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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19화 (119/130)

119. 외전/ 천마대전 ~약속의 내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해서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지.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줄곧 실패만 해왔으니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모아둔 재산이나 사회적인 명성, 인스타 팔로워 수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이미 넘칠 만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만은 마음대로 가질 수가 없었다.

그건 힘으로 윽박질러서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이수민은 스스로를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그간 겪어온 실패의 기억을 되짚을수록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후우······.”

폐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한숨에 유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아파?”

“어······, 으응?”

“너무 세냐구. 아프면 살살할까?”

양손에 힘을 꾹꾹 주면서 이수민의 어깨를 주무르던 유지현이 재차 물었다.

이수민이 서둘러 고개를 도리질하며 답했다.

“아냐. 괜찮아, 지금이 딱 좋아.”

“그래······? 아프면 참지 말구 말해?”

애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한 유지현이 다시 안마를 이어갔다.

손길의 끈적함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느끼며 이수민은 속으로 절규했다.

‘안 아프다고 했잖아! 이거 안마 아니잖아!’

질척, 끈적, 후끈.

그런 단어들이 꼭 알맞는 손놀림이었다.

천장의 조명을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이수민이 다시금 생각했다.

‘왜 난 행복할 수가 없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유수현과 친밀한 관계가 되고, 유지현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유수현과의 관계는 더 이상 자력으로 되돌리기 힘들 만큼 파탄이 나버렸고 사랑하는 제자는 상당히 왜곡된 방향으로 사부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기실 유지현이 독점욕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벌써 작년부터의 일이다.

계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리라.

이수민의 집 가장 안쪽 방.

온갖 피규어와 그림, 글귀들이 잠자고 있는 비밀의 방만 해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이 또한 유지현이 쉬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터.

게다가 작년 5월.

비록 풀떼기가 활활 타서 재가 된 것처럼 멘탈이 바스라진 상태에서 벌인 일이기는 하나 이수민이 먼저 유지현에게 큰 잘못을 저지를 뻔하기까지 했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알게 모르게 유지현의 순수한 마음이 왜곡됐을 것이다.

사부님이 마음고생하는 걸 지켜보는 건 싫으니 차라리 자신이 이수민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자고.

‘그러니까 이건 다 내 업보일지도 몰라······.’

이번 여행에서 벌어질 일들도 오기 전부터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행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지난 나흘 동안 충분히 즐거웠다.

해가 뜨는 바닷가를 걷기도 하고, 넘치는 게 돈이고 일정 또한 여유로웠으니 맛있다고 소문 난 건 찾아다니면서 먹었다.

후에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사진도 만족할 만큼 찍었다.

유수현과 차수희에게 댈 정도는 아니지만 젖살이 빠지면서 요즘 유지현은 날이 갈수록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함께 셀카를 찍으니 숫제 강원도 바다의 오징어가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조차도 이수민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문제는 하루 일정을 마친 이후였다.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숙소를 잡은 덕분에 방도 여러 개였고 두 명이 누워도 공간이 넉넉하게 남는 침대가 네 개나 됐다.

한데도 유지현은 굳이 한 침대에서 잘 것을 강력하게 고집했다.

그래, 거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

전생에는 사부와 제자였고 현생에는 절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는데 커플 파자마를 입고 한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게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하지만 스킨십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첫날은 그래도 얌전한 축이었다.

손을 잡고, 구체적으로는 손깍지를 끼고 자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야 허용범위였다.

하지만 둘째날.

팔베개를 해달라고 하고는 꼭 끌어안겨 잠이 들었을 때는······.

그건······, 그건 좀 그랬다.

셋째날은 아예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유지현은 둘째날에 진전된 스킨십을 그대로 유지했고 하루종일 이수민과 찰싹 붙어 있었다.

추억 얘기를 나누거나, 베개 싸움 같은 걸 하기도 했고, 서로 간지럼을 태우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수민이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그 위에 유지현이 올라타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랑하는 제자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추운 겨울인데도 이수민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언니 운전한다고 힘들었지?”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어깨 많이 뭉쳤단 말야.”

주물럭, 주물럭.

묘한 감각과 함께 이수민이 이를 악물었다.

