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14화 (114/130)

114. 외전/ 돈 많은 백수 이수민의 우울 ~절망 편~

띠링, 띠리링.

알람 소리와 함께 이수민은 잠에서 깨어났다.

현재 시각은 오후 한 시.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멍하니 눈을 비빈 이수민은 침대맡에 널브러져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강렬한 제목에 끌려 구매한 소설이었는데 첫 페이지를 읽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졸려서 잔 건 아니었다.

평소에 그다지 책을 즐겨 읽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한 문장 읽고 바로 잠이 올 정도는 아니다.

해서 잠이 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첫 문장을 보자마자 눈물이 흐르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울다 지쳐 잠이 든 것이다.

이수민은 책을 펼쳤다.

어제 보았던 첫 문장을 눈에 담았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소설은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

“수민 언니 어떻게 하지?”

쾌적한 카페 안.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유지현이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천유화가 물었다.

“왜 그래?”

“요즘 언니 너무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천유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가 알기로 스물아홉 살 돈 많은 백수 이수민은 일 년 365일 내내 우울하지 않을 때가 없는, 그야말로 불행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건 유지현도 익히 아는 사실이니 평범하게 우울해한다고 이렇게 고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근래에 무언가 상당히 안쓰러운 에피소드가 있었으리라.

“그 사람이 또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으응. 수민 언니가 잘못한 건 아니구.”

눈치에는 일가견이 있는 천유화가 두뇌를 풀가동했다.

기실 객관적으로 보면 이수민은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외모도 괜찮고 모아놓은 돈도 많다.

싸움도 잘하고 사회적 지위도 어마어마하다.

유일한 결점이라면 인간관계를 매우 안타깝게 구축한다는 것.

사실은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가진 게 많아도 본인이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수민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가령 눈앞에 있는 유지현과, 그리고 한 명 더.

천유화가 빈틈을 찌르듯이 물었다.

“운혜 너도 아니? 전대 교주님이 유수현 씨 좋아하는 거.”

“푸웁-!”

괴상한 소리와 함께 천유화는 코에 와닿는 레몬향을 느꼈다.

생과일은 눈속임으로 들어갔을 뿐이고 사실상 시럽으로 맛을 낸 듯했다.

‘다음에는 다른 데 와야겠다. 운혜는 과육이 많이 들어간 걸 좋아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유화는 태연하게 냅킨을 들어 얼굴에 묻은 레모네이드를 닦았다.

입에 머금고 있던 음료를 내뿜고 만 유지현이 쩔쩔매며 물었다.

“언니 미안. 괜찮아?”

“응, 신경 안 써도 돼. 안 그래도 얼굴 건조했거든.”

“그건 좀······.”

꼼꼼하게 물기를 닦은 천유화가 이어 말했다.

“이거 언니만 아는 거도 아니다? 딴에는 티 안 낸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걸 대체 누가 속는담?”

“아빠는 모르던데?”

유지현이 그렇게 답했지만 천유화로서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전대 교주님이 자기 좋아한다는 가정을 아예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

사실 천유화는 이수민이 하는 짓을 보면서 한심함까지 느꼈다.

작업을 하려면 천유화 자신이 혁련휘를 노리는 정도는 돼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솔직히 언니는 이해가 잘 안 돼. 언니나 운혜는 유수현 씨 전생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전대 교주님은 봤단 말이지?”

“그치?”

“들은 소문의 반만 돼도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 아니. 절대 운혜 아버님 욕을 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거 다 헛소문인 거 언니도 아는데 그냥 그게 뭐랄까 말이 그렇다는 건데 미안해, 진짜 미안해······.”

천유화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유지현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게 한 달여 전 자신의 집 거실에서 이수민이 울부짖던 장면을 떠올리면······.

“아무튼 그래서 수민 언니랑 우리 아빠랑 완전히 사이가 멀어졌거든. 수민 언니 너무 불쌍해.”

침울해하는 유지현을 바라보는 천유화의 표정이 미묘했다.

“저기 운혜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그으, 전대 교주님이 좋아하는 유수현 씨가 운혜 아버지잖아?”

