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외전/ 천마대전 ~승부의 방식~
2월 9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집을 나선 이수민은 주차해 둔 차에 몸을 기댄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인데도 검정색 가죽자켓 하나만 걸친 패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마다 그녀를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가는가 하면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저 사람 이수민 맞지?”
“아닌 거 같은데. 사진이랑 좀 다르지 않나?”
사진발이 무척 잘 받는 데다 섬세한 손끝의 감각을 살린 보정 기술까지 경지에 이른 전직 천마 이수민이 중얼거렸다.
“어쩌라고요······.”
사진발이 잘 받는 것도, 보정을 잘하는 것도 엄연히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꼬우면 자기들도 하면 될 것 아닌가.
이수민은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다.
적어도 인스타 안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물론 사진이 아무리 잘 나온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언니 이 사진 진짜 이쁘다’라고 감탄하던 유지현의 미소만은 거짓이 아니니까.
그녀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근데 이수민 요새 뭐하고 산대?”
“인스타 보니까 걔 있잖아, 유지현. 걔랑 맨날 놀러 다니던데?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을 텐데 알아서 잘 살겠지.”
예리한 청각으로 대화 내용을 잡아낸 이수민이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맞아. 나는 잘 살고 있어. 충분히 행복해.’
멀찍이서 걸어오는 커플의 대화도 들렸다.
“저 사람 어떡해? 진짜 추워보인다. 나 이렇게 입어도 추운데.”
“자기 추워? 일로 와.”
“아이, 길에서 왜 그래애.”
서로를 꼭 끌어안다시피 한 커플이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륵, 꺄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이수민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양손 모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는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후우······.”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건 절대 정신승리 같은 게 아니다. 그녀는 실제로 행복했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평소보다 더 즐거운 날이었다. 왜냐하면-
“언니!”
때마침 들린 목소리에 이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두툼한 롱패딩을 입은 유지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현이 왔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유지현이 그대로 품에 안겨 왔다.
이수민의 목 근처에 뺨을 부비다가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히히. 언니 보고 싶었어.”
“어제도 봤는데?”
“어제랑 오늘이랑 다른 날이잖아. 언니는 나 안 보고 싶었나봐?”
약간 토라진 말투에 이수민이 서둘러 답했다.
“으응. 언니도 지현이 보고 싶었지.”
“그치?”
배시시 웃은 유지현이 자연스럽게 이수민의 손을 잡아 손깍지를 꼈다.
“근데 언니 왜 이렇게 춥게 입었어. 빨리 가자. 강원도 가는 데 얼마나 걸리지?”
“세 시간 조금 안 걸릴 거야.”
그랬다. 두 사람은 오늘 2월 9일부터 14일까지 강원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먼저 제안을 한 사람은 이수민이었고, 유지현도 뛸 듯이 기뻐하며 승낙한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즉흥적으로 계획된 일이었다.
“······.”
“언니 무슨 생각해요?”
유지현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흠칫 놀란 이수민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날아서 가는 게 더 좋았으려나 싶어서.”
“그러면 그럴까? 언니 운전하게 하는 거도 미안하구.”
“으응. 그냥 장난으로 말한 거야. 어서 가자.”
그리고 천마 두 사람이 함께 차에 탔다.
유지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기분 엄청 좋다? 여행 가는 거도 좋구, 언니랑 같이 가니까 좋구.”
“언니도 그래.”
“진짜?”
“응······.”
아주 살짝 말끝을 흐린 대답.
하지만 기분이 들뜬 유지현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이수민은 마음속으로나마 사과했다.
‘지현아, 미안해······.’
물론 여행을 가게 되어 기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이수민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찾아왔던 사부 백운상. 현생에서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다시 나탈리야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인데 당혹스러운 명까지 내린 것이다.
<천군아.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구나.>
<네?>
<지현이랑 여행 좀 다녀오거라. 가능한 빨리······, 그래. 당장 날이 밝자마자 가서 발렌타인 데이가 끝나고 돌아오면 된단다.>
<다녀오라시면 말씀에 따르겠지만 대체 왜······.>
이수민이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묻자 백운상이 씨익 웃었다.
<이 몸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조사님 기강을 한 번 다져야 하지 않겠니? 한데 지현이와 함께 있으면 내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유수현에게 질척거려서 넘버원 자리를 가져가고 싶은데 그동안 유지현을 잠시 맡아달라는 뜻이었다.
이 순간, 이수민은 오래도록 쌓아온 사부에 대한 존경심을 조금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백운상이 물었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만약 일이 잘 되면······.>
잠깐 여유를 두었다가 백운상이 말을 이었다.
<네게도 섭섭지 않게 신경을 써주겠다.>
그 말이 이수민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이미 파탄지경인 하무린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도록 힘을 써주겠다고.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왜 아니겠니. 나는 조사님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란다.>
이수민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불초제자는 사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물론 백운상은, 구체적인 약속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과 일월령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끼어들게 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태산 같던 이수민은 백운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지금 이렇게 유지현과 함께 강원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사랑을 위해서 사랑하는 제자를 속인다니.
이 모순적인 상황에 죄책감이 들었다.
게다가······.
