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
***
“다녀오겠습니다.”
가방을 멘 지현이가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마지못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건 내 피해의식이겠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치코옷’이라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끝난 그날의 사건이 벌써 보름 전이었다.
한데도 아직 나랑 지현이는 완전한 화해에 이르지 못한 거다.
모두 이수민이 막판에 거하게 망쳐버린 탓이지.
지금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지랄을 해놨으면 차라리 끝까지 뻔뻔하게 나갈 것이지.
지현이와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간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장문의 메시지가 온 거다.
횡설수설 적어놓은 걸 요약하면 이런 거였다.
‘실수다. 진심이 아니었다.’
물론 그걸 본 나는 그놈을 진심으로 때리고 싶었다.
꾹 눌러 참으면서 ‘늦었어. 우리는 이미 끝났어.’ 라고 보냈더니······, 아예 전화까지 왔다.
술이 떡이 된 목소리로 이수민이 말했다.
<져대로 이러캐는 모 끈내! 졔발 브탁이니끄, 나안테 하 번만 더 기해르->
“수민아.”
이름을 한 번 부른 뒤에, 입모양으로만 ‘이 좆같은 새끼야’라고 했다.
소리내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별다른 건 아니다.
그냥, 괜히 더 엮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 안 좋았던 건 다 잊고 서로 좋은 추억으로만 남기자. 지금까지 너한테 상처 줬던 것들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 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럼 잘 지내라.”
<아, 앙대->
안 되는 건 니 새끼 술버릇이고요.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후에 메신저 앱과 전화, 문자까지 모두 차단했다.
그리고 내 품에 꼭 안겨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애 엄마가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 안타까워하는 듯한 어조였다.
“오빠 대사가 너무 아련한 거 아냐?”
“그랬나?”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지만 이수민과 나 사이인데 착각할 여지는 없겠지.
배신자 놈은 그렇게 일단락을 지었고 다른 부차적인 문제들도 빠르게 정리를 해냈다.
정파 환생자들이나 우철이, 김유진한테는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전생이라던가 잠깐 실종됐었다던가 하는 건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사마군 놈들한테도 지현이에게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겠노라 맹세를 받았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후에는 지현이와 나 사이의 관계를 원래대로 돈독하게 되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 효과가 미비했다.
애 엄마와 백운상, 나까지 세 명이 합심해서 여러 작전을 구사했는데도 여전히 부녀지간의 대화는 살얼음판을 오가는 듯이 데면데면했던 거다.
일례로 지난 2주 동안 지현이가 내 앞에서 활짝 웃어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다소 침울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나는 배웅하는 애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갔다 올게.”
“오빠 오늘 몇 시 퇴근이야?”
“집 오면 여섯 시쯤? 근데 왜? 일찍 올까?”
“나는 당연히 일찍 오면 좋은데······, 운상이가 야근해서 돈 많이 벌어오라는데?”
태연한 표정으로 답한 애 엄마가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아마도 격렬하게 부정하고 있을 백운상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일 터.
둘이서 서로 장난스럽게 이간질을 하는 이런 상황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장난 맞겠지?
그래, 장난이 아니면 뭐겠어.
애써 행복회로를 혹사시키며 출근길에 나섰다.
***
차수희는 손을 흔들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백운상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언제 그랬어? 당장 가서 아니라고 말해요. 빨리 말하라고!>
<음······, 싫은데?>
<진짜 해보자는 거죠? 어디 한 번 두고 봐요.>
백운상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차수희는 아랑곳않고 커피를 한 잔 내렸다.
그리고 앳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화가 눈을 부비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혼자 두기는 불안했던 탓에 집에서 돌보기로 한 것인데 이제는 거의 한 식구나 다름없게 된 상황. 유수현과 유지현이 집을 비운 낮에는 성화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함께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마무리한 오후.
요즘은 유튜브에 푹 빠진 성화가 쇼파에 누워서 깔깔 웃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차수희가 물었다.
