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24화 (124/130)

124. 외전/ 칠주야의 만남 (2)

“저 아이들이오?”

아이‘들’이라 한 것은 얼굴 허연 사내놈이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난처한 안색으로 계집아이를 향해 입을 달싹이고 있다.

아마 나대지 말라고 전음을 보내는 것 같은데, 뺀질거리게 생겨서는 제법 눈치가 있나 보구만.

짧게 그런 평가를 내렸다.

물론 나랑 눈 마주치고도 뻗대고 있는 계집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백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 제자들이라오.”

칼날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맹의 무인들 사이로 파장이 일었다.

천마 백운상이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이 강호무림을 휩쓸고 간 것이 몇 년 전.

장제자長弟子는 실로 무의 화신이라 할 만한 무재에 다른 한 명도 다방면에 능통한 천재라는 말이었다.

강호의 풍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이라 하나 그 백운상이 들인 제자들이다.

석년의 백운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의 반절만한 자질이라도 지녔다면······.

맹의 무인들이 모였다 하면 그런 말들을 수군거렸지만 십만대산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으니 볼 턱이 있나. 한데 뜻밖에도 오늘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나야 소문이 아니라 백운상에게 직접 들었지만.

“천군아, 경아. 이리로 와보거라.”

사내놈과 계집아이가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백운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놈이 먼저 내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협검무제를 뵈어 영광입니다. 영호경이라 합니다.”

“영호? 팔가八家의 그 영호인가?”

“아시는군요.”

“일전에 자네 가문 근처 촌락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다네.”

“하하. 코흘리개적 일이기는 하나 저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다음에 신교에 오실 때는 본가에 묵으시지요. 부족하나마 제가 직접 대접을 드리겠습니다.”

“뭐, 한 번 생각해 보겠네.”

좋아. 이 새낀 일단 합격.

얼굴이 뺀질하고 이름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애새끼가 싹싹하니 자세가 되었다.

잘 배운 놈의 품격이란 게 보인단 말이지.

인사치레를 끝낸 영호경이 계집아이에게 슬쩍 눈짓했다.

하는 투가 꼭 잘 보고 내가 한 것처럼만 따라 하라는 것 같다.

그리고 계집아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반갑소이다, 협검무제. 진천군이라 하오.”

“······.”

무거운 침묵이 장내에 일었다.

이 새끼 진짜 뭐하는 놈이지?

인사가 저게 다인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제놈 사부랑 똑같은 평대에다, 포권을 하긴 하는데 자세가 뻣뻣했다. 고개는 아예 숙이지도 않고 나와 계속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관계도 아니니 예에 어긋난 건 아닌데······, 앞엣놈이 너무 싹싹하게 군 덕에 비교가 됐던 것이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맹주님한테······.”

멀찍이서 정명이 놈이 이를 뿌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딴에는 혼잣말로 안 들리게 한 거겠지만 주위가 워낙 조용한 바람에 아주 잘 들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초장부터 다 조지겠다 싶어 내가 말했다.

“그래. 아직 어린데 제법 성취가 좋군.”

“감사하외다.”

계집아이가 그렇지 않아도 상기됐던 뺨을 조금 더 붉히며 답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약관 나이 정도로 보이는데 이놈 벌써부터 절정고수였다.

그것도 초입은 넘어선 수준.

맹의 후기지수 중에는 이런 놈이 없다.

정명이 말고는 아마 채 일백 합을 겨루기도 힘들 거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진천군이라는 저 어린놈.

이대로 커나가면 채 마흔 살을 못 살고 죽어버릴 테니까.

근래 다소간 성취가 있은 후로 나한테는 그런 게 보였다.

신화경에 이르는 길을 엿보고 극도로 예리해진 감각.

하루가 지날수록 점차 안개가 낀 듯이 흐릿해지기는 했으나 아직은 인간세상 삼라만상의 이치가 손에 잡힐 듯했고, 그 감각이 저 계집아이가 여지껏 살아온 방식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그려냈다.

