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외전/ 천마대전 ~소중한 사람~
한편 내비게이션 역할을 수행하던 유지희는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
울고 웃고, 표정과 효과음으로만 방향을 지시하다 보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가장 유치하고, 가장 추하게 싸우는 모습.
아무 일 아니라고 수습도 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
아빠에게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엄마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점에 당도해야 했다.
‘선계에서는 서로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둘 다 오늘은 혼쭐 좀 나보라지.’
신을 기망한 것에 대한 징벌이자, 향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사랑스러운 둘째 딸이 나선 것이다.
당황해할 얼굴들을 상상하는 유지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물론 겉보기에는 천사처럼 해맑은 표정이었고 유수현이 마주 웃으며 물었다.
“우리 딸 공원 빨리 갔으면 좋겠어? 아빠랑 슈우웅 날아갈까?”
“우우-! 댜다!”
“으응. 비행기 싫어요? 그러면 바이킹 타면서 가자?”
“꺄아!”
아이를 안은 양팔을 좌우로 느리게 흔들며 유수현이 걷는 속도를 줄였다.
아늑한 감각을 즐기면서 유지희가 생각했다.
‘인간 아이가 말을 배우려면 얼마나 걸리더라?’
평범하게 생각하면 내년은 되어야 할 테지만······, 너무 갑갑했다.
‘그냥 천재인 걸로 하자.’
자신은 편하고 가족들도 좋아할 테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흡족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 유지희는 멀리 공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끄읏.”
부드러운 흔들림에 맞춰 트림을 한 번 방출하고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가관이네.’
***
품이 넉넉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 백운상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곧 필생의 은인이자 대적인 차수희가 풀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얻어맞은 배가 아직도 얼얼한지 찡그린 표정이었다.
백운상이 말했다.
“이제 두 번 남았죠?”
이번 승부에서 그녀의 승리 조건은 세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
방금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으니 남은 건 두 번이었다.
차수희가 힐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그거 반칙 아니니?”
“뭐가 어때서요?”
천연덕스럽게 답한 백운상의 몸 주위로 새파란 불꽃이 산발적으로 타올랐다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강요에 못 이겨 힘을 빌려주던 성화가 조심스럽게 동조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부터라도 정정당당하게->
<난방 다 꺼두고 얼음 띄운 찬물로 한 시진 동안 목욕 당하고 싶지 않으면 입 닫고 백업이나 해. 알겠어?>
<히이익! 아, 알았어요.>
이글거리던 불꽃이 한층 더 강해졌고, 차수희는 눈가를 좁히며 그 힘을 가늠했다.
‘꽤 세졌네?’
백운상의 반경 일 미터 정도의 공간이 흐릿했다.
너무도 막강한 내력 덕분에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세마저 유형화되어 주변을 가린 것이다.
저 흐릿한 공간으로 단단한 쇳덩이를 던진다고 해도 흔적도 없이 분쇄되고 말 터.
지금의 백운상이라면 일격에 산을 무너트리고 바다에 해일을 일으키는 것조차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한 일이겠지만,
‘못 이길 정도는 아냐.’
충분히 제압 가능한 수준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두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건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혹시 나 지금 불리한 거야?’
처음 겪는 생경한 감각에 차수희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그냥, 좀 재밌어서.”
“제가 더 재밌게 해드릴게요.”
백운상이 걸었고, 굳이 접근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차수희는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이 유쾌했는지 백운상이 노래하듯이 말을 건넸다.
“조사님 지금 어떤 기분?”
“응?”
“나한테 하무린의 처음도, ‘오빠’의 처음도 뺏겨서······, 지금 어떤 기분이시냐구요!”
콰아앙!
순간적으로 차수희에게 당도한 백운상이 손바닥을 세워 휘둘렀다.
차수희도 손을 들어 방어했지만 몸이 뒤로 밀려났다.
맞부딪쳐 해소되지 못한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거기 닿은 나무들과 가로등이 마치 없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어진 백운상의 공격.
목과 복부. 허벅지에서 다시 얼굴.
분노한 차수희가 외쳤다.
“얼굴 때리는 게 어딨니!”
“그러게 조금 이쁘다고 누가 잘난 척하랬어요? 외모가 다가 아니라고!”
원한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목소리로 백운상이 이어 말했다.
“내가! 하무린이랑! 비무도 하고! 협상도 하고! 잠도 자고! 다 했어!”
“그래봐야 몇 번 안 했잖아? 오빠는 기억도 안 날걸?”