<운상이 네가 저 몸으로 돌아간 후에도 가끔은 저 애 볼 수 있겠지?>
<그렇겠죠. 조사님이랑 저랑 하는 것처럼 하면 될 테니까. ······제가 못 돌아가는 게 문제지.>
<그거 말인데 운상이 너는 정말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차수희로서는 진지한 질문이었지만 백운상이 단출하게 답했다.
<이제 안 돌아갈 이유도 없잖아요?>
이미 하무린도 차수희도 자신을 인정한 마당에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몸을 되찾아야 비로소 제대로 한 판 승부를 벌여볼 수 있을 터.
지금은 상황상 불리하니 조금 자제를 하고 있다만 그때는 인정사정 볼 것도 없었다.
건방진 도둑고양이에게 누가 진정한 정실부인인지, 첫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줄 수 있으리라.
피식 웃은 백운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현이도 걱정하니까. 방법만 찾으면 그게 낫죠.>
<그렇긴 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남은 건 두 가지였다.
유수현과 유지현 부녀의 관계 회복.
지금도 나탈리야를 걱정하는 유지현을 안심시키는 것.
결코 쉬운 문제들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차수희는 생각했다.
다 잘 될 거라고.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차수희는 문득 잠에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응?”
“조사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신을 ‘조사님’이라고 부르는 건 오직 한 명밖에는 없다.
“운상이니?”
“네. 한데 조사님 어떻게 그 모습으로······.”
“내가 왜?”
“제가 알던 그대로십니다.”
“그래?”
스스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일월령이었을 때의 외모인 모양이었다.
차수희가 말했다.
“너도 그런 것 같은데?”
“저도요?”
“응. 나야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은 말투도 평소에 쓰던 까칠한 말투 아니네.”
“제가 또 언제 그랬다고 모함을 해요?”
“그래. 이런 거 말하는 거야.”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가히 보기가 좋구나!>
“뭐야?”
차수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목소리였던 백운상은 흠칫 놀랐다.
새하얀 궁전에서 마주했던 청초한 여인.
선계의 신이었다.
<지금은 너희가 따로 떨어져서는 안 되니 안 될 일에 구태여 애를 쓰지는 마려무나.>
“그거 말하는 거 같지?”
“네, 조사님.”
백운상이 나탈리야의 몸으로 돌아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목소리가 이어졌다.
<슬픔을 품고 올라왔던 아이야. 이제는 행복을 찾았더냐?>
“네.”
백운상이 확신을 담아 답했다.
<잘 되었구나. 때가 되면 자유로이 오갈 수도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렴.>
“그리 하겠습니다.”
자애로운 목소리가 이번에는 차수희를 향했다.
장난기가 서린 듯이.
혹은 슬픈 듯이 말했다.
<욕심쟁이야. 네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졌구나.>
“네?”
차수희가 의아하게 물었다.
일월령과 선계의 신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때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기억을 잃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기어이 다 이루었구나. 그리 고생을 하더니······, 다 이루었어.>
차수희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무엇이 그리도 재밌고 슬펐기에 세 말썽쟁이들이 난리를 쳤는지 나도 궁금했단다. 사내아이에게는 일전에 언질을 두었고 이번에는 너희 둘 차례야.>
영문 모를 말에 백운상과 차수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한 마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엄마들’>
두 사람이 함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다.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차수희가 물었다.
<운상아?>
<네?>
<방금······, 너랑 나랑 같은 꿈 꾼 것 같은데.>
<그쵸?>
<혹시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나?>
<아뇨. 조사님도요?>
<응.>
차수희와 백운상이 잠시동안 골몰했다.
꿈을 꾼 건 확실한데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를 꼭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쇼파에서 잠이 든 성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두 사람이 집을 나섰다.
***
유지현이 걱정스레 물었다.
“수민 언니 진짜 괜찮아?”
“응. 꼭 가고 싶어.”
이수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얼굴을 보고 싶었다.
메시지 앱, 문자, 전화까지 유수현에게 차단당한 지가 보름이었다.
공중전화로도 몇 번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아예 받지도 않았다.