입신지경의 고수가 운전 조금 했다고 어깨가 뭉칠 리가 없다. 심지어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

‘근데 무슨 안마를 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피로감이 있는지 없는지와 관계 없이 제자가 사부에게 안마를 해주고 싶다는데.

명분상으로는 완벽했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유지현이 말해왔다.

“수민 언니.”

“으, 으응?”

“근데 있잖아. 옆에서 하니까 나 좀 불편해.”

“부, 불편해? 그러면 그만하구-”

“내가 위에 올라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질문이 아닌 통보이자 선언이었다.

몸을 살짝 일으킨 유지현이 이수민의 배를 깔고 앉았다.

마운트 포지션이랄까.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닿는 자세였다.

유지현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편하겠다. 계속할게?”

차마 제자를 바라볼 수 없던 이수민이 조금 전처럼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천장의 조명마저도 가려져서 어두컴컴했다. 마치 그녀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큰일이야. 이대로 가면······.’

입에 담기도 두려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지현의 손길이 어깨에서 쇄골을 지나 마침내 가슴께까지 닿으려던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수민이 다급히 외쳤다.

“지현아 잠깐만!”

“응?”

유지현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물었고, 이수민은 짧고 간결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이러면 안 돼! 난 스승이고, 지현이는 제자니까!”

“······뭐?”

제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이수민이 계속해서 외쳤다.

“물론 지현이랑 나랑 워낙 친하니까 헷갈릴 수도 있어! 그래도 우리가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지현이 많이 좋아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냐!”

“저기 있잖아. 그런 식이라는 게 뭔데······?”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돌이키는 것보다는 확실히 정리하는 게 나으리라.

입술을 질끈 깨문 이수민이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로 나온 사진 한 장을 유지현에게 보여줬다.

“이거!”

유지현이 휴대전화를 받아들고 사진을 확인했다.

흰색의 어여쁜 꽃 사진이었다.

“백합?”

“왜, 그, 있잖아······. 여자랑, 여자랑······.”

“······.”

이어진 십여 초간의 침묵.

그제서야 뭔가 잘못 짚은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 이수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유지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민 언니 혹시 주화입마 걸렸어······?”

한 시간 후.

이수민은 홀로 밖에 나와 있었다. 잘 꾸며진 정원으로 불빛이 흘러들어와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난생 처음으로 구입한 담배와 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

“······.”

잠시 동안 손에 든 담배갑을 바라본 이수민이 떨리는 손으로 포장 비닐을 뜯어냈다.

한 개피를 입에 물었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후웁- 콜록, 콜록!”

담배 연기와 기침이 함께 새어나왔다.

이수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크읍, 진짜 이런 걸 왜 피는 거야······.”

하지만 말한 것과는 달리 다시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조금 전 유지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내가 수민 언니 좋아한다구? 그으, 언니가 우리 아빠 좋아하는 것처럼?’

‘아니었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수민은 스스로가 생각한 근거들을 하나하나 말했고 그 모두가 간단히 논파되고 말았다.

‘손 잡는 건 언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까 됐구, 팔베개는 옛날에 나 어릴 때 언니가 해주던 거 생각나서 하자고 했던 건데. 그리고 안마는······, 이건 진짜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나는 언니 피곤할 것 같아서 해주려고 했던 건데 언니는 나한테 그런 생각했던 거야······?’

한심함, 어쩌면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곡해한 사부에 대한 실망감까지 비치는 눈빛.

이 시점에서 이미 따져 물을 전의를 상실한 이수민은 침대 위에서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지현아 미안해! 언니가 사상이 불순하다 보니까 괜히 지현이한테까지 이상한 생각했나봐! 진짜 미안-’

‘아냐. 괜찮아. 그런 건 괜찮구, 언니가 방금 말한 것들 중에서 맞는 것도 있으니까.’

‘맞는 거······?’

팔짱을 끼고 표정을 굳힌 유지현이 말했다.

‘언니 마음고생하는 거 싫어.’

‘······.’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랑 재밌는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할게.’

‘뭐, 뭐를?’

‘우리 아빠 포기하라는 말은 안 해. 근데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이 세상에서 수민 언니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그런 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여행 끝나고 서울 갈 때까지.’