“까불지 마요! 당신 같으면 자기 집무실에서 몰래 한 걸 까먹겠어!?”
투웅.
파아앙!
무겁고 가벼운 타격음이 동시에 들렸다.
고통스러워하며 배를 감싸쥔 백운상이 털썩 쓰러졌고, 어깨를 매만지는 차수희는 비교적 멀쩡히 선 채였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복부를 얻어맞은 충격에 더해 성화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반동까지 온 백운상이 입가로 피를 흘리며, 환희에 젖어 말했다.
“두 번······, 맞죠?”
얼굴을 굳힌 차수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집무실?”
“아름다운 밤이었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백운상을 향해 차수희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 더하다가는 진짜 다칠 수도 있어.”
“쫄리면 뒈지시든가.”
“정말로 피를 봐야겠다 이 말이지?”
“이미 보고 있는데 뭔 소리야!”
다시 달려들었지만 조금 전과 비할 수도 없이 기세가 약했다.
가볍게 발을 굴러 공격권에서 벗어난 차수희가 손을 휘저었고, 불어온 바람이 백운상을 감싸며 속박했다.
“이거 놔요!”
“싫은데?”
짧게 답한 차수희가 되뇌었다.
“흐응. 집무실? 집무실······.”
“왜요. 부러워서 그래요?”
“아니?”
단조롭게 부정한 차수희가 말을 이었고, 흉악하기 그지없는 수위에 경악한 백운상이 외쳤다.
“지금 무슨 말하는 거예요!?”
“운상이 네가 말하길래 나도 말한 건데 왜? 혹시 너한테는 너무 벅찼나?”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때리기는 왜 때리고 맞기는 왜 맞는데? 아프잖아!”
“안 아픈데?”
“묶는 건 또 뭔데!”
“음······, 좋으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차수희를 향해 백운상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또 뭐라고? 맛? 식인종이야!? 둘이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사는 거냐고! 이 음탕한 인간!”
“에이. 오빠랑 나랑 둘 다 좋으니까 서로 그런 말도 하는 거지.”
“당신이 꼬드긴 거잖아!”
“꼬드기는 것도 능력이 되니까 하는 거 아닐까?”
“갸아아악-!”
파싯거리는 스파크가 튀며 주변에 그나마 성하던 것들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간신히 속박에서 벗어난 백운상이 쿨럭거리며 피 섞인 기침을 했다.
검지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당신 같이 음란한 사람이랑만 있으면 하무린한테 좋을 게 없어! 내가 정화해 줄 거야!”
“너처럼 재미없는 애랑 있으면 오빠가 엄청 심심해할 것 같은데?”
추하디추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또한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아마 이번이 마지막.’
‘방심하지만 않으면 이길 것 같은데. 운상이 안 다치게 하려면······.’
먼저 움직인 것은 백운상이었다.
가용할 수 있는 힘을 모조리 동원해 발을 굴렀다.
십이성 극성의 천마군림보.
폐허가 된 땅이 종잇장처럼 갈라졌고, 땅을 가르며 뻗어나간 기세가 차수희를 노렸다.
차수희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둔해지는 것을 본 백운상이 온몸을 푸르게 빛내며 쇄도했다.
잔기술 같은 건 통하지 않을 터였다.
일격의 승부로 끝을 낸다.
‘싸움은 져도 상관없어. 한 대만 때리면 돼!’
염원을 담아 백운상이 주먹을 내질렀고, 차수희는 양손을 모아 방어태세를 갖췄다.
피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곧바로 반격이 들어올 테고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다. 받아내고 기절시키는 게 최선.
그리고 마침내 격돌하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뭐해!”
‘오빠?’
유지희를 품에 안은 유수현의 모습이 보였다.
차수희의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공원에 쳐둔 결계에 감지되지 않고 들어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한데.
한 발만 들이더라도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바에야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생각. 혹은 판단.
이것이 중요했다.
이미 백운상은 기진맥진한 데다 입가로 피까지 흘리고 있는 반면에 자신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나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려나?’
그건 그다지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었다.
차수희는 방어자세를 취하던 손을 슬쩍 풀었다.
백운상 역시도 유수현의 등장을 눈치챘지만 본신의 내력에 더해 성화의 힘까지 빌려 전력을 다하고 있던 공격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
황망한 표정을 한 백운상을 향해 차수희가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푸른빛을 뿜은 주먹이 방어를 뚫어냈고, 차수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
“언니 또 나가?”
호텔 카드키를 들고 현관문을 여는 이수민을 향해 유지현이 물었다.
