위를 걷듯이 매일을 살아야 할 터였다.
그에게 그러한 삶의 방식을 요구한 것이 백운상 본인임을 상기할 때마다 그녀는 적잖이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하무린이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크흠, 미안하게 됐다. 머리통에서 골치 아픈 일을 비워내느라.”
백운상의 마음에 잠시 생긴 서운함이 곧장 자취를 감추었다.
하무린의 눈빛에서 미안함과 애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 잘 비워냈느냐.”
“물론이지. 한 잔 받거라.”
과연 말한 대로 좋은 술이었으나 몹시도 독했다.
취기가 올라 백운상은 아주 약간만을 남기고 주정을 모조리 비워냈다.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이 맺혔다.
이번의 방문이 제아무리 별 탈 없다고 하나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인인 동시에 하무린은 신교의 제일대적이었고, 이곳 무림맹은 정파무림의 심장부였으니까.
만에 하나 하무린이 기습을 한다 해도 능히 대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해서 취기를 조금이나마 남긴 것은 이 시간이 좋았기 때문에.
분위기에 취하고 싶어서였다.
백운상이 위로처럼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야.”
“무슨 말이냐?”
“신화경神化境.”
놀란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하무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직 잡히지는 않으나······, 벽을 뚫어낼 시간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겠지. 네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그건-”
“어제 보았을 때부터 알던 것이니 속일 생각일랑 말거라. 네놈은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려 하는구나.”
“······내가 그랬더냐?”
“그래.”
백운상이 불만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하무린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다짐을 받아야겠다.”
“무엇을?”
“둘 중에 누가 먼저 오르더라도 기다려주기로.”
“······.”
“복잡한 일은 남김없이 정리하고, 함께 선계로 가는 것이야. 그리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말하는 백운상의 목소리가 굳건했다.
아니, 어쩌면 한 줄기 불안감이 스며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백가 너 없이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냐.”
그리 답하는 하무린의 음성에 절절한 애정이 흘러넘쳐서, 불안감은 곧 당과가 녹듯이 사라져갔다.
백운상은 하무린의 어깨에 양손을 대었다.
이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고, 입술을 겹쳤다.
“하 가가······.”
천 년 만에 맛본 과실처럼 달디단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