오늘이 2월 12일이고 서울로 돌아가는 건 14일 오전 중이었으니 사실상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하루뿐이었다.

사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곡해당해 단단히 화가 난 유지현을 만족시킬 만한 답을 들려주려면······.

이수민은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차가운 밤 공기에 연기가 휘날렸지만 마음속으로 품은 고민은 연기처럼 쉬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

널찍한 침대에 이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가져와도 부족할 것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두 명의 여성이 함께 누워 있었다.

한 명은 십대 후반 정도의 외견을 가졌고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우수가 스쳐가는 듯했다.

다른 한 명은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었고 얼굴에 자연스러운 생기가 넘쳤다.

바로 백운상과 차수희였다.

원망 어린 눈길로 서로를 흘낏흘낏 보던 두 사람에게서 이따금 말이 흘러나왔다.

“도둑고양이.”

“뭐래?”

“굴러온 돌.”

“밀려난 박힌 돌.”

“선계에서 하가 이야기 캐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야-옹.”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두 사람 사이로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런 상태로 십 분 정도가 더 지나고 백운상이 대뜸 말했다.

“조사님.”

“왜 그래?”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백운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우리 비무해요, 비무.”

“비무?”

차수희가 알기로 비무라고 하면 대련이나 스파링과 비슷한 뜻이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거 있잖아. 너무 화가 나서 합법적으로 나를 때리고 싶다는 말이지?”

“잘 아시네요?”

백운상이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운상아. 내가 이런 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아무리 백운상이 신화경에 이르러 등선까지 한 무인이라고 하나 다음대의 신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차수희에게 맞서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두 사람이 가진 힘의 격차는 이미 일전에 공원에서의 싸움으로 입증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백운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로는 질 걸 알더라도 부딪쳐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

“대신 조사님은 신교의 개파조사씩이나 되시는 위대한 분이시니까-”

잠시 말을 멈춘 백운상이 오른손의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세 번. 세 번만 조사님한테 공격이 닿으면 제가 이기는 걸로 해요. 제가 이기면 13일 밤부터 14일 아침까지 제 거. 그리고-”

“내가 이기면 이번 발렌타인 데이랑, 한 달 후에 화이트 데이는 내 거. 그걸로 괜찮지?”

차수희가 싱긋 웃으면서 제안했고 백운상은 두말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러면 그런 걸로 하구 일단은 오빠한테는 좋은 모습 보여주자.”

“‘자연스럽게’ 말이죠?”

“응.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방을 나섰다.

거실의 쇼파에 누운 유수현이 쪼그려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두 사람이 유수현을 불렀다.

“오빠······.”

“······하가야.”

유수현이 눈을 살짝 떴고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화해한 거야?”

“응. 내가 잘못했어. 오빠 미안해? 운상이한테도.”

“조사님 아니에요. 제가 괜히 못되게 군 거예요.”

서로 자신을 탓한 두 사람이 유수현을 일으켜 세웠다.

유수현은 아직 의문스러운 눈초리였지만 전직 천마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했다.

적당히 미안해하고 유수현의 기분을 살피면서 또 적당히 서로에 대한 견제와 유수현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아무런 앙금없이 화해했다고 하면 오히려 믿지 않을 테니까.

요람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유지희도 안방으로 데려오고 세 사람이 다시 한 침대에 누웠다.

“나도 괜히 화내서 미안해.”

먼저 말을 꺼낸 유수현을 시작으로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의 탓을 했다.

그러다 상황이 웃긴 듯해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물론 그런 와중에도 차수희와 백운상은 시선을 교환했다.

‘언제 할래?’

‘내일 저녁이요. 후시딘이랑 파스 준비해 둘게요.’

‘운상이 네가 쓰려구?’

‘그럴 리가요.’

전의를 끌어올리며 두 사람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현직 선계의 신이자 집안의 귀염둥이 유지희는 아늑한 요람에 누워 침대로 시선을 보냈다.

엄마와 엄마는 잠이 들었고, 그 중간에 누운 아빠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족한 마음에 허공으로 팔을 휘적이며 유지희는 생각했다.

‘어림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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