“응.”

“근데 언니가 보기에는 운혜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

“아, 그거?”

천유화가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지만 유지현은 정말로 대수롭잖다는 듯이 답했다.

“수민 언니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이겨? 어차피 가능성 아예 빵이잖아. 나는 수민 언니 불쌍하기만 한데?”

천진난만하고 잔인한 말에 천유화는 아주 드물게, 이수민을 향해 동정어린 마음을 가졌다.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신 후에 유지현이 다짐하듯 말했다.

“나 결정했어. 엄마한테 가서 말하려구.”

‘엄마’라는 말에 천유화의 몸이 흠칫 굳었다.

단단히 참교육을 당한 바 있던 그녀로서는 협검무제 하무린보다도 차수희 쪽이 훨씬 더 무서웠다.

“격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줘서 미련을 끊어내야지. 엄마도 이미 알고 있구 수민 언니 좋아하니까 상처 안 받게 잘 말해줄 거야.”

천유화는 안타까움에 마음속으로나마 이수민의 명복을 빌어줬다.

“그리구 유화 언니.”

“응?”

“진짜로 언니도 모르는 거 맞아?”

“······뭘?”

“우리 아빠 전생 말구 다른 건 모르는 거 맞냐구. 지금 말하면 봐줄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는 듯이 유지현이 앉은 채로 상체를 쭉 폈다.

하지만 이미 유수현에게 비밀엄수의 서약을 단단히 한 천유화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자세한 거는 몰라······.”

“그래놓고 나중에 들통나면 나 진짜 화낼 거다?”

“응······.”

천하의 사기꾼 부부가 대체 언제까지 잡아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천유화는 파국이 될 수 있는 한 늦게 찾아오길 바랐다.

영원히 찾아오지 않으면 더 좋았고.

***

차수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딸, 방금 뭐라구 했어?”

“그러니까 엄마가 수민 언니한테 말 좀 해주면 안 돼? 아빠 포기하라구.”

유지현은 차수희를 설득하기 위해 마련했던 주장들을 꺼내놓았다.

“아빠가 워낙에 멋있잖아. 가만두면 수민 언니 절대 포기 못할걸? 근데 엄마가 나서서 ‘오호홋. 너 같은 게 우리 남편한테 어울리겠니? 나 정도는 돼야지.’ 이런 느낌으로다가 보여주면 수민 언니도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 같은 거지.”

“아휴.”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차수희는 이마를 짚었다.

함께 듣던 백운상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제가 볼 때는 지현이도 정상이 아니에요.>

<‘우리’ 딸한테 왜 그래?>

<당연히 ‘우리’ 딸 맞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더 듣지 마요. 태교에 안 좋겠다.>

하지만 백운상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뱃속에서 살짝 진동이 울렸다.

단지 한 번의 울림이었지만 백운상도 차수희도 어째선지 뜻을 알 것 같았다.

‘재밌겠다. 진행시켜요.’ 라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유지현의 말대로 하는 게 태교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차수희가 답했다.

“알았어. 엄마가 잘 말해볼 테니까.”

“진짜?”

“딸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구 공부 열심히 해. 중간고사 성적은 어떻게 나왔어?”

“실기 만점! 독보적인 전교 일등!”

“필기는?”

“그건 말하기 싫습니다······.”

주춤거리던 유지현이 그대로 현관문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피식 웃은 차수희가 쇼파에 앉았다.

백운상이 말했다.

<우리 제자가 불쌍하긴 해요.>

<그렇긴 하지.>

기실 차수희가 진작에 이수민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는 이제껏 보아온 모든 사냥감들 중 압도적으로 무력했기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로, 딸인 유지현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게다가 차수희 본인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계에서 내려다보면서 이수민의 전생인 진천군을 많이 예뻐했다고 하니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만히 놓아둔다고 해서 그 이상의 배려를 해 줄 생각은 아예 없었다.

백운상도, 차수희도 용납할 수 있는 건 오직 서로뿐이었으니까.

전생의 제자이건, 선계에서 내려다보며 이뻐했건, 사랑하는 딸의 사부이건······.