앞으로 십 년은 괜찮다.

허나 다시 십 년을 더 살아내지는 못할 터.

그 전에 새까만 암흑이 되어 끊어질 길이었다.

내 시선이 백운상을 향했다.

조금 곤란한 기색이긴 하나 제자의 기상이 못내 흐뭇한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백운상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진즉에 알아채고 가르침을······.

마음속으로 의문을 삼키며 제안했다.

“교주, 뒤뜰에 못이 보기에 썩 괜찮소이다. 그곳에서 담소나 나누는 것이 어떠하오.”

“좋소이다.”

백운상이 선뜻 응했다.

말이야 연못 구경하자는 것이나 실제로는 온건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백운상과 나 두 사람에게는 오랜만에 쌓인 회포를 풀자는 의미였고.

그리고 오로지 나에게만······, 한 가지 뜻이 더 숨어 있었다.

뭔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백운상을 이끌며 말했다.

“우철아.”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열두엇 정도 된 사내아이가 곧장 답했다.

“네, 맹주님.”

“교주의 제자들을 안내해주거라.”

나머지 놈들이야 제갈경이 알아서 할 것이고.

우철이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 길을 열었고 그 가운데를 걸어 나가며 백운상이 물었다.

“맹주의 제자요?”

“제자는 아니고 시동으로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 제법 기특한 데가 있는 아이라오.”

무림맹 안에서 백운상과 여상스런 말들을 나누고 있자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내가 해야 할 바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

진천군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사내아이를 바라봤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꾹 다문 입에서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면모가 엿보였다.

“묵을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알겠네. 경아, 가자.”

아까부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던 영호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따라나섰다.

숙소로 가는 데는 일각 정도가 걸렸다.

우철이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아이가 사무적인 어조로 몇 마디 설명을 해주었고 영호경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 진천군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로 협검무제 하무린과 마주한 순간을 곱씹고 있었다.

‘소문이 오히려 모자란 바가 있었구나.’

처음 본 순간부터 놀랐다.

정중한 기색보다는 다소 건들거리기까지 한 걸음걸이.

그러나 어느 곳 하나 틈이 없었고 몸짓마다 측량하기 힘든 무리가 엿보였다.

단지 눈에 담은 것만으로도 진천군은 자신의 안계가 넓어졌음을 느꼈다.

게다가······.

‘화공들의 솜씨로 그려내기에는 심히 무리가 있는 용모였도다.’

신교 내의 처소에 두었던 용모파기 몇 장을 떠올리며 진천군이 속으로 되뇌었다.

목소리는 귓가에 깊이 스며들어 듣기가 좋았고, 전신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듯해 마치 하늘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인정해야만 했다.

협검무제 하무린은 그녀의 사부인 경천신마 백운상과 나란히 거론될 자격이 있는 자라는 것을.

온전히 사부께 미치지는 못하겠으나 굳이 한 명을 꼽아야 한다면 하무린일 터였다.

진천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호승심을 과하게 드러내고 만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백운상과 겨룰 수 있는 정파제일고수와 무인 대 무인으로 마주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손을 한 번 섞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스스로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진천군은 그런 바람을 품었다.

<무엇이 좋아서 그리 웃으십니까?>

영호경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전음을 보냈다.

<내가 말이냐?>

<아주 입이 귀에 걸리겠습니다.>

진천군은 손을 들어 입가에 대어봤다.

아닌 말이 아니라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내 사저를 존경해 마지않으나 아까는 그러시면 안 됐어요. 사단이 났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잔소리 좀 그만하거라.”

들려온 말에 길을 안내하던 우철이란 사내아이가 뒤로 흘끗 고개를 돌렸고, 영호경이 투덜거렸다.

“어휴. 내가 제명에 못 살지.”

그리고 숙소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철아, 천호당으로 가는 것이냐?”

진천군은 목소리의 주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제인 영호경의 또래이거나 그보다 한두 살 아래로 보이는 청년이 걸어왔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 하무린과 마주했을 때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라고 읊조린 자.

