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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23화 (123/130)

123. 외전/ 칠주야의 만남 (1)

진무震武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부랑아로 거리를 떠돌던 때였다.

다섯 살, 어쩌면 네 살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았다.

진무라는 이름도, 태어난 날을 정월 초하루로 고른 것도 십만대산의 신교 본단으로 흘러들어와 스스로 정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신교에 들어온 지 채 사흘도 되지 않아 생각했다.

이곳이야말로 지상에 터를 잡은 낙원이라고.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닭장 같은 거처에서 잠을 잤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끼니가 나왔다. 하루 두 끼. 넉넉지 못한 식사.

어린 진무에게 그건 천신天神의 증명과도 같은 기적이었다.

식사에 앞서 아이들은 항상 감사를 올렸다.

비천한 부랑아로 죽을 운명이었던 자신들을 구해준 천신께.

그 신은, 이름을 백운상이라 하였다.

신교에 들어온 뒤로 진무는 썩은 밥알을 허겁지겁 움켜쥐던 자신의 손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학문을 하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의복을 만드는 것도 서툴기 그지없었으나 사람을 때리는 재능만은 출중했다.

해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위대한 천신께 바치자고.

의지와 재능이 맞아떨어져 열다섯 무렵에는 마침내 천신의 첫 번째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러 성년식을 치르게 된 진무는 자字를 천군天君이라 지었다.

연유를 묻는 백운상에게는 글자가 멋이 있다 둘러댔으나 기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천신을 섬긴다 하려면 마땅히 신을 대리하는 임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약관 나이의 진천군震天君은 그런 포부를 품고 있었고, 다소 불만 섞인 어조로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하무린은 어떤 자입니까.”

함께 말을 몰고 나아가던 백운상과 사제 영호경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저, 그것이 무슨 질문입니까?”

영호경이 수려한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고 백운상은 다만 진천군을 바라봤다.

얕게 한숨을 내쉰 진천군이 재차 물었다.

“천하에 그를 칭하는 말들이 많으나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아둔하여 무엇이 옳은지를 알지 못합니다.”

혹자는 하무린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이며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무재를 가졌다 말한다.

아무런 배경 없이 혈혈단신으로 정파무림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그를 두고 입지전적인 영웅이라 칭송을 하는가 하면, 권력욕에 미친 간웅이라 흉을 보는 이가 있었다.

갖은 협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포악한 성정이라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해서 진천군은 하무린이라는 자를 무어라 쉬이 재단할 수가 없었다.

‘용모가 빼어난 것만은 부정하는 이가 없었다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는 진천군을 향해 백운상이 고아하게 웃었다.

“천군아. 무엇이 불만이더냐.”

허를 찌른 질문.

진천군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백운상이 말을 이었다.

“실은 이리 묻고 싶은 것이지? 하무린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먼 길을 찾아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속내를 읽힌 진천군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꼭 맞았다.

근래에 큰 싸움이 없었다 하나 신교와 정파무림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대적일진대.

자리를 함께하는 것부터가 꺼려질뿐더러 혹여 논할 바가 있다고 해도 마땅히 그쪽에서 찾아오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실제로도 과거에 하무린이 신교를 방문한 일이 몇 번 있었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그리했으면 될 것을. 제깟놈이 뭐라고 오라 가라 한단 말이야?’

해서 자신과 사제인 영호경, 백운상까지 천마일맥 모두와, 신교 내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백여 명이 포함된 이 사절단의 여정 자체가 불만스러웠던 터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영호경이 딱하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사저. 무림맹에 가서는 부디 언행에 신경을 쓰십시오. 거 성질대로 하다가는-”

“그러는 경이 너는 지금부터 신경을 많이도 써야겠구나.”

“크흠.”

지켜보던 백운상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서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나 시비를 걸어온다면 굳이 참지도 말려무나. 맹에 있는 아이들은 너희가 앞으로도 봐야 할 테니 미리부터 버릇을 들여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죽이지는 말되 흠씬 두들겨 패는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본교를 두고 마교라 망발을 내뱉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이빨을 부러뜨려 놓겠습니다.”

진천군이 굳게 다짐했다.

그녀가 알기로 천마라는 명호는 본래 멸칭이었다.

고금제일인이자 신교의 개파조사가 되는 시천마 일월령.

인세에 다시 없을 그 신인을 향해 두려움을 담아 일컬은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귀, 천마라고.

그리고 일월령은 담담히 긍정했다고 한다.

‘핍박받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 마귀라면 내 기꺼이 그리 불리겠노라!’

낭랑히 선언하는 그 구절은 신교의 경전에서 진천군이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해서 천마신교, 혹은 신교라 불리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나 단순히 마교라 부르는 것은 모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마침 좋은 기회라는 듯 경전을 욀 기세인 그녀를 향해 백운상이 일렀다.

“정확히는 이리 말씀하셨다고 하지. ‘천마? 아휴. 맘대로 부르라고 하렴.’이라고.”

“······야사일 뿐입니다. 조사께서 그리 가볍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던 진천군이 문득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한데 사부님. 무림맹은 엄연히 적지인 데다 하무린은 온갖 간계와 모략에 능하다 들었습니다. 행여나 사부님과 본교의 행사에 누가 된다면-”

“그런 걱정을 할 것이었다면 너희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야. 오래 걸려도 칠주야를 넘지 않을 일이니 마음 편히 바깥 구경이나 하다 돌아간다 생각하거라.”

부드럽게 답한 백운상이 다시 유유히 말을 몰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답을 해주지 않았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하무린이 어떤 자인지 묻지 않았더냐.”

“아······.”

“하무린이라······.”

