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외전/ 천마대전 ~유치한 공방~
***
2월 13일, 오전 7시 10분.
아침에 일어나 보니 화장대 앞에서 애 엄마와 백운상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고데기랑 헤어 드라이어도 꺼내어져 있고, 여러 가지 화장품들도 방금까지 쓰고 있던 것 같았다.
“운상이 이렇게 화장하니까 너무 이쁘다. 원래부터 겨울 쿨톤이라고 생각했거든. 아, 오빠 잘 잤어? 운상이 봐. 엄청 이쁘지?”
“조사님이 저보다 훨씬 예쁘신대요. 하가야, 그렇지 않니?”
서로를 추켜세우면서도 눈빛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쟤보다 내가 낫지? 빨리 그렇다고 말해! 라는 느낌이랄까.
나는 난처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때는 둘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이쁜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
“조사님. 이번에는 제가 조사님 한 번 꾸며드려 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응. 나야 고맙지.”
그러더니 다시 화장대로 가버리더니 하하호호 웃음을 짓는다.
······수상해.
몹시 수상하다.
분명 자연스러운 모습인 건 사실이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은근히 경쟁하는 상황.
어제 안방에서 나갈 때 내가 유도한 것과 일치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사람이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 이대로 순조롭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백운상이 건넨 말에 내 신경이 다시 곤두섰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
“어디 가는데?”
“거주 관련해서 처리할 서류가 있어서 말이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이 백운상이 손에 든 종이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라 아마 끝나고 오면 7시는 될 것 같구나. 늦어지면 연락할 테니 저녁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거라. 그러면 조사님, 저 다녀올게요.”
“응.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메시지 보내?”
“알겠어요.”
옷을 챙겨입은 백운상이 집을 나섰다.
문 쪽을 보고 있자니 애 엄마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오빠 왜?”
“으응, 별 생각 안 했어.”
둘이 나 모르게 밖에 나가서 대차게 한 판 붙으려고 저러나, 생각했다고는 말 못하지.
하지만 결코 긴장의 끈은 늦추지 않고 있었던 나는 오후 5시 45분쯤 애 엄마가 장을 봐오겠다고 말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나도 같이 갈까? 지희 데리고.”
“지희 지금 엄청 잘 자고 있는데 데리고 나가면 괜히 잠 깨우겠다.”
애 엄마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었고, 그 말대로 한 시간 정도 전부터 우리 둘째 딸이 아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오빠 그냥 쉬고 있어. 금방 올게.”
애 엄마까지 집을 나섰고 집에는 나와 지희 둘만이 남았다.
“······.”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애 엄마를 따라나서서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혹은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애 엄마도 백운상도 정말로 자기 할 일을 하러 나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켰을 때.
낮잠을 자던 지희가 잠에서 깨어났고, 온 집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
2월 13일, 오후 6시 10분.
차수희는 집에서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공원에 발을 들였다.
겨울이기도 했고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으니 오다니는 사람이 적은 건 이해할 만하지만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없는 장소인 것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공원 중심부의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홀짝이던 백운상이 차수희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늦으셨네요?”
“미안, 오빠가 긴가민가하는 것 같아서 시간이 좀 걸렸어.”
“괜찮아요. 들킨 건 아니죠?”
“오래 끌수록 리스크가 있겠지만 별 일 없을 거야.”
입고 있던 외투를 근처의 벤치 위에 올려두면서 차수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마주 선 백운상은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양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차례 반복한 백운상이 응수했다.
“자신 있으신가 봐요?”
“물론. 그러면 자신이 없겠니? 운상아, 이게 마지막 경고야. 지금이라도 네가 두 번째라고 인정하면 봐줄게. 어때?”
하지만 제안에는 답하지 않고 백운상이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흔들었다.
“조사님 이게 뭔지 알아요?”
“커피 캔?”
백운상이 웃었다.
“작년 봄 기억나시죠? 제가 아직 절반만 기억하고 있었을 때. 그때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잖아요?”
나탈리야로서 한국에 오고, 아직 백운상으로서의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던 때.
유수현의 소꿉친구 차수희의 기억까지만 각성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왜?”
“그때야 제가 뭘 잘 몰랐으니까 조사님을 엄청 많이 미워했거든요.”
“응, 그랬겠지······.”
차수희의 목소리에 죄책감이 서리는 걸 보고 백운상이 여유롭게 손을 내저었다.
“조사님이 미안해 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사실은 그때······, 제가 ‘수현 오빠’ 꼬시려고 했거든요.”
“뭐?”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혹시 잘 안 될 수도 있잖아요? 만약에 그렇게 되면 조사님은 머얼리 보내버리고 이 몸으로 잘 살아봐야 하니까 미리부터 밑작업을 좀 해뒀죠.”
“······.”
“러시아에서 와서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어린애인 척하면서 눈물도 좀 흘려주고, 제 어깨에 손도 닿고. 공원에서 같이 캔 커피도 마셨고요. 그게 이거예요. 지금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차수희의 표정이 굳어지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조금만 더 흔들면 되겠다고 생각한 백운상이 이어 말했다.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대로 갔어도 어쩌면 조사님한테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적인 느낌? 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한데······, 어때요?”
백운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살짝 올린 차수희를 바라보며 판단을 다시 했다.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라고.