다소 오만하기까지 한 자세로 청년이 포권을 했다.

“제갈정명이라고 하오.”

“그래서?”

진천군이 짧게 답했다.

청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짙어졌다.

“천마 백운상의 장제자가 무재 중 무재라 하던데. 실지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겁이 없는 것으로 치자면 당대 후기지수 중 제일을 자처해도 되겠더군. 아까 맹주께 행한 결례는 아주 잘 보았소이다.”

“실지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

“보고 싶나?”

“그러니 왔지.”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지 청년이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졌다. 검병에 달아놓은 붉은색 수실이 흔들렸다.

그리고 소년이 조용히 말했다.

“맹주님의 명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제갈정명이라 이름을 밝힌 청년이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을 곱씹는 듯하더니 진천군에게 일렀다.

“먼 길 왔으니 오늘은 쉬시고 내일은 내가 맹의 안내를 해주고 싶은데 어떻소.”

“좋지.”

만족스럽게 눈을 빛낸 청년이 몸을 돌렸다.

“내일 정오쯤 올 테니 기다리시오. 우철아. 손님 잘 모시거라.”

그리고 그때까지 한마디도 않고 있던 영호경이 전음을 보내왔다.

<사저. 방금 저 새끼는 저도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진천군이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정파의 오만방자한 코흘리개들을 후려패주겠노라고.

그 정도야 사부께서도 용인하신 바였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칠주야의 일정동안 하무린과 무를 논할 기회까지 있다면······.

‘이곳까지 온 수고의 셈으로 족하고도 남으리라.’

주먹을 한 번 꾸욱 쥐며 진천군이 다짐했다.

그리고 준비해 둔 숙소에 당도해 우철이 말했다.

“들어가 계시지요. 곧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게.”

자리를 뜨려는 우철을 향해 영호경이 말했다.

“왜 그러신지요.”

“식사 말인데. 하나는 아무렇게나 주어도 상관이 없으나 다른 하나는 소채로 가져다주시게.”

우철이 차분하게 답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냥 익히지 않은 소채면 충분하네.”

우철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이번 한 번이면 몰라도 며칠을 머물러야 한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영호경이 사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그리고 진천군이 무얼 그리 거리끼냐는 듯이 스스로 일렀다.

“내가 육식을 안 한다네.”

“아······.”

마침내 우철의 표정이 흐트러졌고, 영호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

날이 어둑해지고 나서야 백운상과 담소가 끝났다.

아직 시간이 그리 늦지는 않았지만 아직 초봄이라 해가 짧았다.

집무실을 향해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던 동안의 이야깃거리를 풀어내는 대화가 힘겨웠던 것은 아니다.

아주 행복했고, 기대해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해서 내 발걸음의 무거움은 다만 내 마음과 생각에서 기인했다.

집무실 문을 여니 제갈경이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하늘같은 맹주 집무실에서 뭐하고 있나?”

나를 흘끗 본 제갈경이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더 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첫날부터 그리할 수는 없지.”

어차피 보여주기 위한 만남이었으니 천천히 진전되는 게 더 좋았다.

제갈경이 인심 쓴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다시 가셔도 됩니다. 그 정도야 해결해 드리지요.”

“됐네.”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 백운상과 날이 바뀔 때까지 술잔을 나누는 데에 누구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자리를 파한 것은 내 선택이었다.

외부에 보여주기에 적당한 시간 동안.

백운상이 의구심을 품지 않을 만큼은 길게.

그리고······.

“군사. 내가 물어볼 것이 하나 있네.”

제갈경과 이렇게 의논을 할 여유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은 짧게.

정확히 그만큼 시간을 보냈다.

“말씀하시지요.”

탁자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번에 비워냈다.

그리고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제갈경을 향해 물었다.

“만약 지금 내가 백운상이를 죽이면······, 우리가 그거 뒷감당이 되나?”

째앵!

제갈경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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