“언니, 6박 7일이니까 엄청 시간 많잖아?”
“그렇지?”
“그러면 사흘 정도는 밖에 돌아다니면서 놀구 나머지 사흘은 편하게 숙소에서 쉬는 거 어때?”
“······숙소에만?”
“응. 되도록이면 침대 밖으로 나가지 말구······, 언니랑 나랑 둘이서.”
해석하기에 따라서 묘한 늬앙스가 될 수 있는 말.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던 이수민은 그저 침묵했고,
탁 트인 도로를 따라 붉은 스포츠카가 거침없이 달렸다.
***
기쁘면서도 청천벽력 같은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알게 된 건 여행 다녀온다는 지현이를 배웅한 직후였다.
나는 지희를 품에 안고 거실 쇼파에 앉아 있는 상태였고 두 사람이 포위하듯이 내 양옆에 앉았다.
한 명은 애 엄마.
다른 한 명은 나탈리야의 모습을 한 백운상.
그러니까.
이제 두 사람이었고, 둘 다 활짝 미소를 띠며 말한다.
“오빠. 이제 셋이서 행복하게 살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하가야.”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하. 그러자. 두 사람 다 고마워.”
“아냐, 내가 고맙지.”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다 조사님 덕분이죠.”
아주 화기애애한 장면이었고 나는 감회에 젖어 생각했다.
이 인간들이 전직 무림맹주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라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결코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내가 봐온 게 있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그게 가려지겠나. 말도 안 되지.
“오빠, 운상아. 아침 차려올 테니까 잠시만?”
“아, 제가 할게요”
“으응. 이제 우리 집 ‘손님’인데 내가 해야지.”
“에이, 저희가 ‘그런 걸로’ 따질 관계는 아니잖아요? 제가 할 테니 쉬고 계세요.”
서로 더없이 상냥한 어조였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다.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지희를 애 엄마 품에 안겨주고 벌떡 일어섰다.
“내가 할게. 둘 다 앉아 있어.”
곧장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달걀을 세 개 꺼내고 파스타 면을 삶았다.
왜 파스타인가 하면 삶는데 그래도 시간이 걸리니까.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붓고 편으로 썰어낸 마늘을 넣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잘하자.
할 수 있다, 유수현.
괜찮아. 내 줄타기 실력이라면 이 위기도 이겨낼 수 있어.
일주일만 있으면 지현이 오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는 거야.
화이팅!
하지만 의문스러운 게 하나 있었다.
둘 다 알 만한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티가 확 나게 전의를 보이는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
그리고 유지희를 품에 안아 어르며 차수희는 생각했다.
‘한 방 먹었네?’
본래는 이런 계획이 아니었다.
백운상이 나탈리야의 몸으로 돌아갔다는 걸 밝힌다고 해도, 그녀와 백운상이 유수현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와 같아야 했다. 그게 오히려 부담을 덜 느낄 테니까.
두 사람의 승부도 우아하게 펼쳐질 예정이었다.
일주일 정도 셋이서 함께 데이트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첫 번째가 누구인지 판가름 날 거고, 패배자는 자신이 두 번째임을 겸허히 받아들이자고.
분명 그렇게 합의를 봤는데······.
‘비겁하게 기습을 해?’
차수희는 유지현이 강원도로 여행을 간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
아마 백운상이 몰래 손을 쓴 것일 터.
그 말인즉슨 여행기간 동안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다.
차수희의 제안에는 따를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거다.
<정말 이럴 거야? 오빠 곤란해하는 거 안 보이니?>
슬쩍 흘겨본 시선을 백운상이 맞받았다.
<그러면 내가 조사님 하라는 대로 해줘야 해요? 누구 좋으라고?>
<나는 그렇다 쳐도 오빠 생각은 안 해?>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백운상이 답했다.
<그래봐야 도찐개찐인데 뭘 따져요? 쫄리시면 졌다고 인정하세요. 본인이 두 번째라고 인정하면 저번에 말씀드렸던 화장품 같이 가서 사드릴게요. 두 통 사드릴게요. 지금 보니까 좀 많이 필요하실 것 같네요?>
<운상이 너->
<그리고 저 조사님한테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말 있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이니까 지금 할게요.>
잠시 말을 멈춘 백운상이 호전적인 조소를 지었고, 이어서 선언했다.
<덤벼요, 이 도둑고양이야.>
<······그렇게 나오시겠다?>
차수희도 이제는 결심을 굳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얌전만 차리면서 참고 있는다면 그게 바로 SSS급 호구다.
차수희가 담담한 어조로 경고했다.
<후회하게 해줄게.>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던데.>
<내가 언제 두고 보자고 했니?>
백운상이 무슨 뜻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차에 요리를 끝낸 유수현이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둘 다 배고프지? 아침부터 먹자.”
밝은 어조였지만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유수현이 먼저 식기를 들었고,
파스타를 입에 넣기 직전에 차수희가 말했다.
“오빠.”
“응?”
그리고 이어진 질문.
“지금 말해봐. 나야, 쟤야? 둘 중에 누가 더 좋은데?”
유수현이 손에 쥔 포크,
돌돌 말았던 파스타 줄기가 안타깝게 출렁이며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