<어림도 없지.>

<맞아요. 어림도 없죠.>

<운상이 너니까 봐주는 거야.>

<조사님이니까 봐주는 거예요.>

<······.>

<······.>

잠시 침묵이 오갔다.

침묵으로 서로에게 말했다.

둘째만 태어나면 잠재적인 휴전도 끝이라고.

그 후에는 쓰디쓴 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둘째가 태어나고 나면, 백운상은 나탈리야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뿐더러 지금처럼 차수희의 몸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둘째 아이를 가진 걸 알았던 날 꿨던 꿈.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 꿈을 꾼 이후부터 두 사람에게는 그런 예감이 있었다.

“아무튼 지현이한테 말도 했으니까 이수민 씨한테 연락이나 한 번 해봐야겠어.”

<조사님.>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있잖아요······.>

그리고 이어진 말.

차수희는 깊게 고심했고, 바로 곁에 누워서 발장구를 치던 성화가 물었다.

“언니 고민 있어?”

“으응. 아냐.”

그 말대로 차수희 본인의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이수민에게 닥칠 충격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충격을 이겨내고 재기해서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한 것이다.

***

이수민은 떨리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타서 테이블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한 시 오십 분.

약속한 시간까지 십 분밖에 남지 않았고, 사실은 이미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돈도 많았고, 백수여서 시간도 많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차수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어제 오후였다.

조용한 카페에서 잠시 만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긴장감을 주체할 수 없던 이수민은 그 연락을 받은 다음부터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었다.

‘배신한 대가를 치르라는 건가? 지현이 공부해야 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게 아니면.’

가장 두려운 생각.

‘내 남편한테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그런 말이라면······.’

차수희가 보낼 싸늘한 시선을 과연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해서 오전부터 미용실에 들러서 메이크업을 받고, 예쁘게 머리를 다듬었다.

옷도 가장 아끼는 것을 꺼내 입고 나섰다.

물론 차수희 앞에 선다면 한껏 꾸미건 후줄근하게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건 압도당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기 몇 분 전.

마침내 유리문이 열리고 차수희가 모습을 보였다.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감탄하며 이수민은 절망을 담아 읊조렸다.

“인스타 사진으로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중얼거림을 다행히 차수희는 듣지 못했나 보다.

인사를 하며 이수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이수민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감 넘치고 기품 있는 차수희의 외견은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망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하셨죠?”

“그게 있잖아요.”

말끝을 흐린 차수희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수민의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래. 뭐야. 무서워······.’

“하나 알려드려야 할 게 있거든요. 전화나 문자로 말할 문제는 아니라서요.”

“네?”

되묻는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차수희가 눈을 감았다.

이수민이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가서 ‘속눈썹 길다······.’ 라고 감탄하고 있는 사이 차수희가 눈을 떴다.

아니, 차수희가 아니었다.

분명 외모는 같았고 분위기도 닮은 데가 있었지만 눈빛에는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이수민은 자신에게 저런 시선을 보낼 상대를 오직 한 명만 안다.

그리고 생각이 결론까지 가닿는 것보다 빠르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용케도 얼추 알아보는구나.”

“······네?”

“천군아, 내가 네 사부다.”

“············네?”

이수민이 전생에 기억하고 있던 것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백운상이 말했다.

***

자체적으로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보자마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발신인 이수민.

이제 연락 안 오겠지 싶어서 차단을 풀었는데 어떻게 귀신같이 안 거지?

문자 내용도 가관이었다.

장소를 하나 적어두고는 하는 말이란 게.

<오늘 나한테 잠깐만 시간 내줘. 지금부터 계속 기다릴게. 잠깐이면 되니까. 꼭 나와줘.>

이러고 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끄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다신 귀찮게 안 할게. 제발.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이 새끼 뭐지?

단어 하나하나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갑자기 왜 이래. 사람 찝찝하게시리.

“이 질척질척 질뻐기 같은 놈.”

구시렁거리면서 옷을 챙겨입었다.

그래. 마지막이라잖아.

오늘이야말로 사악한 치코리타와 나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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