잠시간 말을 고르던 백운상은 이내 웃음을 지었다.

진천군은 저도 모르게 그 미소가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마 무슨 말을 들었든, 그다지 틀린 말이 없을게다.”

***

“군사.”

총군사 제갈경을 불렀다.

질문을 하려고 한 것인데 묻기도 전에 퍽퍽한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일각 후에 나가시면 됩니다.”

“내가 뭐라고 했나?”

숨은 호위도 모두 내보내 둘만 남은 집무실에서 제갈경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버선발로 마중 나가고 싶으신 마음은 알겠으나 부디 체통을 지키시지요. 없어 보입니다.”

“뭐라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시란 말입니다. 모양 빠지게시리.”

싸늘한 내 표정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제갈경이 제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끝마쳤고 그 의기를 높이 사 나는 친절히 질문했다.

“군사. 뒤지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살고 싶습니다.”

“좆같은 새끼······.”

들으라고 읊조린 뒤에 재차 물었다.

“그리 티가 많이 나는가?”

“백운상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돌아온 맹주를 기억하는 이가 이제 천하에 저 한 사람뿐이니 안심하십시오. 그거 모르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겁니다.”

“그래. 자네밖에 안 남았긴 하지.”

천마 백운상의 비수 경해연도, 정파제일 여협 남궁영령도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물끄러미 제갈경을 바라보니 몸을 부르르 떨며 물어왔다.

“눈을 왜 그리 뜨십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자네 한 명 남았구만.”

“이 미친 새-”

퍼억!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은 제갈경이 몸을 웅크리면서도 할 말을 했다.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나가서는 제대로 하십시오. 중요한 일입니다.”

“이를 말인가.”

변방 이민족의 준동으로 당금 황제가 한창 군세를 모으는 중이다.

십만대산에 틀어박혀 막강한 힘을 비축한 마교에 대한 경계심이 자연스레 커졌고, 강호에 화가 미치는 걸 막기 위해 나는 그 경계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정파무림의 심장.

무림맹 본단에 천마 백운상이 방문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말이다.

그것을 위해 내가 지불한 대가가 실로 막대했다.

각 분타의 통제.

향후 가용할 수 있는 예산.

주요 보직의 인사권까지.

근 몇 년간 쌓아둔 정치적 입지를 모두 소모했다고 봐도 좋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설득하고, 백운상이 거리낌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맹으로 부르는 것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컸기에 이곳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제갈경이 혀를 끌끌 찼다.

“맹주께서도 사서 고생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아쉬운 놈들이 알아서 할 일을 왜 굳이 떠맡습니까.”

“그랬다가 겁쟁이 황제놈에게 덜컥 지랄병이라도 도지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해 봐야 티도 안 나는 일을 뭣빠지게 벌이는 게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괜히 남궁호 그놈한테 구실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제갈경이 말을 멈췄다.

똑똑, 문을 두드린 누군가가 물어왔다.

“맹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시게.”

나는 답했고, 제갈경이 입모양으로만 구시렁거렸다.

‘그것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이 열렸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 부맹주이자 대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호.

나와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정확히 말하면 내 가장 큰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젊을 적에는 술도 함께 마셨지만······, 오래전 일이다.

남궁호의 누이인 남궁영령이 죽은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예를 갖춘 남궁호가 말했다.

“백운상이 곧 당도한다 합니다. 가시지요.”

“알겠네.”

짧게 답한 뒤에 집무실을 나왔다.

백운상이 맹에 머무는 동안 나는 오직 마교의 사절단을 대하는 데만 전력을 쏟아야 했고, 남궁호가 실질적인 맹의 운영을 대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새끼가 찾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

미적거리지 말고 네 할 일 하러 가라는 뜻이었다.

“거 좆같은 새끼가-”

“-성격도 참 급하군요······.”

내가 선창하자 제갈경이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남궁호가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맹주님?”

“아, 백운상 그놈 말일세. 일찍도 왔구만.”

둘러대며 걷다 보니 맹의 정문과 남궁호가 가야 할 곳의 갈림길이 나왔다.

대충 인사치레로 말했다.

“하면 수고 좀 해주시게. 무슨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게나.”

“이런 대사에 맹주께 심려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끼쳐도 되네.”

손을 흔들고 제갈경과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제갈경이 불쑥 말했다.

“맹주 내 말 새겨들으십시오.”

“뭘 말인가.”

“나는 저 건방진 새끼를 맹주라 부를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잘하란 말입니다.”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아마 일 년 안에 맹주를 새로 뽑을 것이고,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상에야 내가 또 맹주직을 해먹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이번에 일을 벌인 것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쉽게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백가 앞에서 허튼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그건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똑똑한 군사께서 알아서 판단하시게.”

답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시야가 넓게 펼쳐진 곳에는, 맹의 정예 무인 오백이 엄숙히 도열해 칼날 같은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바라봤다.

살기에 가까운 무인들의 기세가 오롯이 자신을 향함에도 마치 없는 것인 양 태연한 모습의 여인.

시천마 일월령을 제외한다면 신교 역사상 최대의 걸물이라 불리는 자.

불과 약관 나이로 천마신교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입신지경에까지 발을 디딘 무인 중의 무인.

천마 백운상이 오연히 선 채로 내게 말했다.

“오랜만이외다, 하 맹주.”

“백 교주께서도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소.”

대강 고개를 까닥이며 답한 내 시선이 백운상이 선 곳의 조금 뒤편으로 닿았다.

발갛게 상기된 뺨에 도전적인 표정을 한 여아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천지분간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은 저 애새끼는 뭐지?

의문이 드는 걸 느끼며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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