결국 이수민이 생각한 방법이란 제자를 앞세우는 것.
유지현에게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야 한다고.
‘그래. 아직 지현이랑 화해 제대로 못했다잖아? 내가 도움을 주면 혹시 용서해 줄지도 몰라.’
그런 희망을 떠올리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수민의 손을 잡고 있던 유지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언니 힘들면 그냥 안 가도 돼.”
“아냐, 전혀 아냐! 그리고 그때 지현이가 본 건 아까도 말했지만 언니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언니 치코리타 흉내내는 거 좋아해서.”
“그걸 누가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지현도 내심은 복잡했다.
물론 존경했었던 사부님이 치코리타 흉내를 내며 울부짖는 장면은 충격적이었지만 요즘 아빠가 자신과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마음에 밟혔다.
이수민과 유수현, 차수희 사이에도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
내막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냥 아빠만 나쁜 사람 취급할 수도 없다.
물론 내막이고 자시고 나쁜 건 맞다.
그건 맞지만······, 어딘가 참작을 해줄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말해서 적절한 계기를 찾지 못했을 뿐 유지현도 화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빠가 언니한테 사과하면 나도 사과해야지. 오늘 정마 대통합을 이뤄내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언니 들어가요.”
“으응.”
유지현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방방 뛰는 성화와,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차수희와 마주했다.
***
현관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손에는 야심차게 쥔 치킨 봉투.
이걸 지현이랑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한 번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문에 손을 댔는데, 내가 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딸······?”
즐거움을 주체 못하는 얼굴을 한 지현이가 나를 맞아줬다.
상당한 놀라움과 그조차 압도하는 기쁨.
우리 딸이 나를 이렇게 대해준 게 도대체 얼마만이냐······.
지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빨리, 빨리 와!”
그리고 거실로 들어섰다.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져 있는 음식들.
케이크도 큰 게 하나 올라가 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이건 성화.
“오, 오랜만이야······.”
이건 이수민.
얘는 또 왜 있냐.
“오빠 어서 와.”
이건 애 엄마.
그리고 백운상도 함께 있겠지.
여기에 연신 싱글거리는 지현이까지 더하면 우리 집 거실에 여섯 명이나 모인 거다.
치킨 상자를 내려놓으며 내가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응!”
지현이가 즉각 답했다.
애 엄마를 향해 시선을 보냈지만 웃음만 짓고 있다.
그리고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 놀라지 마?”
“응?”
“있잖아, 나 동생 생겼다?”
“동생?”
내가 되묻는 것과 동시에.
파앙!
폭죽이 터졌다.
파앙, 파앙!
연이어 폭죽을 터뜨린 성화가 외쳤다.
“와! 동생! 와! 둘째!”
“마, 만세!”
어느새 고깔모자를 집어쓴 이수민이 더듬거리며 호응했다.
애 엄마가 내게 다가왔다.
“진짜로? 지현이 동생?”
“응.”
애 엄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지현이가 즐겁게 물었다.
“아빠 태명 뭐라고 할 거야? 이름은? 아기용품도 사러 가야지!”
“······.”
너무 기뻐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게 여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이라는 거지?
내가 이제 애가 둘이고, 우리 둘째 애 엄마도 둘이고.
나랑 애 엄마 주위를 빙빙 돌던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 케익 초부터 불자. 불 끈다?”
거실에 불을 끄고 케익 중앙에 커다란 초에다 불을 붙였다.
박수와 함께 노래까지 부르고, 나와 애 엄마가 촛불을 불어서 껐다.
다시 거실이 환해지고 지현이가 놀라서 물었다.
“아빠 울어?”
아닌 게 아니라 눈물이 자꾸 나와서 눈앞이 흐렸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그냥 행복했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봤다.
이수민의 얄미운 얼굴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성화의 천진난만한 미소.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애 엄마와 백운상.
함께 있을 둘째 아이.
그리고 지현이와 마주했다.
지현이가 나를 보며 웃었다.
저 미소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해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사랑하는 우리 딸의 아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거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게 전부다.
***