차수희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글쎄? 눈물 연기나 조금 늘지 않았을까 싶은데? 우는 척하면서 어깨에 손 좀 닿아야 하잖아. 아, 캔 커피도 지금보다 많이 마셨을 거고. 그것 말고는 딱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응. 지금도 나한테 안 되는데 그때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아? 일단-”
차수희가 담담한 어조로, 사실을 선고하듯이 선언했다.
“너 나보다 못생겼잖아.”
“뭐가 어쩌고 어째!?”
바닥을 박차며 백운상이 달려들었다.
강기를 두텁게 모은 손을 차수희에게 휘둘렀다. 그러면서 거세게 외쳤다.
“그거 원래 내 몸이었잖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릴 때랑 지금이랑 같니?”
여유롭게 피하며 차수희가 이어 말했다.
“그때는 오빠 옆에 있으면 처지는 느낌 들었잖아? 나도 기억 있으니까 괜히 부정할 생각하지 말구. 근데······, 지금은 완전 잘 어울리지. 그치?”
“웃기지 마요!”
백운상이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사실이긴 했다.
스무 살 이전과 지금의 차수희는 인상이 많이 달랐다.
도리어 선계에서 지냈던 일월령이 지금과 더 많이 닮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일월령의 환생으로 예정되어 있던 존재이니까.
그러니 백운상이 ‘원래 내 몸이었다’라고 주장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다.
그걸 차수희도 알고 있었고, 백운상 스스로도 사실은 안다.
‘그래도 열 받잖아!’
“당신 삼십대잖아! 주름이나 신경쓰지 그래?”
“어머, 나 안 늙는데? 혹시 운상이는 서른 살 넘으면 늙니? 아이 참. 너무 슬프다.”
“무공 고수는 안 늙어!”
“응. 백 년을 더 살아도 내가 더 예뻐.”
“가슴은 내가 더 커!”
“응. 내가 모양 더 이뻐. 피부도 내가 더 좋아.”
“다리는 내가 더 길거든!?”
“나 황금비율인데? 그리고 하체 라인 내가 더 좋아.”
“닥쳐요!”
슈우웅.
백운상이 내지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음속을 훌쩍 넘어선 속도에 뒤늦게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공격을 받아낸 차수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운상아 인정해. 너, 나보다 못생겼어.”
“······.”
충격을 받았는지 백운상이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푹 떨궜다.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에 차수희는 마음속으로 조금 반성했다.
‘말이 너무 심했나?’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차수희가 한 발자국 다가간 때였다.
백운상에게서 작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어쩌라는 게 아니라-”
“······나예요.”
“응?”
“하가랑 처음 한 건 나라고!”
“너 진짜······.”
이 말에는 차수희도 충격을 받았다.
물론 사실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백운상의 처음’ 혹은 ‘소꿉친구 차수희의 처음’과,
‘하무린의 처음’ 혹은 ‘유수현의 처음’은 받는 느낌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차수희가 잠시 주춤한 순간.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백운상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지금이야.’
콰아앙-!
백운상이 다시 한 번 땅을 박찼고, 차수희가 흠칫 놀랐다.
‘빨라?’
명백히 상정하고 있던 것을 넘어선 속도였다.
백운상이 뭐라고 외치며 주먹을 휘둘렀고, 이번에는 방어하지 못했다.
일권이 직격으로 들어가며 퍼엉, 하는 충격파가 터졌다.
배를 얻어맞은 차수희가 공중으로 날았다.
음속을 넘어선 싸움이었기에 백운상의 외침은 그 이후에야 들렸다.
“하무린의 처음을 가져간 내 주먹 맛이 어떠냐! 이 썩을 도둑고양이!”
주먹을 불끈 쥔 백운상의 몸 주위로 새파란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
“우리 딸 왜 그래?”
품에 안고 있는 지희가 잠시 표정을 미묘하게 짓는 것 같길래 물었다.
물론 갓난아기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는 없고, 지희가 다시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으응. 여기가 아냐? 다른 데로 갈까?”
그렇게 말하며 초록불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니 그제서야 지희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웃는다.
“꺄아! 우우, 꺄!”
웃으니까 좋기는 한데······, 이걸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모르겠네.
아까 여섯 시쯤 애가 잠에서 깼고, 깨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아무리 달래도 그칠 생각을 안 해서 집 밖으로 나온 건데 뭐랄까······.
평소와는 좀 달랐다.
갈래길이 나오거나 횡단보도가 나올 때.
어느 쪽으로 가려고 하면 울고, 길을 돌아와서 다른 쪽으로 가면 그친다고 해야 하나?
꼭 자동차 네비게이션에서 ‘정해진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고 지희가 안 우는 곳을 따라서 걷다 보니 거의 와 본 적도 없는 동네에 와 있었다.
애 엄마랑 백운상은 언제 집에 들어올지 전화도 해 봐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지희 달래는 데 신경을 쏟아야 해서 그럴 틈도 없었다.
“우리 공주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저기?”
“우우!”
“아니면 저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저기 공원으로 갈까?”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은 공원 쪽을 보며 말했다.
곧바로 지희가 환하게 웃었다.
“아부우! 바아!”
“오구, 그러면 우리 공주님. 공원 가서 소나무 아저씨들한테 인사하고 오자?”
“꺄아!”
기뻐하며 팔다리를 힘차게 움직이는 지희를 품에 안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