“으응. 잠깐 바람 쐬려고.”
“거짓말하지 마! 담배 피고 올 거잖아. 냄새 맡으면 다 아는데. 어제부터 몇 번을 들락거린 줄 알아? 왜 입에도 안 대던 걸 갑자기 피고 그러는데!”
걱정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 이수민이 난처한 듯이 말을 돌렸다.
“음료수 사올까?”
“필요 없어!”
문이 쾅 닫혔고, 이수민은 한숨을 쉬며 바깥으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삼십 분마다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한 흡연장소.
이제는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고, 탁한 연기를 흘려보내며 읊조렸다.
“후우. 지현이는 이런 거 피지 마······.”
스스로가 한 말이 우스워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긴 유지현이 고민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김살 없이 밝게 자랐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내가 그럴 수 있도록 해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지현이한테 가장 고민거리는 나네.’
어제 유지현이 말했다.
이수민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이 세상에서 이수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고.
아직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밝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고. 그 미소를 잃고 싶지 않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명확한 건 아마 그거겠지.’
속으로 되뇌인 이수민이 허공을 올려다봤다.
어스름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잠시 고개를 올린 채로 서 있던 이수민은 다 펴서 필터만 남은 담배를 끄고, 숨을 크게 내쉰 뒤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유지현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현아?”
“언니 미안······.”
“응?”
되묻는 것에 대답하지 않고 유지현이 이수민에게 안겼다.
이수민이 당황하며 말했다.
“지현아. 담배 냄새 날 텐데-”
“괜찮아. 그리구 아까 화내서 미안해.”
품에 안긴 유지현이 고개를 살짝 들여 눈을 마주했다.
“담배, 어제 내가 말한 것 때문에 그런 거지? 나도 사실 아는데, 언니 담배 같은 거 피니까 괜히 화풀이한 거야. 나 때문인데. 미안해······.”
슬쩍 물기가 번진 그 눈동자에 이수민은 한 번 더 결심을 굳혔다.
유지현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아냐. 지현이 한 말이 다 맞는데 뭘.”
포옹을 풀고 두 사람이 침대로 가서 앉았다.
이수민이 말을 이었다.
“정말로 언니 생각해주는 사람이 지현이라는 거 알고 있는데, 그러면 언니도 지현이 소중하게 대해줘야 하는데 고민 같은 거 하게 만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수민 언니······.”
“분명히 말할게. 언니 세상에서 지현이 제일 좋아해.”
유지현이 고개를 떨궜고 이수민은 그 이유를 알았다.
‘우리 아빠보다?’ 라는 생각이 혹시라도 표정에 나와서 이수민을 힘들게 할까봐.
그러니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자신이 먼저 말해주어야 했다.
“지현이 아버지. 유수현 씨보다 더 좋아해.”
“거짓말. 또 놀다가 한숨 쉬고, 갑자기 울고 그럴 거잖아.”
“아냐아. 이제 안 그래.”
이수민의 몸이 살짝 떨렸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 왜 좋아하겠어. 힘 세고, 사람 속이는 거 잘하구, 생긴 거랑 안 어울리는 이상한 개그나 치고, 웃기지도 않는 말투나 쓰고, 가족은 끔찍하게 아껴주고, 가끔씩은 따뜻한 말도 할 줄 알아서 괜히 기대하게 만들기나 하고, 멋있고,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다정하고, 사실은 속이 깊어서······.”
나직하지만 굳건했던 목소리가 점차 떨리더니 결국에는 흐느낌이 되었다.
눈물에 흐릿한 시선으로 유지현의 얼굴이 보였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이수민이 외쳤다.
“그, 그런 사람보다 지현이가 더 좋아! 왜냐면, 왜냐면-”
유지현이 조용히 손을 뻗었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이수민의 머리칼을 쓸어내려줬다.
이수민이 여전히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 안 좋아할 거야. 내가,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돼? 다 필요 없어. 지현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이렇게 여행도 오고, 언니는 그러기만 하면······. 으흑, 흐으윽.”
그리고 유지현이 이수민을 꼭 끌어안았다.
아까 이수민이 해줬던 것처럼 등을 쓸어 내려주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응. 언니 괜찮아. 괜찮아요.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나 계속 언니 옆에 있을 거니까.”
“흐윽, 흑.”
유지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이수민은 계속 흐느꼈고, 그래서 볼 수 없었다.
조용히 미소 띤 제자의 얼굴을.
‘일단은······, 이 정도만 해둘까?’
유지현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